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11월

# 44

by 김경옥

정확히 올해도 내 앞에 와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정해놓은 나의 달 11월. 달력에 기본적으로 빨갛게 표시되는 일요일만 빼고는 다 까만 숫자입니다. 12개월 중 빨간 숫자가 없는 달이 또 하나 있습니다. 초복과 중복이 걸쳐진 7월. 더위를 피하기 위해 휴가를 떠나는 달입니다. 직장인들 탁상용 달력이며 집집마다 걸어놓은 벽걸이 달력에 빨간 숫자가 몇 개씩 있는 달보다 더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11월은 깨끗합니다. 혼자 작업하는 나에게 11월은 텅 빈, 비어 있는 달입니다. 한 해를 보내는 모든 책임을 지고 새해를 맞이하는 12월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의 아쉬움을 품고 새로운 해를 기다리는 두근거림과 두려움은 12월의 몫입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11월은 주부들이 1년 중 가장 바쁜 달이었습니다. 연탄이 나오기 전에는 겨울에 땔 장작을 준비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기역자로 된 골목의 막다른 곳이었는데, 좁다란 길에 우마차가 들어올 수 없어서 온 식구는 물론이고 동네 친구들, 남동생들의 꼬맹이 친구들까지 동원해 활짝 열린 나무 대문 안으로 끙끙대며 장작을 날랐습니다. 1960년대에 내 살림을 시작했을 때는 “김장하셨어요?”가 새댁들의 인사였습니다. 자그마한 광 속에 11월 중순이면 연탄을 벽처럼 쌓았습니다. 그리고 동네 가깝게 지내는 이웃들이 빨간 고무장갑을 들고 와 김장을 합니다. 마당 수돗가에 쌓인 백여 개의 배추들, 무, 채소를 씻고 김치, 깍두기를 벌겋게 버무리고 배추와 고기를 푸짐하게 넣은 뜨거운 국에 밥을 말아먹으며 잔뜩 얼어붙은 손발을 녹이면서 웃고 또 웃었습니다. 부자가 된 든든한 마음으로 김칫소 무친 것을 한 그릇씩 갖고 다니면서 다음 날엔 누구누구네 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이렇게 동넷집과 품앗이를 하는 동안 11월은 뜨거운 물에 눈 녹듯이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도시의 11월은 이웃들의 맛이 담긴 ‘김장’이 숨어버렸고, 검은 연탄의 따끈따끈함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바꿔놓은 11월의 여유로움은 나를 즐겁게 합니다.

어느 날 아침마다 마셨던 커피잔을 흰색 바탕에 옛날 유럽의 성각이 그려진 것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이 프린팅 된 쟁반에 빵 한 조각, 치즈 두 개를 올리고 작은 풀잎 이파리가 수 놓인 하얀색의 냅킨, 작은 수첩, 빨간 볼펜도 올려놓았습니다. 두리번거리다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빨간 사과를 내 옆 의자에 놓고, 아침 식탁의 친구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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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의 소설 ≪대지≫에서 남편 왕룽을 따라 밭이랑을 걷던 오란은 남편이 살구나무에서 따먹고 버린 살구 씨를 주워 두 손안에 꼭 쥡니다. 그리고 집 앞마당에 흙을 파고 씨를 조심히 넣고 손으로 꾹꾹 눌러놓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빛깔의 여정을 끝내고 오란이 떠나던 날, 왕룽은 앞마당에 활짝 핀 살구꽃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나는 친구가 된 사과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사과야, 이 이야기 넌 모르지? 넌 누구의 사랑을 받고 여기까지 왔니?”

땅을 사랑하는 농부들은 씨 한 톨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빵 위에 치즈를 조금씩 올려 먹으면서 TV에서 치즈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 것을 떠올렸습니다. 나에게 오기까지의 그 수고로움을 생각하며 볼펜을 들고 몇 자 적기도 하고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11월이 나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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