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난 축제기획자가 되었다.

1st episode

by 이름만 부르주아

이제 데오드란트보다 대중적인 단어로 등극한 단어, 수제 맥주 되시겠다.

한때는 드래프트 비어(생맥주)와 헷갈리는 사람부터, 와인처럼 다양한 타입의 맥주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라거 아재 그리고 맥주 까짓 게 그거 그거지! 라던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그렇게 비주류였던 그 수제 맥주의 영어 이름, 크래프트 비어.

유행에 뒤지는 걸 누구보다 끔찍이 싫어하는 한국인의 냄비 근성과 힙스터의 기호식품이 만나니, 안동찜닭은 저리 가라의 광풍으로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이태원 외곽의 조그만 경리단은 맥덕의 성지가 되어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크래프트 비어 관련 산업 역시 가파르게 성장했다. 바틀 샵과 브루 펍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하고, 전국에 크고 작은 양조장들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마지막, 성대한 웨딩 케이크의 화려한 아이싱 장식처럼 두둥~ 맥주 축제가 전국을 덮치기 시작한다.


그 장대한 축제의 서막 귀퉁이 어딘가에 내가 있었다고, 감히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운을 떼자면, 미국의 유명 코미디 TV쇼 'The Office'의 한국 버전이었던 이전 직장 생활을 빼놓고는 이 시작을 설명하기 어렵다.

매체명을 말해도 모르는 잡지사의 광고팀 실장이었던 나는, 사업 수완이 꽝인 대표(이자 편집장) 덕분에 집달리처럼 광고료를 닦달하고, 매달의 판매왕이 되어 광고를 팔아치우거나 그럴싸한 기획으로 수익을 내야 했다. 그것 마저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 보릿고개가 오면 투자자를 끌어와 밑 빠진 독에 자갈이라도 메워 속절없이 새어나가는 비용을 충당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 어정쩡한 포지션 덕에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매거진에 종사함으로 얻는 고줠스한 베네퓟도 있었다. 바로 다양한 직종과 직책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물론 세상 어디에도 광인狂人은 존재하기 마련이니.. 훗날 미친 연놈들과의 이 구역의 승자를 가리기 위해 거품을 물기도 한다.)


몇몇의 멋진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내 인생의 중요한 인맥들도 이곳에서 양성되었으나, 다 물어뜯은 손톱으로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지긋지긋하다! 를 외쳐대던 순간이 비교할 수 없이 많았다.

무엇보다 비전 없는 이 회사에 더 이상 나를 투자하고 싶지 않았고, 대표보다 마음 졸이며 월급날을 두려워하는 내 모습에 뭔가 잘못돼도 한참이 잘못되었군 싶었다.

정작 대표는 탱탱볼에 앉아 푸우흡읏~ 고장 난 청소기 같은 소음을 동반한 콧김과 입김으로 밥공기만 한 머그잔의 뜨거운 커피를 홀짝대기 일쑤였다. 주 업무는 질펀한 엉덩이에 애처롭게 반으로 짜부된 탱탱볼을 튕겨가며 사무실 가림막에서 타조처럼 얼굴을 쭉 빼고 직원들의 행동을 감시하거나, 사무실 인근 양 많고 저렴한 백반 전문점(계란 프라이 제공 필수) 물색에 열을 올리는 게 전부였으니까.


잡지사는 꾸미기 좋아하는 나란 인간에게 걸맞은 직장이긴 했으나 호숫가의 백조처럼 표면적으로는 우아했을지언정, 내막은 낮가마 상인처럼 전국을 누비며 광고 한 면 콜? 사좡늼 도와줍쇼, 돈 좀 쓰세요 등 읍소에 가까운 미팅이 다수였고, 그 여정에 치여 취미로 모았던 세련되고 아리따운 구두들은 포레스트 검프의 운동화처럼 넝마가 되어 폐기되곤 했다.




심신을 태웠던 애증의 이전 직장과 사이다 이별을 고하고, 흠모해 온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구현하고자 사업자를 내고 온라인 광고 대행 및 번역 에이전시를 시작했다.

사무실도, 집기도 없이 그저 노트북 하나가 전부인, 와이파이만 빵빵하다면 만사 오케이! 얼마나 가볍고 담백한 일인가! (초장에 원했던 근무 환경은 이러했으나, 세상사 뜻대로 되나요.. 추후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된다.)


당시 집세 걱정이나 생계를 걱정할 딸린 가족도 없었기에 쿨내 진동하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일이 안 풀리면 허리 좀 조여매고, 술 값 좀 아끼고 라면으로 끼니 때우지 뭐... 사실 이런 일차원적 아매바 같은 마인드로 시작한 창업.

그래도 신통하게 입에 풀칠은 하고 지내다, 한 광고주가 오프라인 행사 기획을 제안했다.

그들은 원하는 바가 명확했다. 누가 봐도 확실한 유색 인종의 외국인을 특정 푸드 박람회에 모객해 달라는 것이었다. 고로 비주얼이 비슷한 중국인과 일본인은 제쳐두라고 소리였다. 행사가 한 달 좀 넘게 남은 시점에 500명 개런티를 요청하는 그 뻔뻔함에 압도되어 찍소리도 못했던 우리는 아프고 아픈 이름, 을...


이건 오로지 주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전시회 평가에 외국인들 모객으로 평가 점수를 올리려는 속내가 크리스털 클리어하게 확실했지만, 우린 대행사였고 가타부타 코멘트 필요없이 갑이 하라면 하는 거였다.

사무실이 없던 우리에게 전역의 커피숍이 우리 사무실이나 진배없었고, 갑님과의 미팅 후, 컨벤션홀 1층에 위치한 지금은 망해 없어진 카페베네 구석 자리에 머리를 감싸고 부리나케 짱구를 굴려봤다. 누가 봐도 이건 미션 임파서블.

‘그 푸드 박람회 공짜 초대장을 백장 뿌려도 외국인은 꿈쩍도 안 할 텐데... 암요.. 나라도 안 가지.. 휴..’

고개를 떨구던 찰나, 건너편에 앉아있던 떡갈나무 색의 단발머리를 한 동료 과장이 손가락을 빗삼아 앞머리를 가지런히 쓸며 '그거 어때요' 라며 운을 뗀다. 자기를 좀 좋아라 하는 외국인 친구가 하나 있는데, 욘석이 요새 수제 맥주에 엄청 열을 올리고 있다며, 경리단에도 홈브루잉 수업을 하는 작은 펍도 생기고 점점 사람들이 몰린다고 했다.




여기서 잠시 되짚자면, 내가 종사했던 과거 잡지사는 영문 월간지로 특급 호텔 객실이나 공항 라운지 등에 비치되는 일명 Urban Lifestlye Magazine의 형태의 특수지였다. 지역별 날짜별 행사와 각종 전시 및 이벤트, 레스토랑 및 호텔 정보를 게재하고 있는 이 잡지의 성격 덕에 나는 이태원과는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소싯적 압구정, 이태원에서 그렇게 놀아대더니, 잡지사도 이태원, 거래처도 이태원에, 나의 첫 독립 라이프도 이태원에서 시작하게 된다. 나름 이태원 좀 아는 언니.

그렇다 보니 이태원에 넘쳐나는 측근 안테나를 통해 재빠르게 크래프트 비어 행사를 기획했다.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라 관련 인맥을 소개받거나 무작정 찾아가 이벤트 홍보 및 참여를 독려했다. (갈고닦은 읍소 실력 발휘)


행사 안의 행사를 기획하며 전국의 외국인 꽌시와 커뮤니티에 일일이 행사를 안내하고, 길거리에서 전단지도 열심히 뿌려댔다. 제작한 영문 포스터도 사벽부터 일어나 배포하고,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대전 등 크래프트 비어 관련 업장에 직접 찾아가 포스터 부착을 부탁했다.

광고주가 주기로 한 금액은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올 숫자였는데 그땐 뭐에 씐 사람처럼 행사 성공만이 내 신뢰와 회사를 영위하는 길이라 여기며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처럼 매진했다.




결과적으로 행사는 생각보다 과하게 성공하여 개런티 한 500명의 참관객보다 2배가 넘는 1,100명가량의 인원이 전국에서 몰려왔다. 제주도에서 아침 비행기로 왔다던 외국인도 있었는데,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야말로 행사장은 다양한 외국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문제는 능숙은커녕, 운영에 대한 노하우가 전무하여 현장 대처 능력이 거의 제로였다는 점이다. 박람회 안 특정 몇 부스(우리 행사장)에 예상치 못해던 인파가 몰리자 우리는 대낮에 노출된 좀비처럼 방향을 잃고 허둥댔고, 결국 주최사의 제지를 받아 행사를 30분가량 일찍 중단하고 남아있던 참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고도 한심한 노릇이다. 뭘 몰라도 그리 몰랐다니.

우리는 행사를 찾아와 준 모든 그들에게 몹시 황송했으며 깊이 감동했고, 첫 행사의 성과물에 고무되고 말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