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창밖에는 눈이 내립니다. 작업하는 방에 빛의 명암 때문에 창문에 창호지를 발라 가려놓았더니 내리는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창문을 열면 베란다가 보입니다. 전자레인지, 세탁기, 부엌에서 밀려난 냄비, 프라이팬과 세탁기에 필요한 세제들이 널려 있는 곳, 그 너머가 하늘입니다. 사나운 바람 때문에 내리는 눈도 어디로 갈지 갈팡질팡합니다. 내가 만드는 작품들도 바람에 움직입니다. 내 몸은 점점 차가워져 두툼한 털양말을 찾아 신었습니다. 어깨에는 담요를 삼각형으로 접어 둘러썼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듣는 캐럴 빙그로스비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틀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 무섭도록 추웠던 조소과 실기실이 떠오릅니다. 흙통 속에 있는 흙은 얼어붙은 바위덩어리 같았고 높은 천장과 아귀가 맞지 않는 문짝 때문에 웃풍이 위풍당당한 교실은 추위가 가득했습니다. 자그마한 연탄난로 옆에 오롯이 서 있는 모델 좌대에는 누렁 군용 담요가 깔려 있고, 모델은 가운 하나 걸치고 피로와 추위에 오들오들 떱니다. 피부에 소름이 돋아 쉬는 시간이면 난로 주위로 우르르 몰려듭니다. 친구 하나가 “얘들아, 정신 나는 것 하나 보여줄게” 하더니 지갑을 열고 남자 사진에 입을 딱 맞추고 보여줍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진이었습니다. “난 앉으나 서나 이 남자다! 노래도 죽이고 기타 치며 흔들거리는 모습이 기가 막혀”라고 합니다.
딸들과 샌프란시스코 바다가 보이는 곳에 갔을 때 비가 쏟아지는데 안개가 하얀 연기같이 피어오르고 거리와 빌딩 앞은 크리스마스 장식품으로 화려합니다. 비련으로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은 분위기입니다.
“비 오는데 엄마 나가지 말고 이 CD나 들어요. 나 얼른 갔다 올게.”
틀어주고 간 CD에서 몇십 년 전 엘비스의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가볍게 흥얼거리는 그 첫 음에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음이 조금 빠른 편인데 어쩜 그리도 사람의 마음을 올려놓았다 내려놓았다 하는지요. 그야말로 난 비련의 주인공이 되었답니다.
얼마 전 딸에게 빼앗아온 블루 크리스마스 CD를 틀었습니다. 그 순간 기쁨 속에 슬픔인지 애잔함 속에 즐거움인지 분간하지 못하도록 아련해집니다. 예수님 탄생, 그 무엇과도 비교 못할 기쁨이죠. 그러나 십자가의 그 혹독한 아픔을 알기에 크리스마스 때가 다가오면 그 표현 못할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자주 가는 병원 한 벽면에 소박한 농부 부부가 기도를 드리는 화가 밀레의 ‘만종’과 같은 작품이 마주 보고 있는 가운데 시커먼 여물통에 누운 조그만 아기의 모습이 보입니다.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에 비하여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곳에 한 줄기 빛이 세 인물을 비추면서 주위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냅니다. 마리아와 요셉, 아기 예수 위에 떨어진 그 빛. 우리 인생과 세상이라는 벽에 소망이 넘치는 큰 그림자가 투영하고 있습니다. 오며가며 지나치는 길에 사람들이 가슴에 성호를 긋습니다. 예수님 탄생이 기쁘면서도 십자가라는 혹독한 아픔, 정말이지 기쁨과 슬픔이 양면의 동전같이 늘 따라다닙니다. 블루 크리스마스를 들으며 만든 작품의 명제는 ‘예수님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용서해주세요’입니다.
매해 11월 31일이면 크리스마스트리를 준비합니다. 크리스마스캐럴 따라 불러가며 12월 1일부터 새해 1월 10일까지 현관문 앞에는 때에 따라 양말, 작은 촛대, 솔방울 등을 걸어놓습니다. 사방이 화려한 트리로 장식된 테이블보, 썰매 타는 산타 할아버지가 그려진 커피잔, 눈사람 모양의 과자 그릇, 루돌프 사슴이 그려진 커다란 접시,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소품은 모두 꺼내놓고 부엌에서 쓰는 행주까지 산타 할아버지가 그려진 것으로 장식합니다. 내 열 손가락에도 빨간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목에도 트리 모양의 긴 목걸이를 겁니다. 안식월처럼 한 달 남짓한 시간을 혼자서 즐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