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학교마다 우수 학생들을 뽑아 국가시험을 치르게 하는데 마르셀이 학교의 이름을 드높였습니다. 선생님인 아버지는 여러 선생님들의 축하 속에서 기쁨과 기대가 넘치는 얼굴로 아들을 바라봅니다.
아버지가 아들 마르셀에게 말합니다.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영화 <마르셀의 추억>에서 온 식구가 두 손 가득히 보따리를 들고 여름의 집으로 걸어가는 장면은 화가 르누아르의 ‘풀밭 사이 오솔길을 올라가는 여인’을 보는 듯합니다. 밝은 태양과 하얀 구름, 숲속의 맑은 공기, 작은 풀벌레 소리, 여러 새들의 합창, 이름도 다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 투명한 시냇물 소리… 예쁘고 복스럽게 생긴 엄마의 모습은 꽃모자를 쓴 그림의 여인과 같습니다.
여름의 집 앞마당에 하얀 천의 테이블보가 보입니다. 엄마는 채소 샐러드와 주스, 우유, 빵 등으로 아침을 정갈하게 차리고 아빠는 드넓은 앞마당 잘생긴 나뭇가지에 거울을 떡 하니 걸어놓고 흰 구름을 닮은 거품을 턱 아래 풍성히 바르고 수염을 깎습니다. 그들의 아침 식탁에는 구름도 오고 새들도 오고 바람도 살랑살랑 들여다보고 갑니다. 목가적 풍경, 아름다운 자연의 힘입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집안을 부드럽게 이끌며 어려움이 불편하지 않고 불편함이 어렵지 않게 삽니다.
아버지가 사랑스러운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던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라는 대사가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처는 몹시 깊더군요. 형제와 형제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체를 통해 들은 이야기들을 모두 남의 이야기로 듣고 흘려버리지만 돌아서면 그것이 서서히 나의 이야기가 되어갑니다.
태어난 지 여덟 달 된 손자가 있습니다. 안개 속 저 멀리서 찾았던 ‘자랑’이 바로 코앞에 있습니다. 벙글벙글 웃습니다. ‘예쁘기도 하지, 아유 자랑스러워.’ 엉금엉금 기어갈 준비를 합니다.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 선수의 포즈입니다. ‘올림픽 선수가 되려나? 아- 자랑스러워.’ 이유식을 넙죽넙죽 받아먹습니다. ‘잘도 먹네, 무럭무럭 자라 거라. 천하장사, 우리 집 자랑거리네.’ 내 자랑거리는 뉴스가 시작되면 꼬옥, 일기예보와 스포츠뉴스 음악 소리에 꼬옥 머리를 돌려 쳐다봅니다.
한승원의 소설 ≪물보라≫의 한 구절입니다.
꽃을 좋아하는 할머니는 굿쟁이다. 치자나무 앞에 혜선이 키만 한 체경을 세워놓는다. “꽃아 꽃아 니 얼굴이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지 봬주마. 아잉 자 자세히 봐라이. 니가 너를 봐도 참말로 환장하게 예쁠 것이다.”
앞마당에 핀 치자나무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할머니의 그 마음을 닮아 살았다면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을 자랑스러워하며 살았다면 지금의 내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너무 부럽다. 내 입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소리다. 그리고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왜 크고 커다란 것에만 신경을 켜놓았을까. 자랑을 아주 먼 곳에, 높은 곳에 모셔놓고 바라만 보았다. 여기에 있는 것, 여기는 없다 생각했고 나의 목표는 외부에, 그것도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했다. 찔렸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오래된 상처들은 딱지가 붙었나 하면 다시 떨어져 피가 난다. 그것이 비교함에 있었다는 것을 지금 이 시간에 깨닫는다.
-이날의 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