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공감이 필요할 땐 코를 만질게

  남편은 내게 종종 말한다. "넌 역지사지의 정신이 부족해"라고. 인정한다. 나는 역지사지가 때때로, 살짝 부족한 면이 있다. 그러므로 직접 부딪혀서 얻은 깨달음은 잘 기록하여 필요한 순간에 요긴하게 꺼내써야 한다. 


  겨울에서 봄날로 넘어가는 2023년 2월에 우리 가족은 종로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혼잡한 종로거리 구경도 즐거웠고, 길거리에서 산 플라스틱 공을 차며 걷는 둘째도 귀여웠으며, 더 이상 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첫째를 보면서는 적시에 수영레슨을 시킨 나의 결정이 뿌듯했다. 여기까지였다면 비교적 흠집없이 완벽한 호텔팩이긴 하였었겠지만, 한 오년쯤 지나면 이 날을 잘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다분하였다. 


  그러나 체크아웃을 하고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의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은 내게 종로 호텔팩을 제대로 각인시켰다. 나는 2023년 2월에 종로에 놀러 간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체크아웃 후 호텔 회전문에서 아이들은 남편에게 혼이 났다. 회전문에서 장난을 쳤기 때문이다. 아빠에게 혼이 난 첫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이 첫째의 캐리어를 치고 지나갔다. 안그래도 아빠한테 혼이 나서 기분이 안 좋은데, 불난 데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첫째는 "저 사람은 내 캐리어를 찼는데 세상에, 사과도 하지 않고 그냥 가. 어떻게 저렇게 저럴 수가 있어?"라며 씩씩댔다. 사실은 나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첫째가 지나가던 행인에게까지 격한 감정을 소모하는 것이 적절치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저 사람은 니 캐리어를 자기가 찬줄 몰랐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말해보았다. "엄마, 지금 저 사람 편드는 거야? 몰랐을 리가 없다고! 부딪힐 때 소리가 났기 때문에 분명 들었어"라고 반박했다. 덮을까 싶기도 했지만, 딸이 좀 더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성적으로 조언했다. "솔직히 저 사람은 너한테 하나도 중요한 사람이 아닌데, 모르는 사람 때문에 니 기분이 나빠질 필요가 없어." 그러자 첫째의 앙칼진 답변이 화살보다 빠르게 꽂혔다. "엄마는 지금 내가 모르는 사람 때문에 화를 내는 쫌생이 같다는 거야?" 이쯤되니 지한테 득되라고 조언한 걸 저렇게 꼬아 받아들이는 게 얄미워서 "그런 말이 아니잖아."라고 나도 쏘아붙여버렸다. 


  아이들을 혼낸 남편도, 첫째한테 화를 낸 나도, 남편-행인-엄마에게 쓰리펀치를 맞은 첫째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침체되어 있었다. 그날은 내가 운전을 하였는데, 옆 차선의 차가 우리 차로에 올듯말듯 하여, 내가 다소('다소'라는 표현이 주관적일 수 있음은 인정한다) 서행을 하는 순간이 있었다(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내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자 뒷 차가 크락션을 시끄럽게 울렸다. '나도 빨리 가는 게 좋지. 옆 차가 올듯 안올듯 하니 서행한 거 아니냐'라는 마음에 기분이 나빠져서 남편한테 "뒷차 너무 한거 아니야? 아니 내가 뭘 잘못했어?"라고 동조를 구했다. 그러자 나보다 운전경력이 훨씬 오래되신 남편님께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신 뒤 "아니, 뒷차는 그럴만 했지. 이런 상황에서는 니가 빨리 가야지. 왜 서행을 해?! 니가 옆차를 배려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어."라고 말했다. 나는 로켓트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매우 격한 감정을 담아, 따졌다. "아니, 그러면 너는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남편은 "너는 무조건 너 편을 들어주기를 바랬던 거야?"라고 의문을 표했다.  


  나는 딸이 더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조언을 했지만 이것은 딸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마 남편도 내가 운전을 잘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을 해줬을 테지만, 나는 욱해버렸다. 나와 딸에게 필요했던 것은 감정적인 동조였다. 이성적인 조언은 격랑의 감정이 한풀 꺾인 뒤에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욱한 나의 모습과 앙칼진 딸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나는 비로소 역지사지의 자세로서 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앞으로 육아를 할 때 오늘의 깨달음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남편과는 서로 양육을 하는 관계가 아니니, 좀더 분명하게 교통정리를 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땐 남편의 냉철한 조언이 듣고 싶을 때도 있으니.. 그래서 남편에게 '앞으로 공감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코를 만질 테니, 내가 코를 만지는 신호를 보내면 무조건 내편을 들어줘'라고 말해두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배신의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