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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Dec 31. 2022

회계사 커플의 시즌 나기

회계법인 감사 시즌은 얼마나 바쁠까?

길거리에서 들리는 캐럴이 출근하는 날 기상 알람보다 무서울 때가 있다. 쇼핑몰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할 때부터, 아니 롱패딩을 꺼낼 때부터, 아니 은행잎이 보일 때부터 여러 회계사들의 심장이 떨려온다. 곧 겨울이구나... 시즌이 오는구나...


감사본부에서 일하는 회계사들에게 1월부터 3월은 (이게 사는 건가 싶게 바쁜)"(비지) 시즌"이다. 12월 말에 크고 작은 회사들이 재무제표를 마감하면서 감사본부의 시즌은 시작된다. 대다수 회사들이 3월 중순에서 말까지 감사보고서를 제출하다 보니 여러 거래처들이 동시에 회계 감사를 받게 된다. 그래서 겨울은 회계법인 감사본부의 성수기라고 할 수 있다. 겨울마다 바쁜 탓에 미용실에 못 갔더니 단골 미용실에서는 내가 스키장에서 일한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겨울이 되고 나면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는 회계사를 두고 이런 글들이 자주 올라온다.

주말에 데이트 약속 잡는 건 무리인가요?
제가 사무실 앞으로 가야만 만날 수 있어요. 이 사람 저를 갖고 노는 건가요?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돼요. 회계사들은 똥도 안 싸고 밥도 안 먹나요?  


대형 회계법인 ("빅펌") 입사동기인 나와 남자친구는 7년 차 회계사 커플로서 회계사 입장도, 회계사 애인 입장도 모두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웃기고 슬프지만 어떤 회계사들은 정말 똥도 안 싸고 밥도 안 먹으며 일하기도 한다. 필드를 뛰면서 이전 필드 팔로업을 동시에 하다 보면 너무 바쁘고 정신없기 때문이다. (감사인은 감사를 수행하러 거래처로 출근하는데 거래처 사이트는 필드, 거래처 출근은 필드 출근이나 필드를 뛴다고 표현한다. 사전ㆍ사후 작업은 법인 사무실이나 집, 또는 다른 필드에서 하고 사후 작업을 통틀어 팔로업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겨울 내내 겨울잠 자듯 잠수를 타거나 얼굴 볼 시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전쟁통에도 아이는 태어난다는데, 감사 시즌이라고 연애를 못 할까. 만나는 빈도와 데이트 강도는 다를 수 있다. 나와 남자친구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시에 바쁘다 보니 같이 야근한 모든 주말이 데이트였다. 가끔 필드가 근처인 금요일에는 저녁 외식을 했는데 콧바람 쐬는 건 이때가 유일했다. 다른 오래 연애한 회계사는 애인에게 신경을 못 쓸 것을 대비하여 겨울 전까지 미리 엄청나게 잘해준다고 했다. 시즌 직전에 사귀기 시작한 회계사는 주말에 데이트를 하려고 (차이지 않으려고) 평일에 밤새 일을 해둔다고 했고 취준생 애인을 둔 회계사는 자주 만나되 만나서는 각자 공부와 일을 한다고 했다.


주변에 회계사 커플ㆍ부부가 많은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스케줄을 서로 이해해줄 수 있어서인 것 같다. 입사 초에 잠깐 연락했던 소개팅남은 내가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야근을 왜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 할 일을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열심히 하면 저녁에 퇴근할 수 있지 않냐고 하는 그에게, 오늘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중에 오늘 저녁까지 할 일이 추가가 되고 몇 시간 후엔 오늘 밤까지 해야 하는 일이 또 추가되는 상황을 이해시키긴 어려웠다.




일이 계속 쌓여가는 이유는 나간 필드 순서대로 한 곳씩 일을 완료하면 되는 게 아니라 나갔던 필드, 나갈 필드, 나와있는 필드에서 동시에 연락이 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쪽 필드 인차지(PM, 현장책임자)로 나와 있는데 지난주에 팀원으로 참여했던 저쪽 필드 대리님이 내가 요청한 증빙 팔로업을 위해 계속 전화한다. 동시에 다음 주에 인차지로 나갈 필드 담당 이사가 사전 이슈를 확인하기 위해 이메일을 계속 보낸다. 시즌 내내 필드를 세 개만 하는 게 아니다 보니 2월 즘에는 내가 당장 마쳐야 하는 일이 무엇이고 누구에게 답장을 안 했는지, 언제 누구에게 전화가 왔었는지 파악조차 안 되는 지경이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루 종일 애인에게 연락할 정신이 없긴 하다. 게다가 요즘 빅펌 노트북에는 보안 때문에 PC카톡을 못 써서 연락을 유지하는 게 더 힘들다. 나와 남자친구는 사내 메신저로 쉽게 연락할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하루 종일 아무 연락을 못 할 때도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를 자주 할 때에는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 남자친구와 합숙 훈련하듯 집에 갇혀 일만 한 적도 있다. 금요일 퇴근 후부터 우리 집에 모여 늦은 저녁까지 일을 마무리하고, 반주를 곁들여 야식을 먹고, 토요일에 일어나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김밥을 배달시켜 점심을 빠르게 먹고, 일을 하고, 저녁 먹으며 예능을 보고, 다시 늦은 밤까지 일하고...




시즌이 끝나면 비시즌이라고 하는 여유로운 때가 오는데 요즘엔 사실 비시즌이 따로 없다. 기본적으로 하던 기말 감사 이외에도 기본적인 분ㆍ반기 검토, 내부회계 감사, 각종 용역 때문에 야근이 허다하다. 그래서 나는 올해 일이 상대적으로 적은 중형 사이즈의 로컬 회계법인으로 옮겼고 예년보단 여유로운 시즌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찬 바람과 함께 벌써부터 겨울을 톡톡히 느끼고 있어, 옆에서 보고 있으면 작년까지 빅펌에서 함께 겪던 긴장감이 되살아난다. 이제는 롱패딩을 입어도 추운 진짜 겨울이 됐다.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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