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어린 시절 한옥들이 기역 자로 모여 있는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대문을 통과해 누운 기역 자를 따라가면 막다른 곳이 부엌입니다. 부엌의 뒷문을 열면 널따란 배추밭이 이어지는 곳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 너머에 큰 한길이 나오는데 지금의 이대 부속병원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동네 위쪽에는 낙산이라는 아주 낮은 산이 있었고, 그 위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여름 장마철이 오면 물이 그야말로 폭포같이 낙산의 산줄기를 타고 내려옵니다.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은 흙탕물에 씻겨 내려온 갖가지 물건 중에 흔치 않은 빨간색의 하이힐 한 짝이 있었습니다. 누굴까. 저 높은 빨간 구두를 신고 무엇을 할까. 꼬리를 무는 나의 탐문은 시작됩니다. 저녁이면 흙탕물과 사방에서 쓸려 내려온 신기한 물건들을 보러 동네 언니들, 친구들과 함께 한강까지 갑니다. 지금 같으면 폐품 수집소 같은 곳입니다. 한강물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다로 여겼습니다. 무지개. 왜 한강 쪽에서만 무지개가 떴을까요? 한강 너머로는 건너가 본 친구가 없었기에 아주 먼 이상한 나라로 생각됐던 시절입니다.
우리 집 대문을 삐걱하고 나오면 오른쪽으로 옆집 담이 있고 그 위에 아트 막 한 창문이 있습니다. 내가 발돋움하며 창문을 두드리면 문이 열립니다. 그 집의 마루인 거죠. “다 봤어요” 하며 빌려준 책 넘겨주면 아무 말 없이 다른 책을 내밉니다. “얼른 볼게요” 냉큼 받아가지고 와 늦은 밤까지 이불속에서 손전등을 따라가며 읽었습니다. 김내성의 탐정소설입니다. 흥미와 흥분의 도가니에서 난 탐정 유불란의 여자 유불란입니다. 조수입니다. 얼마 전 커다란 책방에 가서 김내성의 ≪마인≫을 샀습니다. 스탠드 당당히 켜놓고 밤새 읽었습니다. 그런데 동생과 같이 쓰던 그 방, 이불속에서 구박받으며 손전등 이리저리 비춰가며 범인을 찾아가던 그 시절이 눈물 나게 그립더군요.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든 길이 보입니다. 탐정소설 속 범죄자나 탐정은 어쩌면 그리 순수한지요. 범인은 ‘나 이렇게 했어’ 하면서 단서를 질질 흘리고 다니고, 탐정은 뻔한 것을 놓치며 이리저리 찾아다닙니다. 독자는 그 어리석음에 반해서 밤새워 읽습니다. 요즘의 추리소설은 끔찍하죠. 범죄의 낭만(?)이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스티븐 킹과 존 그리샴 초기 작품에서 추리소설은 끝이 났습니다. 아직도 붙잡고 있는 것은 셜록 홈스와 아가사 크리스티뿐입니다. 보고 또 봅니다. 나는 범인 너희는 탐정, 얼굴만 기둥 뒤에서 가리고 섰지 엉덩이는 ‘나요’ 하는 어린이 탐정소설 하나 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