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일 감독 영화 〈국보〉감상기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나는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처럼
남성이 여성의 역할까지 독점하는 전통 예술에 대해 어렴풋한 감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국보〉를 보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동아시아의 세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만 이런 전통문화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중국에는 경극이 있고, 그 위에 영화 〈패왕별희〉가 있다.
일본에는 가부키가 있고, 이제 여기에 영화〈국보〉가 생겼다.
두 문화권 모두 자기들의 전통과 성별 규범을 바탕으로, 예술과 비극, 혈통과 욕망을 한데 엮은 강력한 서사를 스크린 위에 올렸다.
남자만이 무대에 오를 수 있고, 여자 역할마저 남성이 연기하는 구조.
이 배타적인 규칙이야말로 그 전통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길게 살아남게 한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
우리나라에는 남자만이 여장을 하고 무대에 오르는 식의, 전통문화가 없다.
대신 20세기 중반 잠깐 반짝였다 사라져 버린 여성국극이 존재했었다.
남성이 여자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남자를 연기하는 무대.
전통이라 부르기엔 짧았고, 계보라 부르기엔 얕았다. 그건 한 시대의 공기 속에서 잠시 피었다가 흔적처럼 사라졌다. 문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정말 그것뿐이었을까?
예술을 소비하는 구조가 오랫동안 남성 중심이었다면,
‘여성이 남성을 연기하는 전통’이 오래 버티기란 애초에 불리한 게임이었을지 모른다. 남성 배우의 계보, 남성 가문의 서사, 남성만의 무대라는 설정은
남성 관객에게 충분히 매력적이면서도, 여성에게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낯선 신비로 작동할 수 있다.
반대로, 여성들이 무대를 장악하고, 남성 역할까지 수행하는 여성국극은
남성 중심 시장에서 “주류로 편입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단지 예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욕망을 중심에 둘 것인가를 둘러싼 구조의 문제다.
‘남성만이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어쩌면 폭력적인 규칙을 기반으로 축적된 서사와 신화, 그 위에서만 가능한 어떤 드라마가 우리의 역사에 없다는 게 다행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묘한 마음을 갖게 한다.
〈국보〉를 보며 가장 먼저 되새기게 된 것은, 왜 우리는 남성이 여성 역할을 연기하는 무대에 유난히 강한 감정을 느끼는가 하는 점이다.
남성이 여성으로, 자기 몸의 외형을 넘어서 타인의 젠더를 “입는다”는 것.
그건 단지 화장과 의상의 문제가 아니라, 몸짓, 목소리, 시선의 방향까지 통째로 바꾸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이 전통은 이미 하나의 금지된 변신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금지성이, 우리가 느끼는 경외와 처연함의 정체가 아닐까 싶다.
단순히 “연기를 잘해서” 감탄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인 배우가, 여성이라는 타자의 몸을 통과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감정의 결에 닿았을 때, 우리는 그 위태로운 경계 자체에 반응한다.
그 모순적인 상태. 남자이면서 여자이고, 현실이면서 허구인 존재.
그 긴장이 작품을 더 예술적으로 보이게 하고, 동시에 이상할 만큼 슬프게 만든다.
중국의 〈패왕별희〉를 보았을 때,
그리고 이번에 〈국보〉를 보며 느낀 감정은 그 지점에서 선명해졌다.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인물과 관계가 예술이라는 틀 속에서만 완성되는 순간.
그 불가능한 감정이, 가장 진실한 사랑이나 헌신, 혹은 파멸로 다가오는 순간이
우리가 깊이 빠져드는 지점이라는 것을.
〈국보〉를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축은, 가부키가 혈통을 전제로 한 예술이라는 점이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름이 계승되고, 역할이 계승된다.
무대 위에서 연기되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무대 밖에서 이어지는 가문의 서사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가 된다.
콘텐츠는 넘쳐나고, 취향은 분산되고, 무언가를 오래 좋아하는 일 자체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에서
가부키는, 이 문제에서 혈통이라는 장치로 해방된다.
누구의 아들이 누구의 이름을 잇는가. 아버지가 연기하던 역할을 아들이 물려받는 순간,
관객은 단지 한 편의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에 이어지는 예술의 시간 축을 함께 목격하게 된다.
아버지의 존재가 드리운 무게, 아버지가 사라진 자리에서 자라나는 아들의 서사,
그 서글픈 계승이 작품 바깥에서 또 하나의 드라마가 되어 무대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가부키를 좋아하는 관객은 한 사람의 배우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문을 응원하게 된다. 이름이 계속해서 무대에 오르는 한,
그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계승에는 잔혹함이 함께 붙어 있다.
영화 속에서 키쿠오는 거의 절규하듯 내뱉는다.
“결국 모든 것은 피잖아?”
“지금 당장 내가 필요한 건 너의 피야.
너의 피를 한 컵 가득 따라서 벌컥벌컥 마시고 싶어.”
그는 슌스케의 피를 욕망한다. 이 대사는
가부키라는 세계의 비극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재능, 자격, 정당성, 심지어 사랑까지도 오직 피를 기준으로 평가되는 곳.
슌스케가 재능을 인정받고 역할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도
피 덕분이다. 하지만 그 피는 당뇨라는 가문의 내력병으로 저주가 되어 슌스케의 몸을 갉아먹고 결국 다리를 절단하며 무대에 설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이른 죽음을 맞게한다.
키쿠오가 그토록 원하던 피는 결국 한 인간을 파괴하는 저주가 되어 돌아온다.
혈통은 축복인 동시에 형벌이다. 그리고 그 형벌을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그들은, 누군가는 기꺼이, 누군가는 버티듯 그 피를 잇는다.
그렇지 않으면 무대에 설 자격조차 잃기 때문이다.〈국보〉는 바로 이 지점을 피해 가지 않는다.
전통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 전통을 떠받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개인의 몸과 삶이 갈려 나가는지를
조용하지만 잔혹하게 응시한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연기적인 부분 외에 가장 신경 쓴 것이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이 가진 표면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들 ― 질투, 분노, 열등감, 결핍, 집착
개인의 고통, 가문의 비극, 피로 인한 저주는 무대 위에서 하나의 미학으로 정제되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그걸 보고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그로테스크한 지점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배치된 이미지들도 인상적이다.
키쿠오의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던 순간 눈이 흩날리며 화면을 채운다. (킬빌 미술감독이 맡아서 그런지 진짜 킬빌의 장면이 떠올랐음)
그 장면은 비극이면서 동시에 이상할 만큼 아름답다.
죽음과 상실이, 흰 눈이라는 이미지와 겹쳐지며
그의 삶을 규정하는 첫 번째 잔상으로 남는다.
이후에도 키쿠오가 위를 올려다볼 때마다 조명이나 잔광, 꽃잎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늘 시야에 남는다.
그것은 실제 자연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인공적인, 무대 위 연출처럼 느껴지는 잔상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국보가 된 그는 백로아가씨를 연기하며 가짜 벚꽃이 흩날리는 무대 위에서야
처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진짜 아름답구나.”
자연의 벚꽃을 볼 때는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했던 인물이, 무대 위 조작된 벚꽃 앞에서
비로소 진심을 내뱉는다.
이 역설이 〈국보〉가 던진 핵심 중 하나라고 느꼈다.
자연은 스스로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다고 이름 붙이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다.
인간의 기억, 욕망, 상처, 갈망이 특정한 장면과 결합할 때,
그제야 무엇인가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키쿠오가 마지막에 아름답다고 말한 벚꽃은 벚꽃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잃어버린 모든 것
그가 희생한 모든 것
그리고 그가 평생 갈망해 온 감정이
집약된 하나의 이미지다. 아름다운 것은 현실의 벚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응축된 상징으로서의
아버지를 잃던 날의 눈
늘 따라다니던 조명의 잔광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는 벚꽃
그 잔상이, 결국 벚꽃이라는 형태로 완성된다.
그래서 키쿠오에게 진짜는 자연이 아니라 인공이었다.
모방된 것이 아니라 의미가 부여된 아름다움이었다.
예술은 결핍을 아름다움으로 바꾸는 기술이다.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랑을 예술로 만든다.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무대 위에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