"나도 처음부터 여기 일이 좋았던 건 아니야. 하지만 일하다 보니 나쁘지 않더라고. 얼마든 비웃어도 되는데, 난 내 일에 자부심을 느껴. 내가 잘하는 일이고,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거든." - 영화 <라스트 시프트>, 패스트푸드점에서 38년간 일한 스탠리의 말 중
흔히 카페 직원을 지칭할 때 알바라는 말을 쓰곤 한다. 알바가 이 커피를 만들어줬는데, 알바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하지만, 정말 그 직원이 알바일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사실 직원의 종류는 다양하다. 정말 단지 부업으로만 알바하는 학생일 수도 있고, 매니저일 수도 있고, 정규직일 수도 있고, 사장일 수도 있고, 그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일 수도, 일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내가 평생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가게 점원을 알바라고 지칭하는 일이다.
알바생이라는 말은 특정한 연령대, 혹은 사회적 위치를 지칭하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알바+학생'의 합성어인 알바생이라는 말은 연령대가 어린, 노동이 직업이 아닌 사람을 일컫는다. 알바는 주로 돈 없는 학생이 하는 일이고, 학업을 제하고 남는 시간에 하는 부차적인 일이라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알바는 곧 부업'이라는 시각이 '알바생'이라는 단어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래서 알바생이라는 단어가 그리는 프로필에서 벗어난 알바생은 차별적인 시각을 마주하게 된다. 나이가 많은데 알바나 하는 사람,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알바나 하는 사람이라는 식의. 실제로 그 사람이 생업을 걸고 하는 일이건 아니건 간에, '알바생'은 제대로 된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물론 이건 극단적인 예시기는 하다.
알바생이라는 단어는 보편적인 직업의 기준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더욱 차별적이고 폭력적이다. 알바는 '제대로 된 직업'이 아니고, '진짜 직업', '최종적인 직업'은 따로 있다는 식의 뉘앙스. 정규직 일자리이고, 시급으로 노동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연봉을 받는 일자리이고, 단순 노동보다는 조금 더 머리를 쓰는 일자리, 충분한 훈련을 거쳐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이 말하는 '진짜 직업'에 해당한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혹은 학생들이나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기 전에 하는 것이 알바기에 다른 직업인들과는 다른 층위에 놓인다.
그래서 모든 알바노동자, 혹은 일반 노동자들까지도 알바생이라고 지칭하는 일은 굉장히 큰 실례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일이다. 설령 그 '알바생'이 정말 부업으로, 취미로 노동할지언정 그의 노동의 가치가 희석되지는 않는다. 노동의 가치는 단순히 정규직, 혹은 머리를 쓰는 일, 중요한 결정을 하는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아실현이라는 거창한 가치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오로지 돈만을 벌기 위한 노동이 알바기에,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장래희망과는 거리가 먼 일자리를 가진 노동자들은 '최종적인 직업을 가지지 못한 알바생'이라는 존재로 전락한다.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한 사람을 향한 은근하고 교묘한 시선들을 파헤치고 있다 보면, 정상의 기준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사회가 말하는 정상은 절대 평균값이 아니고, 정말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정상이어야만 하는 모순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
누가 봐도 분명하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차별도 있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도 차별을 발견하곤 한다. 대부분의 차별은 너무나 비가시적이고 때로는 위선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따라서 문제를 감지하려면 극도의 민감성이 요구되기에, 나는 둔감해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를 알바생이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