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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줄리에타’: 모녀

엄마라는 그 할말하않 인연에 대하여

by 미미

몇 년 전에 ‘줄리에타’라는 영화를 보았다. 환상적인 요소가 결합된 영상미(기차 밖으로 사슴이 뛰어가는 장면), 주인공들의 명연기, 특히 여주의 젊은 시절을 그릴 때 우수에 찬 눈빛, 그 푸릇푸릇한 젊음, 이 명 감독이 포착한 한 여성의, 한 엄마의 그리고 한 딸의 세밀한 마음 밭의 움직임들. 이 모든 것이 결합되어 명작이 탄생하였다.


우리나라는 엄마라는 데 대한 일종의 ‘환상’, 모성신화가 견고한 곳이다. 엄마란 자고로 희생적인 존재, 사랑이 넘치는 존재, 모성애로 똘똘 뭉친 존재 등등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가 강하다. 그리고 그 틀에 벗어나는 엄마들은 지탄받는다.


이 곳에 등장하는 엄마는 그러한 윤리적인 엄마상에서 벗어난다. 더 현실과 닮아있는 나약한 엄마의 모습이다. 젊어서 어부인 한 남자를 만나 열렬히 사랑했고, 아이도 낳고 살고 있지만, 그의 과거 불륜 문제로 다투고 그가 바다로 나가서 실종되어버리자, 그녀의 인생이 황폐해져 버렸다. 그리고 그 황폐해진 인생, 우울한 인생을 온전히 딸에게 의존하였다.


아빠 실종 당시 청소년기로 그려지는 딸은 엄마가 우울증으로 스스로 씻지조차 못하자, 친구와 함께 소파에 망연자실해 누워있는 엄마를 씻기는 일마저 도맡아한다. 여기서 엄마와 딸은 역할이 온전히 뒤바뀌어버렸다. 딸은 그렇게 엄마의 정서적인 엄마가 되어 아이인 그녀가 어른인 엄마를 보살핀다. 그리고 딸은 장성하자 집을 나간 이후로 12년간 종적을 감춰버린다. 딸은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을 잠식해버린 엄마의 부속물로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의 숨통을 죄어오는 그 인생은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엄마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딸은 자신의 인생을 살러 과감히 집을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엄마가 없는 곳에서 새로운 자기만의 삶을 일궈나간다.


영화는 엄마가 딸의 어릴 적 친구를 우연히 만나면서 이야기 전개가 된다. 딸의 묘연한 행방에 대해서 실마리라도 얻으려는듯한 절박한 엄마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딸에게 온전히 의탁했으나 결국 딸에게 너무 버거운 짐을 지워버린 그 망연자실한 엄마의 모습에서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엄마라는 혹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짐을 딸에게 떠 안겨주는가? 자기와 같은 여자인 딸이 얼마나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는가? 채워지지 않은 결혼생활의 얼만큼을 자식이 채워주기를 바라는가? 얼마나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의지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떠안아 주기를 바라는가? 신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얼마나 많이 자식에게 바라는가? 온전히 나를 아이처럼 보살펴달라고, 나를 사랑해달라고 얼마나 많은 부모 자식의 역할이 뒤바뀌어 있는가?


영화의 끝에 딸은 엄마에게 편지를 보낸다. 엄마는 그동안 딸이 돌아올까 봐 집을 떠나지 못하였다. 엄마가 딸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으로 영화가 끝맺으며 모녀가 비로소 적절한 경계선을 형성하고 둘의 삶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이 공존함을 시사하고 끝을 맺는다.


모녀 각자의 인간적인 성숙의 과정, 그리고 모성신화를 걷어내고 이 지극히 현실적인 모녀관계를 그려준 알모도바르 감독은 가히 천재적이다. 남자로서 여성의 심리를, 엄마와 딸의 심리를 이렇게 세밀하게 꿰뚫어 본 감독에 찬사를 보낸다.


이제 마흔의 길목에서 엄마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한 이 나이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완전히 희생적인 엄마가 되지는 못해도 적어도 내 십자가를 딸에게 지우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해서 더 나은 인간으로 살아가겠다고 재차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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