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작업실 입구는 조금 특이했다. 어림잡아 한 층 정도 아래를 가파르게 내려가는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으면, 그 끝에 나무나 철제로 된 출입문이 아니라 흑갈색으로 변한 두꺼운 비닐 커튼이 있다. 한겨울에 눈이라도 쌓이면 지지대에 묶은 등산용 로프를 두 손으로 잡고 썰매를 타듯 작업실로 내려가야 한단다. 문득 영화 <타잔>이 생각났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이 스릴은 해본 사람만이 안다”라고, 숨겨놓은 비밀을 알려주듯 자랑스럽게 말씀하신다.
시간의 때가 묻은 커튼을 젖히니 어디서도 보지 못한 형형색색의 벽! 마치 화려한 그림으로 뒤덮인 성벽처럼 보인다. 눈을 깜박거리며 주춤하는 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한겨울에 바람막이가 돼”라고 하신다. 흑염소처럼 까맣던 연탄, 그것에서 이리 근사한 색이 나올 줄은….
뒤엉킨 전깃줄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거미가 왔다가는 혼비백산하고 도망갈 것만 같다. 그 엉킨 줄 사이로 내려온 알전구들 하나하나에 비닐을 씌었는데,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먼지는 색깔도 형태도 ≪김약국의 딸들≫에나 나올, 누렁 종이에 약재를 싸서 천장에 주렁주렁 걸어놓은 한약방을 연상케 한다. 라디오는 설날이 되면 어린아이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복주머니 모양으로 꽁꽁 싸매놓으셨다. 라디오를 동여맨 비닐주름 사이로 무수한 세월이 앉아 있다. 검은색과 흰색 돌가루가 섞이면 회색이 된다. 그런데 이 색은 회색 이전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월의 색이다.
작업실 한편에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책상이 있다. 처음엔 아마도 청색? 녹색?이었을 책상이 군데군데 찌그러지고 홈이 파이고 떨어져 나갔다. 책상 뒷면을 보니 철제가 다 녹슬었다. 그 녹이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이상야릇한 색으로 변했다. 기가 막힌 추상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책상 맨 위 제법 큰 서랍은 찐빵처럼 둥글고 두툼한 자물쇠로 꽉 잠겨 있다. 어느 것보다 힘차다. 천둥번개에도 꿈적하지 않을 것 같은 자세다.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해서 “여긴 뭐가 들었어요?”라고 여쭈니,
“중요한 것이 들었어”라고만 대답하신다.
“뭔데요?” 하고 다시 여쭸다.
노 교수님의 표정이 참 진지해지신다.
“공구들이야!”
돌가루에 절어 색을 구분할 수 없는 신발로 바닥면을 가만가만 다독이시며 말씀하셨다.
‘아! 그것이었구나.’
평생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돌과 마주하셨다는, 작가님의 지문이 새겨진 분신들….
처음에는 평면이었던 작업실 바닥이 지금은 여기저기 돌가루들이 쌓여 울퉁불퉁하다. 오래전 바다가 밀려와 산이 강이 되었고, 거대한 빙하가 흘러 암석을 뚫어 바다에 문을 만들었다는 것을 TV에서 본적이 있다. 암석을 쪼고 거대한 빙하를 갈라낸 그 세월, 작가는 그렇게 작품을 만들었다. 세월의 보물들이 있는 작업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