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울타리가 좋다. 소나무를 대강 잘라 큰 키 작은 키 관계없이 죽 세워두고 거칠게 대패질을 하다 말았다. 군데군데 원형으로 구멍이 나 있어 공기가 왔다 갔다 하는 송진 냄새 향긋한 투박한 나무판들. 그 안을 상상하며 언뜻 구멍 속으로 보이는 아득한 그곳을 궁금해한다.
담이 좋다. 사이좋게 쌓아올린 여러 모양의 돌들 사이로 파릇파릇 잎이 나오고 꽃도 씩씩하게 피어난다. 벌도 놀러오고 노랑나비 호랑나비도 놀러오는 한가한 돌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돌들은 웃는다.
벽이 좋다. 거친 모래, 시멘트 듬뿍 섞어서 대강 바른 옛날 솥단지 걸던 부뚜막에 어느 여인의 눈물자국이 얼룩진 채 반질반질 윤이 난다. 그곳에 아침햇살이라도 비추는 날에는 형용할 수 없는 빛의 향연이 벌어진다.
무엇인가에 깊이 빠져 자신을 잊고 몰두하는 것을 벽(壁)이라고 한다. 남들이 뭐라 하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한길을 파다 보면 새로운 창조물이 나온다. 조선의 실학자 박제가도 ‘벽이 없는 사람은 쓸모가 없다’는 말을 남겼다. 늦은 오후 작업실에 홀로 앉아 가상의 벽면을 지었다 허물었다 한다. 무저항인 벽에 기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