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을 닮은 한강 다리

#54

by 김경옥

샌프란시스코 랜드마크인 골든게이트브리지(금문교)는 최초의 현수교로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유명한데, 처음 건설할 때 1년 동안 무려 23명이 추락해 죽었습니다. 건설회사에서는 거대한 그물망을 설치해 인부들의 생명을 구했다고 합니다. 골든게이트브리지에서 아스라이 보이는 곳에 ‘베이브리지’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일이 층으로 되어 있는 이 거대한 다리가 다운타운으로 이어지는데 교통난에 시달려 크게 다시 짓는다고 몇 년 동안 공사 중입니다.


작년 겨울 비행기에서 내려 딸네 집으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베이브리지 다 지었니?” 물으니 “응, 밤에 보면 네온사인이 참 멋져. 우선 넓으니까 시원하고, 옛날 것은 어쩜 그리 초라해 보이는지 어떨 때 보면 흉물스럽기도 해” 합니다. “얘, 그러지 마라. 그 다리가 그동안 얼마나 수고가 많았는데. 너도 몇십 년 억세게 사용을 했으면서도…”, “그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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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다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난간의 불빛이 오색으로 반짝입니다.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어떻게 생겼을까? 다리 위로 올라섰습니다. 흰색에 가까운 밋밋한 기둥 같은 것이 죽 서 있는 가운데 커다란 완두콩 같은 것이 중간쯤 드문드문 박혀 있습니다. 흰색의 빛입니다. “어쩜 이렇게 차갑니? 단순미는 이리도 재미가 없구나” 했습니다. 한 열흘쯤 지나 차가운 베이브리지를 건너 시내로 들어갈 일이 생겼습니다. 아무런 장식 없는 밋밋한 다리가 옛날 붓같이 보입니다. 뭘까? 가까이 가보니 다리 도입부에 야자수 나무 수십 구를 양쪽으로 심어 길을 만들어놓았습니다. 며칠 안 된 듯 적갈색의 흙들이 아직 벌겋게 쌓여 있습니다. 야자수 잎사귀가 사방으로 벌어지니 한곳으로 모아 끝을 잡아맨 것입니다. 그런데 야자수 끝을 잡아맨 것이 보테르의 조각처럼 통통한 붓처럼 보입니다. 그 붓으로 무수한 시어가 쏟아질 것 같습니다.


그 유연한 선이라니, 바닷바람 따라 버들강아지처럼 살랑댑니다. 다리에 들어서기 전에 양쪽에 한 줄로 죽 서 있는 푸른색의 붓들. 고전과 현대가 어울리는 순간입니다.


…밤이 이미 삼경을 지난 시간에 관문을 빠져나갔다. 장성 아래에 말을 세우고 높이를 헤아려보니 가히 십여 길은 됨직했다. 붓과 벼루를 꺼내고 술을 부어 먹을 갈아서 장성을 어루만지며 글자를 썼다.

건륭 45년(1780) 경자년 8월 7일 밤 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가다.


연암 박지원이 한밤중에 북경 고북구 장성을 빠져나가며 쓴 글입니다.

오랜 여행 끝에 쓴 글 중에는 이러한 글도 있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바는 붓은 가늘고 먹물은 말라서 글씨를 서까래만큼이나 굵게 쓰지 못하고 또 시를 남겨서 장성의 훌륭한 고사를 만들지 못한 점이다.


나는 “여기 세계에게 제일 큰 붓이 있으니 바다를 먹물 삼아 맘껏 쓰세요”라고 조용히 혼잣말을 해봅니다.

그로부터 20여 일 후 서울로 돌아가면서 그 거대한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붓을 휴대폰으로 찍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묶임에서 놓여난 붓은 야자수 나무가 돼 있었습니다. 오래전 뉴욕에서 온 친구가 샌프란시스코 야자수 나무들을 보며 “왜 이곳은 총채나무가 많으냐?”고 하는 소리에 크게 웃던 생각이 납니다.

총채나무, 오늘은 총채입니다.

“하늘도 깨끗이 털어주고 다리도 탁탁탁 깨끗이 털어주렴. 내 사랑 단비가 사는 곳이란다. 부탁해.”


비행기 안입니다. 먹을 것을 주고 나더니 불을 끕니다. 자는 시간입니다. 눈을 감고 꿈을 꿉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한강을 그려봅니다. 한강은 이 땅의 어머니 같습니다. 이 강산을 지으신 분들은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들이었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눈 한번 찔끔 감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셨습니다. 젊어서는 지아비를 의지하고 늙어서는 아들을 의지하고 살면서 지아비와 자식들, 시부모님께 복종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반대로 아내를 어머니를 의지하며 사람답게 자랐습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은 이 땅의 어머니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근래에 읽은 상허 이태준의 어머니에 대한 글입니다.


…여섯 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유골이나마 이역에 묻고서는 편안히 누워보신 저녁이 없으신 듯 석 달이 못 되어 어머니는 미처 풀도 푸르지 못한 아버지의 산소를 허시었다. 흙이 좀 묻었을 뿐인 관을 조그만 청어배에 싣고 고향 땅에 들어서 첫 항구를 찾은 것이 배기미, 지금 함경북도 부령 땅인 이진이었다… 한번은 어머니는 나만을 아니라 몇 사람의 일꾼을 데리고 아버지 산소로 가시더니 또 봉분을 허시었다. 그때는 관널이 썩어 있었다… 어머니는 팔을 걷으시고 손수 뼈를 추리시어 물에 그기까지 하시더니 백지에 싸고싸고 묶고묶고 하여 그때까지 따라 다니던 가복 ‘정관이’에게 지워 철원 선영으로 보내시었다… 육로로만 나가게 하신지라 떠난 지 석 달 뒤에야 선영에 봉안되었다는 기별이 났었다….


웬만한 남자도 엄두를 못 낼 일을 해낸 어머니! 블라디보스토크 외지에서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혼자가 된 것도 모자라 산소를 두 번씩이나 파서 결국 철원으로 보낸 것입니다. 이 땅의 어머니 같은 한강에 꼿꼿한 선비를 닮은 학 같은 다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자동차가 없는 다리, 걸어서 한강을 건너며 연극, 미술을 관람할 수 있고 아름다운 조각이 깃든 다리에 낭만이 스며든 가로등, 다리 자체가 거대한 조각이며 예술 작품입니다. 그러면 천천히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도 깊이 있게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여유로움을 맛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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