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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Feb 20. 2023

나는 폐급이었을까

자괴감, 멈춰!

조직마다 진상, 빌런, 또라이, 폐급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을 빗대기엔 부적절한 비속어이긴 하지만 남이 싼 똥을 치우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비속어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강아지 똥이었으면 기꺼이 치워줬을 텐데, 안타깝게도 회사엔 그런 존재가 없으니 일을 처리하든 사람을 처리하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회계법인에도 감사 시즌(12월 31일 기준으로 회계 감사를 수행하는 바쁜 때, 바로 지금)을 한 번 지나고 나면 진상들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리스트가 돈다. 인차지들(In-charge, 현장책임자, 3~4년 차 이상) 사이에서는 일을 안 하는 1년 차 리스트가, 팀원들 사이에서는 성격이 더럽거나 일을 내리는 인차지 리스트가 돈다. 


그리고 이런 리스트가 돌기 전에 자극적인 소문들이 먼저 돈다. 어느 업계든 말이 참 빨리 도는데, 회계법인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1년 차가 못 하겠다며 잠수를 타버렸다느니, 어느 인차지는 팀원들에게 쌍욕을 했다느니 등 자극적인 뉴스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다. 






이런 소문의 주인공이 될까 봐 두려워서일까, 스스로를 별로라고 생각하며 자괴감을 느끼는 회계사들이 꽤 많다. 특히 일이 극한으로 몰리는 2월 중순엔 직급을 불문하고 사람이 예민하고 약해진다. 이때쯤엔 평소에도 멘탈이 약했던 이들에게 마인드 컨트롤은 딴 세상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내가 그랬다. 자괴감은 자주 찾아왔고 오전에 깨진 멘탈을 오후에 붙여놓으면 저녁에 다시 깨지기 일쑤였다. 예를 들면 조서를 쓰는 데 몇 시간씩 걸릴 때, 작년에 공부한 이슈인데도 기억이 안 날 때, 고객사가 물어본 회계 기준을 바로 답하지 못할 때, 확신에 차서 답했으나 알고 보니 내가 틀렸을 때, 나보다 연차가 몇 년이나 낮은 회계사가 나보다 조서도 잘 쓰고 인터뷰도 잘할 때, 다른 협력 회계법인에 너무 기초적인 질문을 공식적으로 보냈을 때 등등.


동료들과 '망했다', '나는 이 일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인가 보다', '나 회계사 어떻게 된 거지'라고 자주 한탄한다. 특히 1년 차 때는 매일 저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았다. 주변에 보면 건강하게 자기 페이스대로 잘 해내는 회계사들도 있지만, 저런 고민은 아무리 단단한 사람이라도 한 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며칠 전에는 이번 겨울에 회계법인에 입사한 후배가 본인은 폐급이라서 법인을 계속 다니면 안 될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후배가 무슨 실수를 한 건지는 자세히 몰라도, 스스로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폐급이 아니란 반증이라 답해줬다. 진짜 폐급은, 저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엉망으로 해놓고도 자신은 잘하고 있다고 자만하거나 엉망으로 해놓은 걸 알면서도 남이 대신 해결해 줄 때까지 모른척한다. 


처음 해보는 일은 느리고 서툴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공부를 해서 시험을 붙었다고 해도 그 많은 회계 기준과 세법, 해보지도 않은 감사 절차를 다 알 순 없다. 특히 1년 차에는 2년 차가 2시간 만에 할 일을 이틀밤을 새우며 하고 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처음 하는 일이고 공부했던 내용과 실무는 많이 다르니까.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변명이긴 하지만 실무는 1시간 내에 혼자 힘으로 암기한 내용을 가지고 풀어내야 하는 시험이 아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자료를 찾아보고, 혼자서 안되면 주변에 도움도 구해서 해결하면 되는 오픈북 테스트이다. 모르는 걸 인정하고 고민할 시간을 조금 벌면 된다. 회계사들이 그래도 한두 번 해보면 다음엔 잘한다. (아마도)


혼자 끙끙대며 자책만 하지 말고, 선임 회계사나 인차지에게 가서 "제가 너무 느리고 모르는 게 많아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할 테니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면 아마 크게 사랑받을 거다. 애초에 1년 차에게 기대하는 건 맡은 조서를 끝까지 채우기라도 하고, 이슈를 숨기지 않고, 연락을 무시하지 않는 일이다. 이렇게 아무 기대도 안 하고 있는데 어떻게든 1인분을 해내려는 1년 차라니. 귀하다.






자기 위로를 한다는 핑계로 항상 남 탓만 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안 한다면 진상이 될 테지만, 자괴감을 동력 삼아 실수를 줄이려고 노력하다 보면 세 개 하던 실수가 한 개로 줄어 있을 거다. 혹시라도 밤 새 한다 해도 못 끝낼 것 같은 일을 하루 만에 해야 한다면, 그건 시킨 사람 잘못이지 못 해낸 사람 잘못이 아니다.


멋있게 조언하는 것처럼 써두었지만 사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얘기들이다. 몇 년을 한 일인데도 멘탈은 강해지지 않고 항상 시험에 드는 이 기분은 적응이 안 된다. 게다가 이젠 '제가 처음 해봐서...'라는 핑계를 쓰기도 민망한 연차가 되어버려다. 그래도 더 자주 부서지는 대신 회복이 빨라진 게 조금의 발전이랄까. 그럼 이제 마음을 다 잡고 또 일을 하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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