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그 제목이 직관적으로 드러내듯이, 그림자를 돈으로 바꾼 잘못된 교환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다.
김영하가 <여행의 이유>에서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언급하며 '그림자'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해석을 한 적이 있다. 이 해석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사람다운 부분을 잃어버린 한 사나이의 여정을 그린다. 사나이는 그림자를 팔고 돈을 얻었지만, 그로 인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림자'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양심과 같은 도덕적인 가치를 의미한다는 관점도 있고, 시대적인 배경을 토대로 해석하는 관점도 있다. 뭐가 되었건,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평소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한 부분이 없어졌을 때에 생기는 일, 즉 돈으로 교환할 수 없는 것을 교환했을 때에 생기는 일을 그려내며 '그림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만약에, 이 사나이가 돈을 주고 판 '그림자'가 말 그대로 '그림자'라면 어떨까? 양심과 같은 도덕적이고 긍정적인 가치가 아닌, 한 개인의 어두운 부분이라면? 화려함 뒤에 감춰진 그늘이라면? 내가 그토록 버리고 싶어 하는 나의 약점이라면 어떨까? 행복의 이면인 슬픔과 괴로움이라면 어떨까?
돈을 주고 나의 단점과 괴로움을 사 간다는 사람이 있다면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어차피 없애고 싶었는데, 돈까지 준다면 마다할 필요가 없겠지. 이 관점으로 보아도, 그림자의 중요성은 여전히 유효할까? 그림자가 없어진 사나이는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처럼 대우받지 못할까?
그늘이 없이 밝기만 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환영할 것 같아만 보인다. 어두운 면도, 괴로움도, 슬픔도 없고 단점도 없는 사람은 마냥 행복할 것만 같다.
그러나 그림자가 없는 실체는 허상이다. 3차원 공간 속 모든 입체에는 명암이 있다. 괴로움이 없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나 잘 숨기냐, 혹은 얼마나 드러내 놓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림자를 아주 잘 숨겨서 그림자가 없는 존재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다. 그림자를 잘 숨긴다 한들 잠시뿐이다. 떼려야 뗄 수가 없는 나의 그늘을 이왕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한다면 잘 공생해보는 편이 낫다.
반대로 말하면, 개인의 어두운 면이 곧 개인을 사람답게 만드는 요소다. 나를 허상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게 나의 그늘이다. 그늘이 있어야 비로소 내가 이 세계 속의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다.
내가 아무리 나의 괴로움과 단점을 싫어한다 한들, 나는 기계나 신기루가 되고 싶지 않다. 그림자가 없는 평면적인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잘 입력된 밝음만을 뱉어내고, 꾸역꾸역 잘 숨겨놓은 그림자가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고 싶지 않다. 그림자를 부끄러워하지도, 없애버리려 하지도 않고 가장 사람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국 내 그림자를 인정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일이다. 그림자를 팔아버린 사나이가 마을 사람들에게 어딘가 다르게 대우받았듯이, 나 역시 평면적인 존재와는 사람다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 모든 존재는 그림자가 있는 걸 뻔히 아는데, 애써 그걸 숨기려는 사람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가 그늘 없이 선명할지언정, 자신의 그늘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의 단면만을 보며 살게 된다. 소설 <플랫랜드>의 개념을 인용하자면, 스페이스랜드(3차원)의 세계와 플랫랜드(2차원)의 세계만큼의 갭이 생기는 셈이다. 하나의 평면만을 보고 그게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플랫랜드의 어떤 형체가 아니라 입체적인 세계 속에서 길이와 너비와 두께를 지닌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