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이곳에 온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가는군요. 전화는 두어 번 했어도 속에 가라앉은 이야기는 편지가 나은 것 같군요. 요 며칠 기침감기가 심해 집에서 앉았다 누웠다 생강차에 꿀물을 타서 먹곤 했습니다. 딸아이가 심심한데 옛날 영화나 보라면서 흑백 영화를 틀어주었습니다. 이왕 못 알아듣는 외국어일 바에야 화면 속의 그때 그 시절 앤티크 구경이나 하라는 겁니다. 딸도 내 취향을 아니까요. 제임스 스튜어트와 킴 노박이 나오는 영화였습니다. 킴 노박은 마술사입니다. 여자가 마술을 걸어 남자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남자는 마술에서 깨어나려고 몹시 애쓰고, 깨어난 후에는 내가 왜 그랬지? 내가 나를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그 얼떨떨한 표정이 참 좋았습니다. 1930년 뉴욕에 눈 내리는 장면, 거리의 불빛, 그들의 옷들, 목도리, 여인들의 장신구. 그때의 눈이나 지금의 눈은 같을 텐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시간과 환경 탓이겠죠. 눈송이들이 펑펑 쏟아지는 밤거리는 환상 속의 눈나라 같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험은 선택이라는데 여기에도 마술이 끼어들겠죠? 마술, 이름 그대로 ‘속인다’는 뜻입니다. 내가 나에게 마술을 걸어 현실을 도피하고픈 마음도 있고, 상대방의 마술에 내 생각을 맡길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평생,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마술에 걸려 잘못을 저지릅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하면서 나에게 마술을 겁니다. 우리에게 따뜻한 마음, 기쁜 마음, 즐거운 마음 다 지나서 꿈을, 희망을 주는 작품, 마술 같은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답은 어디에 있을까요?
푸른색의 작은 크리스마스트리가 수 놓인 빨강 식탁보를 하나 샀습니다. 모닝커피를 마실 때 써보세요. 기분이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나를 즐겁게 하며 살도록 노력합니다. 마술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깨어날 테니까요. 끝까지 노력입니다. 누군가의 삶을, 시간을, 마음을 건드렸다면 그것은 마술이 아닌 예술입니다. 위로를 주었고 힘을 주었고 깨달음을 주었고, 즐거움을 슬픔을 그래서 고통을 치유받았다면 예술입니다. 내 입맛이 그것으로 생기를 얻었다면 그 음식이 예술입니다.
여배우 킴 노박이 TV <흘러간 스타> 프로에 출연했다는데 몸이 뚱뚱해졌고 시골에서 농장을 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더군요. 그림이 좋더라고 딸이 말하던데 마술 아니겠죠? 마술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