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며 이겨내며, 인생

# 27

by 김경옥

머리맡에 책이 수북이 쌓였습니다. 책상 위에도 넘쳐납니다. A4 용지 한 장 놓고 글을 쓸 수 없을 정도입니다. 거실에도 여기저기. 물론 식탁 위에도 서재는 서재대로 쌓이고 쌓입니다. 모른 척 못 본 척 지나가도 나만 쳐다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교통대란이 일어난 것같이 짜증이 나고 조바심에 진땀이 납니다.

골치가 아파오면 좀 더 쉬운 인생의 책을 집어 듭니다. 내가 책에서까지 가슴앓이를 할 게 뭐람? 하고 다른 책을 집어 듭니다. 이런 식으로 며칠 가다 보면 그 책 속의 사람들로 머릿속은 복잡해집니다. 책을 읽다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그가 울면 나도 울고 그가 웃으면 나도 기뻐집니다. 그가 분노하면 벌떡 일어나 냉수 한 컵 마시며 창문 활짝 열고 달빛 별빛도 보일 리가 없는 답답한 아파트 한 구석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가 설레며 여인을 만나면 옷맵시 고쳐가며 두근두근 자세히 읽느라 목이 책 속으로 빠집니다. 그들의 삶을 나도 살아보고 느껴봐야 하기에 빨리빨리 끝낼 수가 없습니다.


지구 상의 수십 억 사람들, 각기 얼굴이 다르듯 그들의 삶이 다릅니다. 여행을 해보면 더욱 각양각색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버스 정류장, 길거리, 지하철, 그 많은 곳에서 넘쳐나는 얼굴들이 모두 다릅니다. 가끔 마주하는 얼굴들에 나의 조각도를 들이대며 깎고 붙이고 그러자니 같은 얼굴들이 되어버립니다. 광대뼈가 나왔으면 그것이 그의 얼굴이고, 코가 납작하면 그 얼굴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의 얼굴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얼굴이 그의 삶이고 인생입니다.


여행 다녀오신 노인 분들께 “좋은 구경 많이 하셨어요?” 하면 “뭐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하시면서 “사람 구경이지” 하십니다. 내 얼굴이 하나이듯이 내 삶 또한 하나입니다. 한 번인 삶은 여행입니다.



1940년을 배경으로 한 중국 영화 <인생>에서는 부러울 것 없는 대지주의 아들 부귀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가 밑바닥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그림자극 도구를 얻어 생계를 이어가는 부귀는 그림자극을 좋아하는 동네 할머니, 아이들을 보면서 모처럼 생의 의미를 느낍니다. 혁명으로 내전이 일어나지만 생존의 방편으로 그림자극을 계속하다가 내전이 끝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들은 교통사고로 죽고 딸은 아이를 낳다가 죽습니다. 부귀가 행복할 때는 오직 그림자극 속에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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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안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에서 목청 높은 젊은 여인이 “할머니, 인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묻습니다. 귀가 잘 안 들리는지 몇 번째 가서야 “응, 만나고 헤어지는 거야” 별것 아닌 것 자꾸 묻는다 생각했는지 시원하게 하하 웃으며 말씀하십니다. 답답하던 내 마음이 뻥 뚫리는 명쾌한 답이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이 지구 상의 모든 삼라만상과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아니 꿈속에서도 우리는 사람들, 사물들과 만납니다. 무수한 것들과의 만남에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외로워하고 힘들어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이 모든 것들과 헤어집니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 5막에서 리어왕이 죽을 때 ‘그는 죽었다’라고 간단하게 썼습니다. 문장을 근사하게 포장하지도 않았고 거창하게 표현하지도 않았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반대로 죽기 전에 살아온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외할머니는 내게 ‘운명이라는 것이 오길래 독 속에 숨었지만 소용없었다. 피할 수 없는 것, 운명과 같이 조용히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셨습니다. 달콤하든 쓰디쓰든 눈물이 나도록 매워도 다 함께 가야 합니다. 인생에 겨울이 오면 행복했던 날, 불행했던 날이 혼합되어 모두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 됩니다. 검은색과 흰색이 혼합된 회색이 대부분의 가방과 구두에 어울리듯이, 그만하면 잘 산 거지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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