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마음의 파수꾼>을 읽었다.
사강의 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이제 읽을 수 있는 소설이 몇 편 남지 않아 아껴읽고 있는 중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은 언제나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통념의 틀 안에 놓인 단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올바름을 벗어난, 오직 ‘나’라는 존재의 감정에 충실한 사랑이다.
이기적이고 모순적이며 때로는 파멸을 향해 기울어가는 그 감정들을 사강은
늘 투명한 문장으로 기록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녀의 작품을 자기 복제라 부르지만, 독자로서 나는 그 반복 속에서 오히려 사강의 일관된 시선을 본다.
생의 아이러니를 외면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을 가장 생생하게 비추는 방식.
<마음의 파수꾼>은 그 연속선 위에 놓여 있으면서도 다르다.
이번에는 사랑에 살인이 더해진다.
고결하고 아름다운 청년이 등장해, 사랑하는 이를 위해 타인을 서슴없이 죽이며, 또 앞으로도 죽일 것이라 말한다. 주인공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말하며,
그의 행위를 끔찍이 여기면서도 그를 자신의 곁에 두기로 한다.
두려움과 매혹이 공존하는 이 관계는 범죄와 사랑,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흔든다.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었다.
[마음의 파수꾼]의 장면들은
특히 <아가씨>와 <헤어질 결심>그 영화들의 장면처럼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들이 영화적 이미지로 떠오르며,
하나의 서늘하고도 아름다운 영상으로 재구성되는 경험.
사강의 문장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렇게 내 상상 속에서 이미 영사되고 있었다.
그 여운 속에서 나는 자연스레 다시 <헤어질 결심>을 찾았다.
극본집을 읽고, 영화를 또 보고…
헤어질 결심 마니아를 자처하는 나는 이제 몇 번을 봤는지 셀 수 없을 정도다.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벽에 내 사진을 붙여 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끝내 미결 사건으로 남기를 바라며 스스로 바닷속으로 사라져 간 서래.
사랑 때문에 사라질 결심을 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그 결심의 무게를 떠올리면 늘 마음이 미어지고 만다.
사강의 청년은 사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고, 서래는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지웠다.
사랑을 위해 죽이고, 또 사랑을 위해 사라지는 사람들.
두 작품을 나란히 두고 바라보다 보니
검정치마의 노래 〈나랑 아니면〉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아무렇지 않게 넌 내게 말했지 날 위해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사랑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표현은 익숙했지만,
‘죽일 수도 있다’는 고백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랑 때문에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그 벼랑 끝의 심리라니.
사강의 소설, 박찬욱의 영화, 그리고 한 곡의 노래.
며칠 동안 나는 그 세 가지가 겹쳐 만들어낸 심연 같은 사랑을 생각한다.
그들의 사랑은 플라토닉이었다고 생각된다.
육체의 거리는 끝내 닿지 않았으나, 마음의 거리는 오히려 위험할 만큼 밀착되어 있었다.
서로의 숨결조차 닿지 않는데, 그 밀착은 차라리 소름 끼치는 집착처럼 느껴졌다.
사랑은 때로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힘이 되고, 스스로를 혹은 타인을 지워버리는 행위가 되며,
결국 생과 죽음의 경계를 흔든다.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은 섬뜩하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진실에 닿는 경험이기도 하다.
끝을 알 수 없는 구렁텅이 같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