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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꼬막 Jun 26. 2022

디자이너를 지치게 하는 말

특: 돈 주면 안 지침

#김꼬막툰_1화

< 디자이너를 지치게 하는 말 >










1. 혹시 간단하게 로고 하나만 부탁해도 돼? 내가 밥 살게!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당시엔 그저 내가 남들보다 포토샵을 조금 더 잘 다룰 줄 아는 미대생이다 보니, 가난한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밥 혹은 술이 나의 노동력과 교환할 수 있는 고급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로 만든 동아리 로고나 과제 제출용 등이라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저 '꼬막이 너 짱이다 역시'라는 칭찬뽕에 취해 졸업할 때까지 금전적인 보상 하나 없이 노동력을 제공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디자인 짬밥 10년 차가 훌쩍 넘은 지금도 밥 혹은 술을 대가로 조심스럽게 딜을 해오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심지어 상대방도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산전수전 다 겪은, 노동력을 제공받으려면 응당 쩐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는 직장인인데 말이다. 삼만 원어치의 밥 한 끼라면 가로 세로 300px, 72 dpi, 흑백, jpg 파일 정도인데 괜찮겠어..?







2. 캐리커처 간단하게 그려줄 수 있어요? 제가 밥 살게요!


이거 내가 장담컨대, 캐리커처는 미대생이 제일 많이 받는 부탁 TOP 3안에 든다고 아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일단 캐리커처를 부탁하는 사람들은 보통 연애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러니까 100일 정도를 기념하고 싶은데 크게 뭘 사기에는 부담스러우니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정성 가득한 무엇인가를 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연애 시작하고 100일을 넘기는 커플이 얼마나 많겠나. 그만큼 부탁도 정말 많이 받아 봤다구..


하지만 미대생 중에서도 손그림을 잘 그리는(어도비의 힘을 빌리지 않는), 그것도 인물의 특징을 잘 살려야 하는 캐리커처는 변태*들이나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도예 전공이라구 얘들아, 하루 종일 흙만 만진다구.. 단과대가 미술로 분류되어있다고 해서 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아니야..


예스걸이었던 내가 유일하게 거절했던 것이 이 캐리커처였다. 바쁘거나 금전적인 보상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정말 자신이 없어서, 인물을 잘 그릴 자신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얘가 그림 받고 실망하면 어떡하지?'에서 나오는 자신감의 부재였달까. 부탁받는 와중에도 내 작품 아웃풋 퀄리티 생각하는 꼴이라니 보통 호구가 아니었나 보다.


* 변태: 예술인들 사이에서는 칭찬의 의미로 통용된다. '와 이 ㅅㄲ 변태네'하는 소리 들으면 그날은 어깨가 하루 종일 올라가 있어도 되는 자부심의 단어이다. 나도 졸업전시 준비할 때 종종 들어봤는데 진짜 기분 째지더라.







3. 오빠가 사업 하나 시작했는데 ㅋ


"올만이네 ㅋ 잘 지냇어? 오빠가 사업 하나 시작했는데 홈페이지 하나만 만들어 줄 수 있겠어? 아 복잡한건 아니고 심플한거야. 부담 갖지 말고 ㅎㅎ 아 그리고 간판도 필요해 좀 큰걸루? ㅎ 100평짜리 매장이거덩 ㅎㅎㅎ 홍보할 때 필요한 팜플렛도 만들어야 하는데 ㅋ 후배 좋다는게 머냐 뽀샵 함 해주라 ㅋ 밥 사줄게 함 얼굴이나 보자구~~^^ㅋ"


"...?"


긴 말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하극상이라는 것을 직접 행해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못 해서 아쉽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살면서 총 세 번 있었는데 100%가 '다짜고짜 연락+온갖 것을 다 부탁+사업하는 오빠'의 조합이었다. 그리고 보기 좋게 세 분 모두 시안을 받아보고 잠수 타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겠다.







4. 나 사진 몇 장만 보정 부탁해도 돼?


돌이켜보면 사진 관련된 부탁은 그나마 정중했다. '말로만 밥과 술'이 아닌 기프티콘 같은 실물 보상이 따라온 경우가 굉장히 많았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부탁을 하기 전부터 가시화된 부탁 거리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로고 하나만, 캐리커처 하나만'은 너무나도 추상적인 '무'에 가깝지만, 못난 사진을 예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유'에서 '더 나은 유'로의 작업이기 때문에 부탁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맨입으로 넘어가기에는 양심이 찔리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경우에는 웨딩사진 보정본인데 몇 장만 더 내 맘에 들게 고치고 싶다든가, 만삭 사진인데 얇은 원피스 위로 드러나는 배꼽 자국을 지우고 싶다든가 하는 정도였다. 포토샵이나 라이트룸 조금 만지면 간단하게 되는 일인데, 본인이 어도비랑 친하지 않은 케이스가 많아 대부분 들어줬던 부탁들이다.







5. 이력서 증명사진 보정해 줄 수 있어요?


증명사진은 내가 유일하게 거절 않고 성의껏 해주는 카테고리다. 취업 잘 되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다 좋은 거니까. 거의 피부과 의사 수준으로 피부 보정은 많이 해줬고, 배경을 갈아 끼우거나 양복에 넥타이 합성을 해 준 적도 많다. 심지어 1, 2, 3안까지 시안을 제시해주기까지 한다. (파란 배경, 회색 배경, 흰색 배경 등등..)


내가 10년 전 호주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을 때가 당시 우리 또래 취준 기간이었는데 그때에도 원격으로 부탁을 많이 받았었다. 한국 돌아와서 30대가 된 지금까지도 제일 많이 받는 부탁 중 하나지만 그만큼 흔쾌하기도 하다. 아 생각해보니 저번 달에도 한 건 했다. 후후.. 다 좋은 게 좋은 거지..







6. 흐이잌!!!! 그렇게 비싸? 크몽에서는 만 원이던데..


크몽, 좋지. 음지에 숨어있던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만나서 돈을 벌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플랫폼이니까. 하지만 노동력을 제공하는 입장에서는 노출되어 있는 단가가 썩 달갑지만은 않다. 보통 반값, 심하면 1/10까지 다운되어있는 작업비용은 크몽에 등록하지 않은 다른 노동자들의 가치를 하향평준화시킨다는 큰 단점도 따라온다. 그리고 노동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가격을 기준으로 주위에 있는 예술 노동자들을 대한다.


사실 이건 그 누구의 멱살도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외주 경험이 없는 클라이언트가 제일 큰 플랫폼을 참고하여 견적을 제시했을 수도 있고, 낮은 단가 상관없이 박리다매로 포트폴리오를 쌓고 싶어 크몽에 등록한 초보 디자이너일 수도 있고, 사이드잡을 구축하고 싶은 엔잡러일수도 있으니까. 이런 경우는 커뮤니케이션에 친절함만 한 스푼 더하면 의외로 금방 해결된다.


작업 의뢰를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그 디자이너에게 단가를 먼저 물어보는 것이다. 허용 가능한 범위의 예산을 먼저 밝히면 가장 좋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클라이언트의 예산이 나의 단가와 맞지는 않더라도, 허용 가능한 예산(내가 받을 수 있는 돈)에 맞춰 작업 수량이나 범위 등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약서 특이사항에 '50% 할인'이라는 명목으로 생색 내기 삽가넝!)







7. 결론: 디자이너는 밥 안 좋아합니다. 돈 좋아합니다.


밥은 내 돈 주고 잘 사 먹을 수 있어요. 술도 비싼 걸로 많이 잘 사 먹고 있고요. 그러니까 이제는 부탁하려거든 돈을 주세요 돈을! (다짜고짜 화내기) 글 쓰다 보니까 과거의 호구 같았던 내가 떠올라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지만.. 이제라도 내 몫 찾아 밥벌이 잘하고 있으니 그거면 됐다.






© 김꼬막

인스타그램 @kim.kkom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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