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0 기억의 끝을 잡고 일지를 쓴다
움켜쥔 모래 같은 하루가 스르르륵 흘러내린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십 년이 책장 넘기듯 휘리릭 가버린다. 더디게만 흐르던 어린 시간들을 지금 나누어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퍽 분주하게 보냈는데 돌이켜보면 무엇을 했는지 가물거린다. 그런 날들이 점점 많아졌고 더 많아질 것이다. 허무를 논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사라진 기억이 있다. 사라지는 기억을 부여잡기 위해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주번이 되어 썼던 일지를 생각한다. 전달 사항, 시간표, 출결 상황, 청소 상태처럼 학급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적는다. 마음을 덧입힐 필요 없이, 있었던 일만 담백하게 적으면 된다. 일지가 주는 편안함이다. 마음을 적는 일기는 소중하다. 하지만 일기에 쓰려는 일들은 이미 그만큼 마음을 썼던 일들이다. 소모된 마음을 다시 떠올리며 적는 일도 쉽지만은 않다. 아니면, 매일 일어나는 일이라도 새롭게 느낄 마음이 있어야 한다. 역시 마음을 쓰는 일은 버겁다. 그래서 일지를 쓴다.
하루의 궤적을 따라 일지를 적는다. 눈을 뜬 이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순서대로 적는다. 방학 때마다 거창하게 그려놓았던 생활 계획표를 글로 옮겨 놓은 모양새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순차적으로 정리하는 데 편리하다. 때론 가물거리기도 하지만 빈틈없이 적으려 한다. 그래도 영 떠오르지 않을 때는 전날의 일지를 훔쳐본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이었고, 내일은 새로운 오늘의 시작이다. 비슷한 일이 반복돼도 단 하루도 같은 날은 없다. 적어도 날씨라도 다르고 배경으로 깔린 음악이라도 달랐다. 어떤 반복도 다른 상황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잊지 않고 일지를 쓰려한다.
일지를 쓰니 기억이 분명해진다. 스르르륵 흘러내리던 시간들이 조금은 더디 흘러내린다. 해야 할 일들과 시간이 또렷해졌다. 촘촘한 톱니바퀴가 돌듯 시간이 지난다. 작은 이물이라도 끼면 바퀴가 멈출 것 같다. 비가 왔다고 느닷없이 낮잠을 잘 수 없다. 예정 없이 걸려오는 전화가 반갑지만은 않다. 생활의 빈틈이 없다며 투덜대본다. 여유라고 부를 만한 자리가 없다며 한숨도 쉬어본다. 하지만 여유를 넣어야 할 곳에, 하고 싶지 않을 일을 하지 않을 자유, 하고 싶은 일만 할 자유가 넣었다. 자유롭기 위해 여유가 필요하다면 이미 꽉 찬 여유를 누리고 있다.
일기도 쓴다. 일지와는 다른 공책에 간략하게 쓴다. 이미 지나간 마음이라도 다시 되돌려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도 잊지 않고 적는다. 쓴다는 것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