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옥 Nov 01. 2017

야곱 신부의 묘비명

#85

<야곱 신부의 편지>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짐을 야곱 신부에게 보내고 야곱 신부는 하나님께 보내고 야곱 신부는 다시 사람들에게 보냅니다. 도시와 멀리 떨어진 외딴 마을 허름한 집에 헐어빠진 침대의 네 다리는 꽉 차 올라간 편지가 대신합니다. 비가 내리면 이곳저곳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집니다. 물통을 비롯한 크고 작은 갖가지 그릇으로 빗물을 받아냅니다. 야곱 신부는 이곳에서 여러 성도들을 비롯한 상처받은 사람들의 근심걱정이 담긴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냅니다. 이는 야곱 신부의 삶의 전부입니다. 어느 여름날 ‘레일라’라는 여인이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납니다. 레일라는 어릴 적 엄마에게 학대를 받았는데 그때마다 언니가 대신 맞아가며 지켜주었습니다. 자연히 비뚤어진 분노로 뭉쳐진 레일라는 형부에게 맞고 사는 언니를 보호하려다 형부를 칼로 찔러 죽입니다. 종신 무기형 죄수로 감옥생활을 하던 레일라는 누군가의 끈질긴 상소로 말미암아 감면받고 오갈 데 없는 발길로 야곱 신부의 대필자가 됩니다. 오는 편지 읽어주고 신부가 부르는 내용을 받아 적어 답장을 보내는 역할입니다. 눈이 안 보여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산 야곱 신부와 보이는 세상을 저주하며 폭탄 같은 분노에 찬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문은 활짝 열어놓은 노인의 생애와 마음의 자물쇠를 꽝꽝 걸어 잠근 여인의 이야기가 낡고 춥고 비 새는 집에서 무겁고 축축하게 이어집니다. 우편배달부 외에는 아무도 안 오는 판잣집에서 먹을 것이라고는 차디찬 빵 한 조각과 차 한 잔. 몇 번의 식사 장면이 나오는데 똑같습니다.


햇빛이 마당의 나무 사이로 반짝 비추는 날에 표정 없는 레일라는 편지를 읽어줍니다. 보낸 이의 주소가 없어도 이름이 없어도 신부는 그가 누구인지를 압니다. 성경 구절을 읽어달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에 답을 합니다. 읽어주고 쓰는 것에 싫증이 난 레일라는 오는 편지를 쓱쓱 버리기 시작합니다. 편지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야곱 신부는 실의에 빠져 치매기가 듭니다. 오지 않는 편지 때문에 점점 병들어가는 고통을 본 레일라는 잡지책을 찢어 편지라며 마음대로 읽어줍니다. 그러던 중 레일라는 자신의 서명운동에 신부와 언니가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신부에게 언니가 보냈던 편지묶음을 전해준 신부는 때 묻은 속옷 바람으로 마룻바닥에 쓰러져 세상을 떠납니다. 헐어빠진 현관 앞에 검은 자동차 두 대가 섰습니다. 경찰차와 장의사 차입니다. 하얀 천에 덮인 야곱 신부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나옵니다. 레일라 혼자 서 있습니다. 나도 얼른 뛰어가 그 옆에 섰습니다. 바윗덩어리 같던 레일라의 마음을 여지없이 통쾌하게 깨어버리고 야곱 신부는 떠났습니다. 화려한 장미꽃과 산속의 이름 모를 작은 꽃, 다 하나님이 만드셨고 직분도 그분이 주셨습니다. 아무런 불평 없이 받는 그대로 살았던 야곱 신부는 ‘내가 편지를 기다린 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한 것이라고, 편지는 내가 살아가는 힘이었다고, 하나님은 그 일을 시키시며 나를 붙잡아주셨다고’ 합니다. 헬렌 켈러는 ‘단 사흘이라도 볼 수 있다면 친절과 우정으로 대해준 사람들을 보고 싶고 책들을 보고 싶고 자연과 찬란한 노을을 낮이 밤으로 바뀌는 기적의 시간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야곱 신부는 자기를 지탱해준 편지의 수호천사들을, 읽어주는 것만으로 들을 수 있었던 성경책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을 보고 싶었겠죠. 편지를 쓴 사람은 야곱 신부가 수호천사였고 야곱 신부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수호천사였던 것입니다.



꽃샘추위가 기승이었던 날,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버스를 기다립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진들을 붙여가며 가리개 식으로 만든 간판이 줄줄이 서 있습니다. 쓰여 있는 글씨를 읽으려니 세찬 바람 때문에 글씨가 낙엽처럼 자꾸 날아갑니다. 일부러 읽으러 오는 사람들도 있겠지. 버스 기다리며 이것도 못 읽을까 싶어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 속에서 읽었더니 역사의 소용돌이에 온몸이 덜덜 떨립니다. 덕분에 등짝에 얼음을 갖다 대는 듯이 오한이 오고 목이 콕콕 쑤십니다. 코코아 뜨겁게 한 잔 마시고 감기약 먹고 누웠습니다. 친구가 선물로 준 나눔포켓성경 시편을 폈습니다. 몸이 아파오니 마음이 마냥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뭐 큰일이나 나는 듯 ‘구해주세요’ 구절만 따라 읽다가 바로 이 구절에서 얼른 일어나 앉았습니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시편(145:13)


야곱 신부의 무덤 앞에 쓰일 묘비명입니다. 평생 지녔을 성경책과 꿈이고 희망이고 소망이었던 하나님 나라, 전하고 또 전하고 크게 전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신부님의 편지를 받았던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