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키예비치의 외투

#46

by 김경옥

겨울 날씨 답지 않게 따스하더니 드디어 동장군이 왔습니다. 폭포도 얼었고 분수도 얼었고 거리의 사람들이 얼굴만 내놓고 빨리빨리 걷습니다. 어찌 보면 활력도 있어 보입니다. 부지런해 보입니다. 외투가 생각나는 계절이죠.


작품을 할 때 작가들은 명제에 대해 많이 고민합니다. 영감이 떠올라 작업하고는 언어로 표현하기가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서로 이것이 좋을까 저것이 좋을까 의논도 합니다. 내 작품의 커다란 주제는 ‘평화’입니다. 그런데 명제 짓는데 15년이 걸린 작품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주제로 할 때 만든 오버코트에 목도리, 털모자까지 쓴 자그마한 작품입니다. 손에는 털장갑까지 끼었습니다. 다른 작품들은 어찌어찌 다 제 갈 길을 갔는데 그 작품 하나만 나와 동고동락합니다.


어느 날 고골리의 ≪외투≫라는 책을 만났습니다. 페테르스부르크의 극심한 추위와 그곳 관청에서 만년 구등 관급에 정지된 채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는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이야기입니다. 요즘같이 옷감이 나일론, 폴리에스테르였더라면 어깻죽지가 모기장같이 해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외투의 깃은 자르고 또 잘라서 어느 부분을 기웠기에 이름만 보이도록 좁아지고 외투의 기장은 껑충해졌습니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정직한 삶, 경직된 삶, 오직 자기 직무에만 충실한 삶, 동시에 지독한 허무감이 느껴집니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새로운 외투를 마련키 위해 원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늘 마시던 홍차도 끊고 밤에는 촛불을 끈 어둠 속에서 구두 밑창이 닳을까 봐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고, 하숙집에 오면 옷이 해어지지 않도록 모든 옷을 벗어버리고 오래된 무명 실내복으로 지냅니다. 이렇게 어렵고 고달프게 얻게 된 외투를 아침에 잠깐 비치는 빛같이 아주 찰나적으로 입어보고는 어처구니없게 강도들에게 빼앗깁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마음을 진정해가며 분노와 안타까움에 시달렸습니다. 더 불쌍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마음이 아픈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열병으로 죽습니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시신은 묘지로 운반되어 매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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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스부르크는 그 모양 그대로입니다. 마치 그런 사람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흔해빠진 파리까지 핀으로 꽂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생물학자의 주의조차 끌어보지 못한 존재, 관청에서 온갖 조소를 순순히 참아내고 이렇다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 무덤으로 간 존재는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외투 깃을 세우고 빌딩 숲을 걷는 사람을 보면 생각나는 소설입니다.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오리털 넣은 두툼한 외투 한 벌을 보내주고 싶습니다. 15년 만에 ‘아카키예비치의 외투’로 이름 지어진 작품입니다. 작품이란 질기고 끈질긴 것! 같군요. 제목 하나 짓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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