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엄마, 내일 가훈 써오래.”
몇 년 전 둘째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하는 말을 듣고 얼떨결에 “가훈이라니?” 하고 되물었습니다.
“학교에 교훈이 있듯이 집마다 가훈이 있다면서 가훈이랑 가훈을 정한 이유를 상세하게 써오래.”
순간 몹시 당황했습니다. 친정에서도 시집에서도 대청마루 앞에 직사각형의 나무판에 먹글씨로 위엄 있게 쓰인 현판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고등학교 때 태극기와 더불어 칠판 위에 붙어 있던 자그마한 액자가 떠오릅니다.
“나라를 사랑하자. 민족을 사랑하자. 학교를 사랑하자.”
여러 글자 가운데 ‘사랑’ 자가 유난히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야 후회가 밀려옵니다. 내 집에도 캠퍼스에 예쁜 그림과 함께 몇 글자 적어놓았더라면, 아이들이 글자를 알아갈 때 읽게 하였더라면 가훈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을까?
생각이 많으니 고를 수가 없습니다. 밤이 깊도록 주사위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1. 하나님을 섬기자.
2. 몸과 마음을 건강히 가꾸자.
3. 책임을 다하자.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당연한데다가 마침 아이들 학교가 기독교 학교라 상세히 쓰지 않고 두세 번째 항목에만 설명을 붙였습니다.
‘건강한 마음과 건강한 몸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사랑할 줄 아는 마음, 남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 겸손한 마음, 부지런한 마음, 긍정적인 마음, 정직한 마음, 성실한 마음, 남을 칭찬할 줄 아는 마음, 고마워하는 마음 등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사람을 그릴 때 얼굴을 둥그렇게 그리고 눈, 코, 입, 귀 그리고 팔과 다리를 그립니다. 겉으로 보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형상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많습니다. 머릿속에 있는 그 많은 신경줄, 살아 숨 쉬게 하는 호흡기 계통,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그것을 영양소로 잘게 쪼개주는 소화기 계통, 영양소를 운반해주는 심혈관 계통… 이것들 중에 무엇 하나 삐딱하면 우리는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끼던 재산과 명예와 악착같이 잡았던 권력을 스스로 놓아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많은 기관이 자기 책임을 철저히 수행했을 때 우리는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하고 나쁜 음식 피하고 과식하지 말고 골고루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욕망은 채우면 채울수록 마음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인생을 슬프게 살게 됩니다. 마음이 건강치 못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인간으로서 갖출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 맡은 바 본분에 책임감을 다하는 사람,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 몸과 마음이 각기 자기 기능을 잘 발휘할 때 진정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아침에 정성껏 준비한 가훈과 설명서를 도시락과 같이 가방에 넣어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그림을 그려서 그 위에 가훈을 쓰고 클래식한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놓아야지! 딸아이가 즐거워할 얼굴을 상상하며 내가 만든 가훈대로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안일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잘 써왔다고 하시디?”
“딴 애들은 한 줄, 두 줄밖에 없어. 엄마만 길게 썼어.”
“넌 읽었니?”
머쓱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아니!”
‘엄마 숙제 해갔는데 왜?’ 하는 표정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무수히 갔습니다. 우리 집 벽에는 빈 벽면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클래식한 액자의 ‘가훈’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