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집 : 갈월동9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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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의 소설 『혼모노』에 수록된 「구의 집 :갈월동98번지」은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 김수근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기록인 ‘남영동 대공분실(현 민주인권기념관)’의 설계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 작품은 한 예술가의 도덕적 결함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을 치밀하게 ‘분할’함으로써 그 이면에 숨겨진 윤리적 단층을 드러낸다. 나는 이 작품이 실존 인물 김수근을 ‘여재화’와 ‘구보승’*이라는 두 인물로 나누어 배치했다고 해석한다.
여재화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국 건축 1세대를 대표하는 거장’으로서의 김수근, 즉 대외적인 페르소나를 대변한다. 그는 시대를 풍미한 설계자이자 국가의 굵직한 프로젝트를 도맡으며 한국 건축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반면, 구보승은 그 찬란한 명성 이면에 도사린 또 다른 얼굴이다. 그는 ‘취조’라는 목적 아래 인간의 심리를 가장 효율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한 공학적 설계를 수행하는 무감각한 설계자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도식적인 구보승의 설계 태도는 자신이 수행한 설계를 끝까지 ‘인간을 위한 것’이라 규정한다. 이는 단순한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목적 중심적 사고의 극단이다.
소설 속에서 구보승이 여재화의 원래 계단 설계를 나선형으로 바꾸고 너비를 반으로 줄인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재화가 규정을 어기고 사고의 위험이 큰 설계를 한 이유를 묻자, 구보승은
"선생님의 설계에서는…… 공포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라고 답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지독한 모순은 구보승 역시 자신의 행위를 ‘건축가로서의 최선’이라 믿는다는 점이다.
소설 속 창문 설계에 대한 대화에서 구보승은
-선생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인간에게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여재화는 흠칫했다. 이제껏 구보승이 밀어붙였던 합리와 대척점에 놓은 사고였다. 드디어 인간을 고려하다니 독학하는 과정에서 건축의 기조를 깨달은 게 아닐까. 어렴풋이 유추하며 여재화는 안도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인간이 생활하는 공간에 창이 없어선 안 되지.
-네. 제가 선생님의 뜻을 미쳐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빛이 인간에게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과 무력감을 안길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창이 필요 했던 건데...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으니까요.
빛이 공간의 형태를 드러내 조사자에게 두려움을 심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 무력감을 안길 거라고.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거죠?
-선생님이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이라고요. 저는 그 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철저히 인간을 위해 이 공간을 설계했습니다.
그에게 창문과 빛은 인간을 배려하기 위한 요소가 아니라, 피조사자의 무력감을 극대화하고 심리를 파괴하기 위해 계산된 철저한 기능적 장치일 뿐이다. 좁고 가파른 나선형 계단, 안팎을 가늠할 수 없는 좁은 창문, 비명 소리를 잡아먹는 흡음재와 차가운 타일.
이 모든 요소는 인간을 배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공포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완벽하게 파악하여 그 심리를 파괴하기 위해 계산되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건축가가 가진 섬뜩한 ‘기능적 맹목성’을 목격하게 된다. 인간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가 그 지식을 인간을 파괴하는 기술로 적용하면서도 그것을 ‘전문가다운 최선’이라 믿는 차가운 광기야말로 구보승이라는 인물이 가진 가장 무서운 이면이다.
소설 속 선배 Y의 존재는 이 개인의 비극을 시대적 맥락으로 확장한다. 김수근의 선배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중업을 연상시키는 Y는 독재 치하의 부조리에 저항하다 결국 국외로 추방당한다. 역설적이게도 Y의 부재는 남은 이들에게 기회가 되었다. 한국 건축의 또 다른 축이었던 김중업이 사라진 빈자리를 독재 권력과 밀착한 김수근이 독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물 배치는 개인의 선택을 넘어, 권력과 결탁한 예술가가 도달할 수 있는 윤리적 파멸을 보여준다.
결국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한 건축가를 두 명의 인물로 나누어야만 간신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그 간극이 크다면, 그것은 개인의 도덕적 결함인가 아니면 그를 그렇게 나누어 살게 만든 시대의 구조인가.
'인간을 위한 공간'을 고민했다는 거장의 수식어 뒤에,
인간을 파괴하기 위한 공간을 치밀하게 계산했던 설계자가 공존했다는 사실.
이 지독한 모순과 맹목적인 기능주의야말로 소설이 여재화와 구보승을 분리해낼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