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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꾸 Dec 19. 2020

조선시대 기녀와 시조

 

 

상춘야흥 (賞春野興) : 무르익은 봄날의 들판에서 여흥을 즐기다, [출처] [혜원 신윤복]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유희와 일상

사대부의 유흥공간인 연회() 등에 참여하기 위해서 기녀는 신분은 가장 미천한 천민이지만 사대부와 어울릴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시조는 개인적 서정으로 쓰여 지지만 사대부의 시조는 유교적 이념에 벗어나 있지는 못한다. 이에 반해, 평시조 형식을 사용하였지만 기녀 시조는 수작, 기지, 상사(想思) 등으로 인간의 내면과 속성을 잘 표현한다. 해어화(解語花)라고 불리기도 하며 국가의 재산이자 재주를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직업여성인 기녀들은 계층, 성 위계질서, 예술가, 연인 등 다양하면서도 중첩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 여성으로 확인시켜 주는 님은 욕망의 대상이 되었고 자주 겪어야 하는 작별은 심리적으로 결핍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러기에 기녀들의 애정시조에는 님의 부재와 그리움의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주로 사대부의 풍류 현장에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술잔을 주고받고 말을 주고받으면서 시조를 지었고 이런 시조 짓는 능력이 기녀가 갖추어야 할 소양이었다. 특히나 수작과 기지는 기녀 개인이 관련된 게 아닌 풍류공간의 정황과 상대하는 사람들을 고려해야 하는 아주 가변적인 상황인 만큼 그들의 호응을 얻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기녀들은 이에 대한 소양을 잘 갖추어야 했다. 기녀가 품류를 분별(品流)하는 일은 공간의 성격과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고 인물을 품평인물(衡尺)하는 일은 손님의 성향을 간파하는 것이다. 명기(名妓)란 이렇게 손님에 맞추어 응대하는 것이다. 이런 명기의 능력을 갖춘 대표적인 조선 전중기의 기녀로는 진옥, 한우, 황진이, 금춘, 설매, 소춘풍, 소백주가 있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줄을 모로다ᆞ냐

이시라 하ᆞ더면 가랴마나ᆞ간 제 구타ᆞ야

보나ᆡ고 그리나ᆞ간 情은 나도 몰라 하ᆞ노라 -황진이

 

  황진이의 위의 시조를 보면 화자가 원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옆에 있기를 원하는 것만이 아닌 님을 붙잡지 않고 떠나게 놔둔 후의 심리적 마음을 표현했다. 순간적 흥분이 아닌 사람을 욕망한다는 것은 육체에 대한 마음의 우위를 나타내는 것이며 대상에 대한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는 자기는 이성을 발현하는 자기로 거듭나게 된다. 이처럼 기녀들의 애정시조는 고통을 감당하는 참다운 자기를 행위주체로 구성한다.

 

북천(北天)이 마ᆞ갉다커를 우장 업시 길을 나니,

산의나ᆞ간 눈이 오고 들에나ᆞ간 챤비 온다.

오나ᆞ갈은 챤비 마자ᆞ시니 얼어 자ᆞ갈가 하ᆞ노라. -임제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차ᆞ간비 맛자신이 녹아 잘ᄭ가 하ᆞ노라. -한우


 위의 시조는 임제가 ‘한우’라는 기생 이름에 빗대어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자겠다고 하자, 한우는 찬비에 자신을 빗대어 원앙침 비취금 속에 녹아 자라고 한 것이다. 서로 빗대어 말하며 남녀 간의 수작임에도 속되지 않게 표현되었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여성관인 정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가 아닌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수작시조 중 하나이며 전통적인 남성성과 정적이고 수동적이기만 한 당시의 여성성을 넘어선 작품이다.

기지 시조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은 연회에서 술에 취한 정승과 설중매의 시조다. 裵(배)정승이 ‘너는 아침에는 동쪽에서 자고, 밤에는 서쪽에서 잔다고 들었다. 그러니 노부를 위하여 薦枕(천침)하라’라고 하자 이에 설매는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자는 천한 기생의 몸을 가지고, 왕씨를 섬겼다가 이씨를 섬기는 정승을 侍寢(시침)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응수하며 당시 고려의 왕씨를 섬기다 이젠 조선의 이씨를 섬기는 사대부를 비꼬는 시대를 풍자한 시조를 짓는 기지를 발휘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녀의 시조는 사대부의 형식인 평시조 형식을 차용했지만 유교적 이념이 아닌 인간의 심리를 아주 입체적이며 다양하게 표현해 주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하겠다.  


 조선 전중기의 시는 상사(7수), 수작(6수), 기지(5수)가 남아있으며 남성적 감성 양상은 특정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와서는 수작시조는 찾을 수 없고 기지와 관련된 시조만 1수 있으며 조선 전중기에 걸쳐 나타나는 상사 시조의 양상도 많은 차이가 있다. 기녀 입장에서는 조선 전중기에 나타난 상사는 일방적 사랑이 아닌 쌍방적 사랑의 감성에 기반을 둔 시조라 조선 후기의 수동적인 상사와 다르다. 위에서 살펴본 황진이의 시조에서 나와 있는 것처럼 이별이 상대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잡았으면 떠나지 않았기에 ‘이시라 하ᆞ더면 가랴마나ᆞ간’처럼 이별의 이유가 상대방이 아닌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확증된 글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기녀 시조는 전기의 당당함과 감성이 약화 되었으며 대체로 수동적인 상사시조를 지었을 뿐 기지나 수작시조는 찾기 어렵다. 이러한 요인은 기녀의 내외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내적요인은 기녀가 손님에 맞추어 응대하거나 진실로 밀칠 수 없다는 기녀의 소양이 조선의 전중기에 비해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고 외적으로는 명기의 소양을 여전히 갖추었지만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직업 여성으로서 그들이 상대하던 자들이나 풍류공간의 변화가 이유가 될 것이다.

기녀 집단 내외부의 변화는 궁중 여악의 폐지와 기녀에 대한 관의 통제력 약화로 요약해 볼 수 잇다. 인조반정 이후 장악원의 여기를 혁파하고, 여악을 폐지하면서 기녀에게는 사적인 활동의 영역이 넓어지게 되었다. 관의 지배로부터는 자유로워졌지만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막마저 사라졌기에, 기녀들은 부득불 생업의 현장에 나서야만 했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문인이자 작가인 기녀보다는 창자로서의 기녀를 선호하는 환경을 조성하게 되었다.

연소답청 (年少踏靑) : 젊은이들의 봄 나들이, [출처] [혜원 신윤복]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연애와 기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을 겪고나서 사회는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되자 질서회복과 안정추구의 방책으로 예를 중시하게 되었고 이런 국가적 시책과 가문의식이 결합되어 열녀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었다. 이런 열녀에 대한 관심이 전계층으로 확장됨에 따라 기녀시조도 수동적인 여성성을 강조하는 상사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조선 전기의 분별품류(分別品流)와 품평인물(衡尺人物)에 기반을 둔 세련된 상사, 수작, 기지 시조는 수축되었다. 기녀가 쌍방적 사랑의 감정에 기반 둔 상사나 노골적인 수작 그리고 연회를 압도하는 기지를 하는 것은 조선 후기 열녀를 강요하는 사화분위기에서는 반한다. 그러기에 수동적 사랑의 비애를 노래한 상사시조의 비중이 커졌다. 하지만 명기에 대한 바람을 완전히 배제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모험적인 세련된 상사, 기지, 수작의 시조 대신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 고백의 형태로 나타났다.


솔이 솔이라 한이 무슨 솔만 넉이는다

千尋絶壁[천심절벽]에 落落長松[낙락장송] 내 긔로다

길아래 樵童[초동]의 졉 낫시아 걸어볼 꼴 잇시랴 -송이


 위의 시조는 훤칠한 소나무인 자신이 길 아래 나무꾼의 낫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송이의 시조다. 자신을 높은 절벽에 있는 소나무에 비유한 송이는 초동의 낫이 자신을 결코 걸 수 없다며 명기의 소양을 펼칠 수 있을 만한 손님을 고대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기녀가 분별품류와 품평인물의 소양을 구사한 이런 독백적인 시는 여전히 조선초기의 명기의 시조를 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근대 이전의 국문학에서 여성의 작품은 많지 않고 더욱이 실명(實名)을 가진 여성작가의 작품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기에 기녀시조는 우리나라 여성문학사에서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명기나 불리던 기녀 시조의 작품들은 사대부의 작품을 능가했고 기녀라는 특수한 직업적 특성으로 인해 일반 사대부나 여성들이 쉽게 펼칠 수 없는 시조를 지었다. 적극적이고 농염한 수작의 시조를 짓기도 하고 사대부를 조롱하는 글도 선을 넘나들며 기지를 발휘해 지었다. 상사 시조의 경우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것 만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깊은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기도 하며 자아성찰의 태도가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하게 인간심리의 모습을 표현한 기녀시조는 여성문학사의 큰 축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문학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서도 계속 해서 커다란 호응과 동감을 얻고 있으며 현대의 대중문화의 가장 커다란 축을 형성하고 있는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도 꾸준히 화자 되어 변형되거나 원형 자체로 작품으로 만들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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