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어느 지루한 여름날 오후, 동네 친구와 나는 우리 집 장독대 된장독 앞에 핀 봉숭아꽃을 땄습니다. 오이지 독에 오이지를 꾹 눌러놓을 만한 넓적한 자갈돌 위에 백반과 봉숭아를 조심스레 찧어 섞어두고, 다락에서 엄마 반짇고리를 꺼내 흰색의 광목 헝겊 자투리를 자르고 홑청을 꿰맬 때 쓰는 굵은 실을 넉넉히 잘랐습니다.
넘어가는 석양을 벗 삼아 툇마루에 앉아 서로의 열 손가락에 촉촉하게 다져진 봉숭아를 올리고 헝겊으로 잘 쌓아 실로 꽁꽁 묶어주었습니다. 백반을 많이 넣었는지 손톱 밑이 욱신거립니다. 얌전히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잠을 청합니다. 얼마나 잤을까, 사방이 조용한데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 보니 서너 개는 요 위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얼른 집어서 끼어보았으나 바짝 마른 헝겊은 더 이상 힘이 없습니다.
방문을 열고 댓돌을 내려선 나는 하얀 유령에 이끌리듯 대문께로 갔습니다. 그때 나무 대문 틈새로 강한 조명이 비추듯 일직선의 달빛이 마주 보이는 친구 집 대문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뼈에 저릴 듯한 직선이 꼭 닫혀 있는 흰색 대문과 그곳에 달려 있는 두 개의 둥근 검은색 문고리까지 쭉 뻗어 있었습니다. 나무 대문이니 필경 나무색일 텐데 그때만은 달빛을 받아 온통 흰색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봉숭아 어찌 되었느냐고 묻지 않았고, 언제 우리가 봉숭아를 들였나 싶게 지냈습니다. 얼마 안 가 우리는 그 동네를 떠났습니다. 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풍문으로 친구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불행한 결혼생활 때문에 정신적으로 이상이 생겨 어디 산속에서 요양 중이라고….
지금 살아 있다면 육십여 전 봉숭아 이야기를 기억할까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직선의 시리도록 하얀 달빛은 내 평생 보름달, 달빛 하면 악착같이 나타나는 영상입니다. 무엇을 예고하는 것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