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

# 48

by 김경옥

바다의 우체부는 강물입니다. 봄에는 대지가 움트는 소리로, 여름에는 뙤약볕 아래에서 청청하게 우거지는 녹음들의 소리를, 가을에는 그 숱한 열매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떠나가는 가랑잎의 마음을, 겨울에는 힘겨웠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땅속으로 스며드는 자연의 힘을… 여기에 발맞추어 살아내려고 갖은 투쟁을 다하는 우리의 이야기들. 모든 발버둥과 아우성을 고스란히 바다에 전달합니다. 바다가 높게 낮게 거칠게 잔잔하게 파도치는 것은 이것들에 대한 답변일까요?


사람들이 시를 짓는 것은 생각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가지고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영화 <영원과 하루>는 그리스의 안개 짙은 해변을 배경으로 병든 노시인이 시어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과거와 현실, 기억과 환상이 엇갈리는 시인 알렉산더는 우연히 한 소년과 만나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에게 시어를 삽니다. ‘숨은 꽃!’이란 단어 하나에 동전을 하나 줍니다. ‘망명’에 동전 하나, ‘나’에 또 하나, ‘너무 늦었다’에 또 하나.


죽음을 앞둔 그리스의 노시인 알렉산더에게 지구 반대편 아득한 옛날의 시인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시인이 그리 고통스러워도 빠져나올 수 없게 하는 것, 옛날 사람들은 이것을 ‘시마’라고 불렀지요.


김경옥作 (41).jpg


날이면 날마다 심간 도려내

몇 편의 시를 쥐어짠다네.

(중략)

손바닥을 비비며 크게 웃다가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읊는다.

살고 죽음 반드시 이 때문일

이 병은 의원도 못 고치리라.


Image17.jpg


이규보의 ‘시벽’에 나온 구절입니다. 중국 당나라 시인 한유는 자신의 병적인 시어에 대한 몰두에 관하여 ‘슬프다, 무익한 일에 정신을 낭비하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일들을 헤아려본다면 배부르게도 할 수 없고 추위를 막아줄 수도 없고 아픈 데를 고쳐주지도 못하는 예술은 단연 최고일 것입니다.


책방에 가면 갖가지 종류의 책들이 많고도 많습니다. 문학에서 시작해서 예술까지 국적을 넘나드는 수많은 책들은 너무 현란해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중에 몇 권이나 예술이라는 마물에 걸려서 쓰고 만든 것일까요. 시마는 절대적으로 따뜻한 곳, 배부른 곳, 행복한 곳, 자족하는 곳으로 스며들지 않습니다. 분노가 슬픔이 아픔이 절망이 애절함이 그리움에 곤두선 사람에게 쓱- 다가섭니다. 그래서인지 삶이 고달픈 사람이 쓴 시야말로 진정 가슴을 울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둥그런 책상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