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장롱

# 41

by 김경옥

덥지도 춥지도 않고 바람마저 따뜻하군요. 자전거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는데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서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참으로 평화스러운 노래입니다. 약간은 마음이 나른해지는 기분입니다. 밤을 주행하는 비행기는 이와는 정반대죠? 특히 멀어져 가며 꼬리 쪽으로 빨간 불빛이 깜빡일 때는 그리움이 확- 몰려듭니다. 동시에 기다림의 기대가 부풀어 오릅니다.


일찌감치 도착한 생일 축하카드, 기쁨으로 받았는데 답장은 이리 게으름을 피우는군요. 감사했습니다. 한 번도 잊지 않고 보내온 축하카드와 틈틈이 보내주시는 편지로 내 조그만 화각장은 가득 찹니다. 화각장 서랍만 보아도 당신을 보는 듯하군요.


빨간색의 화각장은 코끼리 상아를 얇게 저며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봄꽃이 아름답게 피어 치마저고리, 장옷을 덮어쓴 여인들이 꽃놀이를 합니다. 둥근 보름달 아래 열심히 책 읽는 선비가 있는가 하면 소곤거리는 떠꺼머리총각, 몽당치마에 길게 머리를 땋아 내린 처녀도 보입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다소곳이 지아비 뒤를 따라가는 장옥 속의 지어미 자태가 아름답군요. 한쪽에는 점잖은 선비가 여인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봄꽃만 보는 장면도 있습니다. 풍속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타임머신을 타고 그곳으로 가 내가 주인공이 되곤 한답니다. 이곳에 당신의 이야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봄꽃 향기가 가득합니다. 화각장 안에 당신은 그림만큼이나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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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기를 쓰는 것은 이제 보니 당신과 소통하고 싶어서인 것 같습니다. 지난번 편지도 두려움, 염려, 짜증, 우울함의 골짜기에서 허우적거리는 내 말만, 내 주장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기차역의 커다랗고 둥근 시계는 유난히 느리게 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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