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무슨 물건인가?-03
"저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데
잘 못 그립니다.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요?"
"그냥 그리면 돼."
"에이, 그릴줄 모르는데
어떻게 그냥 그리라는
말씀이세요?"
"바로 모를 때가
잘 그릴 수 있는 때이기에,
그냥 그리면 돼."
"네?! 모를 때가
잘 그릴 수 있는
때라고요?"
"그래.
모를 때야말로
순수한 그림이 나올 수
있는 순간이고,
그렇게 나온 그림이 바로
잘 그린 거라는 거지."
"배우지도 않고
그냥 그리는 게 순수하고
잘 그린 거라고요?"
"그렇고 말고.
너 잘 그리고 싶다고 했지?
그런데 네가
잘 그린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음... 제가
잘 그리고 싶다는 건,
사실적으로 잘 그리고
싶다는 뜻입니다."
"응. 그렇다면
형상은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었지만,
깊이가 없고 가볍다면, 그래도
잘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네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잘 그리는 걸까요?”
"당연히 자신을
솔직하게 잘 드러내는 것이
잘 그리는 거지.
그림도 사람과 같아.
외모는 세련됐지만 경박한
사람보다는,
좀 투박하게
생겼더라도 순수한 사람이
좋은 사람인 것처럼,
그림도 순수한 그림이
좋은 그림이야.
어떤 식으로 그리든,
세련되었지만 순수치 않은
그림보다는
다소
거칠더라도 순수하게
표현된 것이
잘 그린 거라는 거지.
그림의 표현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순수'는
다를 수가 없어.
순수야말로
'예술의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그럼 어떻게 해야
순수하게 그릴 수
있을까요?”
“모르는 것을
지켜야 해.”
“모르는 것을
지키다뇨?”
“예를 들어
정물이나 풍경, 인물 등,
사실적인 그림이나
혹은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고자 할 때,
주제와 재료, 그리고
콘셉트는 정하더라도
그릴 때는 모르는 채로,
그리는 거야.
그렇게 할 때,
그림도 순수해지고 정체성이
드러나게 되지.”
"아니...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지,
어떻게 모르는 채로
그릴 수 있다는 말이죠?”
“너는 여전히
'배워서 알고 그려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나
경제문제든,
어떤 일이든 간에,
그 일이 정확히 어떻게
전개될지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음... 없을 거 같네요.”
“맞아.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예측은 가능하지만,
실제와는 달라.
미래의 일들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거야.
우리 삶을
비추어봐도 어떻게 될지
정확히 알고
행동하는 일은 결코
없어.
모든 일이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
만약에
알고서 한다면,
그건 꾸미는 것이지,
살아있는 것이 아니야."
“음... 그렇다면
우리는 알고 행한다
하지만
결국 알 수 없는 것을
행하는지 모르고 있었던
거네요."
“그렇지.
우리가 아는 건
하나도 없어.
자기 자신을 돌아봐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뭐 하나 있던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안다고 착각하고,
자기 말이
맞다고 주장하기에
이처럼 세상이
시끄러운 거야.
예전에 어르신들이
'세상사 한 치 앞도 모른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알 수 없음'을 얼른
알아차리고
필요에 따라
분별하며 살아간다면,
그 얼마나 삶이 단순하고
소박하겠어?
그렇게 살 때,
자기 다운 순수한 삶이
되는 길일 거야."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모르는 채로 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아 보이는데요?"
"응. 처음엔 그렇겠지.
우리들은 어떤 일이든
모르고 행하지만
이미 마음에는
알 수 없기에 이게 뭐지? 하는
의문이 늘 있어.
그게 우리들을 이끌어
가는 거야.
그림을 배운다는 것도
실은 순수를 표현하는 길을
찾는 거나 다를 바 없어.
그래서 사실적 표현만
배우는 게 아니라 지금 같은
이런 걸 배우는 거지"
"음... 그럼 모른다고
해서 답답해할게 아니라,
오히려
이게 뭐지? 하는 마음으로
그려 나가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지. 우리가 '안다'라고
믿는 것은
사실 '모른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것이거나,
모르는 것을
믿고 행하지 못하는
두려운 마음에서
비롯된 거지,
그렇기에
모르는 줄 모르는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모르는 줄 아는 사람은
속일 수 없는 거야."
“??? 그럼
그림도 배워서 아는 것으로
그리면 안 되겠네요?”
“아니.
안 된다는 것이 아니야.
배우든 배우지 않든,
다 필요한 것이니
배울 것은 배우되
실제로
그릴 때는 '모르지만 궁금한 채'
그려야 한다는 거야.
예전엔
사물과 비슷하게 그리는 게
미의 기준이었지만,
지금은 잭슨 폴락의
액션 페인팅 같은 추상화도
위대한 작품으로
인정받은 지 이미 오래 지난
시대이니
꼭 사실적인 방법을
익혀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사실적으로 그리든
추상적으로 그리든
다만 '알 수 없음'을
지켜가며 그릴 때,
생동하는
감성과 함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니
그게 바로
좋은 그림이 되는
지름길이라는 거지.
일상생활 속에서도
'알 수 없음'을 지켜 나갈
수만 있다면,
결국에는
담백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