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인도의 델리에서 한국인 모녀를 만났다. 영어를 아주 잘하는 딸과 50대 어머니.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딸은 여행에서 만난 이런저런 외국인 친구에게 틈틈이 엽서를 써 보냈는데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갈 때가 그녀가 가진 오롯한 자유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혼자 갔다 오겠다고 하며 사뿐한 걸음으로 사라지곤 했다. 어머니는 크로쓰로 메는 가방에 간장에 절인 말라빠진 무장아찌를 비닐봉지에 둘둘 말아 가지고 다니셨다. 식사를 할 때면 그걸 꺼내 드시면서 우리에게도 선심 쓰듯이 몇 조각 주셨다.
'이거랑 같이 먹으면 입맛이 살아!'
장아찌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주시는 걸 거절할 수는 없어서 받아먹었다. 굵은소금을 한 꼬집을 먹은 것 같았다. 인도음식을 먹어 통통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한 나로서는 그 장아찌를 먹으며 입맛을 살릴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인도의 북부 라다크에서 길을 걷다가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멘 키가 큰 동양 여자를 만났다. 그녀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오랜만에 만난 한국인이라는 반가움 때문인지 그녀는 내게 짜이(인도식 밀크티) 한 잔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키가 크고 마른 그녀는 강단이 있게 생겼다는 말은 저런 사람을 이르는 것이 아닐까 했다. 당시 '바람의 딸'이라고 불리던 한비야가 인기가 많았던 시절이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녀보다 이분이 더 많은 나라를 여행하셨다.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40대 중반쯤 보이던 그녀는 이렇게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다가 길거리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한두해 지나서였을까. 미용실의 여성 잡지에서 그녀의 인터뷰가 실린 글을 읽었다. 그녀의 슬픈 개인사 이야기는 하지 않으련다.
라다크에 있는 동안 그녀를 여러 번 만났다. 한 번은 절에서 만났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절에서 라마들과 같이 점심을 먹는데 그녀가 가방에서 꺼낸 건 고추장 튜브. 내가 미처 거절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 접시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고추장을 꾹 짜 주며 웃었다.
라다크에서 같이 지내던 언니는 김치를 담았다. 옆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마늘 까는 것을 투덜거리면서 돕기는 했는데 여행까지 와서 굳이 김치를 꼭 먹어야 하나 하는 불만이 컸다. 현지 음식을 즐겨야 하는 거 아닌가. 여행을 왔는데.
그곳에서 산 고춧가루는 오렌지 빛이 나고 보통의 한국에서 사는 고춧가루보다 가늘게 빻구어져 있었고 더 매웠다. 언니는 맨손으로 김치를 버무렸다. 손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김치를 담은 시간보다 더 길게 손을 물에 담가 열기를 빼야 했다.
한통 가득 담아 놓은 김치를 반도 채 먹지 않았을 때였는데 언니와 외출하고 돌아와 보니 20대 초반 한국인 배낭여행객 남자 두 명이 바닥이 보이게 다 먹어 버렸다. 같이 지내던 스님이 대접을 했던 거였다. 바닥이 보이는 플라스틱 김치통을 언니는 망연히 보고 있었는데 배낭족과 스님은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은 채 겸연쩍은 표정만 짓고 있었다. 난 그 김치 맛을 기억하지는 못 한다.
다람살라의 맥 끄로드 간즈에서는 우리나라의 칼국수나 수제비와 비슷한 뚝빠와 뗀뚝이라고 하는 티베트 음식을 팔았다. 여행을 온 한국인들이 당연 좋아할 만한 음식인데 그 뚝빠 집에서는 국수에 토마토를 얹어 주었다. 살짝 익힌 토마토가 고명처럼 올라와 있었다. 그 뚝빠 집에서 만난 자신의 여행 무용담을 즐기던 한국인 청년은 여기 애들은 토마토를 익혀 먹는다고 짜증을 내며 토마토를 건져냈다.
인도 오르차에서 혼자 돌아다닐 때였다. 짜이 한 잔을 마시러 들어간 식당에 앉자마자 10살 정도 되었을까 하는 까맣게 마른 남자아이가 다가와 주문을 받는다. 짜이를 갔다 주며 아이가 묻는다. 한국인이냐고. 지난번에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왔다 갔는데 그때 김치 담는 법을 배웠단다. 그러면서 보기에도 시큼해 보이는 작은 투명 플라스틱 통에 든 김치를 가지고 온다. 주황색과 노란색의 중간쯤 되어 버린 김치를 가지고 와 내미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한 조각 먹었다. 식초를 한 숟가락 먹은 것 같았다. 아이는 내일 오면 동네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내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