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발을 녹여준 건, 산수유즙일까 사랑일까
날이 슬슬 추워지며 평생 안고 살았던 수족냉증이 찾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내 손발은 유난히 차가웠다. 한의원에 방문해 본 적은 없으나, 한의학으로 따져보았을 때 '소음인'의 체질에 가까운 것 같다. 몸 자체의 성질이 차가운 '소음인'답게 자주 체하고 소화에 어려움을 겪으며, 손발을 차갑고, 혈액순환이 안 될 때가 많아서 자주 붓곤 한다.
지금까지의 내 몸 상태에 비추어보았을 때 수족냉증은 죽는 날까지 잘 타이르고 어르며 데리고 가야 할 동반자 같은 존재가 될 것 같다. 손이 차가운 건 그나마 괜찮다. 후후 불기도 하고, 따뜻한 물에 손을 녹이기도 하면 지낼 만하다. 하지만 발이 시린 건 힘들 때가 많다. 집에서도 항상 수면양말을 착용하고 있고, 집에는 발 히터, 건식 족욕기, 습식 족욕기가 상시 대기 중이다. 출근하고 나서도 슬리퍼로 갈아 신고 나서 가방에서 수면양말을 주섬주섬 꺼내어 신고는 한다. 수면양말을 신어도 온 발을 감싸고 있는 한기는 피할 수 없는데, 발 깊은 곳에서부터 냉기가 뿜어져 나와 수면양말로 발을 감싸는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한 느낌이다.
살면서 수족냉증이 없었을 때가 딱 몇 년 있었는데, 초등학교 중학년~고학년 때 즈음이었다. 엄마는 항상 내 손을 잡고 학교나 학원 같은 곳에 바래다주시곤 했다. 엄마는 평생 운전을 하지 않으셨기에 직접 걸어서 학교까지, 학원까지 데려다주시곤 하셨고, 그때마다 손을 꼭 잡아주시는 건 당신만의 사랑의 표현이셨다. 엄마는 내 손을 잡을 때마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갑냐며 걱정하셨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산수유즙'이 박스째로 있었다. 산수유즙은 부모님을 위한 것도, 동생을 위한 것도 아닌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어디서 수족냉증에 산수유즙이 좋다고 들으셨는지 엄마는 산수유즙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먹여주셨다. 초등학생은 음식의 효능이나 영양가보다는 맛이 더 중요한 시기인 만큼 엄마의 산수유즙을 나는 거부하곤 했다. 달짝지근한 맛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혀를 감싸는 떫은맛과 신맛을 혀에서 밀쳐 내고 싶었다. 엄마가 산수유즙을 컵에 담은 채 방문을 열고 들어오시면, 온갖 인상을 쓰며 안 먹겠다고 실랑이했던 기억이 선하다.
자극은 반복될수록 무뎌지기 마련이고, 결국 내 혀는 산수유즙의 떫고 신 맛에 익숙해졌다. 나중에는 산수유즙을 스스로 아침, 저녁마다 챙겨 먹었다. 그렇게 1년 넘게 산수유즙을 먹었을 때, 신기하게도 손 발에 점차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엄마도 손을 잡으실 때마다 '산수유즙을 먹였더니 이제 손이 따뜻하다'며 기뻐하셨고, 뿌듯해하셨다. 안타까운 사실이라면 산수유즙을 끊고 나서 시간이 지나자 다시 손발은 차가워졌다는 것이다. 체질 자체가 바뀌는 건 쉽지 않은 모양이다.
출근해서 차가운 발을 달래며 수면양말을 갈아 신던 찰나, 엄마가 매일 먹여준 산수유즙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매일 무언가를 챙겨준다는 건 어지간한 사랑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나와 다툰 날에도, 나를 혼낸 날에도 산수유즙을 챙겨주던 그 집요하고 농도 높은 사랑의 깊이는 아직도 헤아릴 수 없다. 내 손과 발을 녹여준 건 산수유즙이었을까, 엄마의 사랑이자 노력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