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난 축제기획가가 되었다.

2nd episode

by 이름만 부르주아

단번에 느낌이 오는 일이 있다. 2013년도에 내가 느꼈던 한 줄기 강렬한 필링. '아 이거다!'

상대방을 애매하게 알면 오히려 선방을 날리기 어렵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되도 않는 시뮬레이션을 졸라게 굴리기 때문이다. 반면 핏 국물 뚝뚝 떨어지는 날것의 순수한 상태라면 오히려 두려움을 상실하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 훌라춤을 추게 된다.

그때 딱 그런 정신머리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세상에 못할 일은 없다 생각한다. 하기 싫거나 어려워 안 할 뿐이고 배우면 뭐든 할 수 있다. 다만... 어떤 분야인지, 내가 어떤 스킬을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아웃풋 생성까지 소요되는 시간과 퀄리티가 달라진다.

미련 곰탱이가 되어 발바닥에 굳은살 넓혀가며 아슬아슬 공을 굴려봤자 결국 돈다발은 왕서방이 침 묻혀가며 세게 된다. 성실함으로 심신을 쳐발쳐발 기름칠하고 나를 온전히 태워버리라는 게 아니다. 무작정 열심히가 아니라, 스마트함으로 무장한 업무처리 능력. 허나 말해 뭐하나... 나 역시 그땐 미쳐 알지 못했다.




좀 놀 줄 알고, 주량도 정도껏 된다고 축제 그것도, 맥주 축제기획자가 되는 게 아니다. 음주가무 기량은 연봉에 반영되는 것도 아니고, 적금 이자에 적용되는 되는 것도 아니건만, 정말이지 꾸준히 평생 닦아왔다.

20대엔 소주와 데낄라를 달고 살았고, 30대엔 칵테일과 와인을 끼고 살았다. 저음으로 퍼지는 트림을 유발하는 차디찬 맥주의 시원한 청량감보다는 식도를 찌릿찌릿 훑고 지나가는 소주가 못된 남자처럼 끌렸다. 맥주는 어쩌다 이전 직장 상사와 이태원 펍 갈 때, 외국인 친구가 운영하는 아이리쉬 펍의 윙 나잇, 술 진탕 마실 거 같은 불금에 목구멍 적셔둘 요량으로 한잔 정도?


그나마 주위에 산재한 외국인 친구들 덕분에 나는 일찌감치 에일 맥주를 자주 접할 수 있었고, 라거 일색인 한국 맥주맛을 오줌맛 운운하며 밍밍하다며 비하하며 왈가불가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더욱이나 독주 애호가에게 밍밍한 라거보다 에일이나 다크 비어가 입맛에 들어맞았고, 크래프트 비어에 입문하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할 것 같았다.

술덕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맥덕의 길을 향한 고독한 여정이란..




크래프트 비어는 알수록 매력적이고,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또한 맥주 덕후들도 레베루가 달랐다.

소규모 양조장 관계자들의 쿨내 진동하는 크래프트 비어 스피릿이 보이지 않는 홉향처럼 일렁거렸고 크래프트 비어 매니아 중엔 말수 적은 IT 관계자 또는 공부 잘할 것 같은 우등생 같은 스타일에 온라인 라이프 전문가가 많았다.


난 그들과 정 반대에 있는 사람이었다. 술은 분위기 맞추기 위해 또 취하려고 마시는 게 주목적이었다.

당시에 난 '크래프트 비어를 제대로 모르고 관련 축제를 기획하는 게 왠지 소명에 어긋난 게 아닌가' 이런 갸륵한 마음도 적잖게 있었지만, 솔까말 여지를 잘 주지 않는 맥덕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레크리에이션 과장님이 어찌 엔지니어 팀장님의 머릿속을 헤아릴 수 있는가.


크래프트 비어를 제대로 배우겠다고 홈브루잉 심화 과정을 수료하고, 온갖 시음회에 얼굴을 디밀고, 집에서 맥주를 만든다고 법석을 떨다 팔팔 끓는 물을 발등에 쏟아 2도 화상을 입기도 했다. 이 일련의 과정을 수행하느라 돈도 오부지게 써댔다. 이런 열정을 학창 시절에 쏟아부었다면 얼마나 기특했을꼬.

함지박 사거리 전자랜드 점장이 디오스 냉장고 만드는 법을 배우겠다고 공업단지에서 용접 배우는 모양새랄까..


물론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낫다. 문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맥덕 코스프레를 해야 한다 스스로를 재촉하고 안달복달했나. 내가 잘하는 일과 해야 할 일을 혼돈하고 있었다.

난 축제를 기획하는 사람이지 브루어 지망생이 아니고, 맥주 분야에 큰 뜻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나름 국내 최초의 크래프트 비어 축제기획자가 아니던가.


착한 사람 눈에도 안 보이는 이 감투에 촌스러운 사명감까지 짊어지고 인간 번개탄이 되어 나를 하얗게 태웠다. 5년의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