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바라보며 가는 것
여기저기에 쪽지가 쌓여도 있고 노트 갈피, 책갈피에도 무수히 껴 있습니다. 결심을 하고 두꺼운 종이로 만든 상자를 샀습니다. 사실 집에는 ‘MY IDEA BOOK’이라고 쓰인 노트가 꽤 있습니다. 모두 손녀딸 단비가 자기 노트를 살 때마다 내 것도 사서 “할머니, 작품 아이디어 많이 해” 하며 준 것입니다.
뜨거운 커피잔 자국에 찢어진 쪽지에는 러시아 민요 ‘등불’이 적혀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남자가 집을 뒤돌아보며 등불이 켜 있는 창문을 바라보다 가는 것.’
내 버릇에 날짜 쓰고 시간 쓰는데 날짜도 시간도 없고 짐작하건데 밤 12시 지나 하는 라디오에서 들었겠죠. ‘바라보며 가는 것’에 밑줄을 강하게 그어놨습니다.
창가에 등불을 켜놓고 기다리는 사람의 가슴이 저미는 시간, 기다림의 따뜻한 등불을 떠나 생사를 오가는 전쟁터에 가는 남자의 등불. 도저히 그 마음들을 글로는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각자 듣는 사람의 몫이겠죠.
그림 그리듯 만들어본 작품입니다. 창문틀을 짜는데 목공소를 수없이 드나들었습니다. 인체와 등불, 여기에는 반드시 불빛이 비쳐야 됩니다. 그런데 그 작은 등잔을 구하는 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엔 골동품상회에서 7센티미터 되는 등잔을 구했죠. 굵은 실로 심지를 만들고 주유소에서 사이다병에 등유를 샀습니다. 불빛이 타오를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보기에는 간단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뒷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엄청난 수고스러움이 있습니다. 구매자는 복잡하다고 등불 든 여인만 샀습니다. 창틀에 유리를 끼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엄청난 수고를 한 창문은 작업실 꼭대기에서 여전히 혼자입니다. 아가를 안고 있는 엄마를 만들어 혼자인 창가에 세워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