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100일 동안 글 100개를 쓴 적이 있다. 혼자 한 건 아니고 한겨레교육에서 개설된 프로젝트형 글쓰기 수업에서이다. 수강생들은 매일 글 하나씩을 완성해서 온라인 카페에 올리면 됐고 2주에 한 번 만나서 글쓰기 훈련 수업도 받고 함께 읽은 책에 대해 토론했다.
회사 밖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어서 첫 수업 날이 생생하다. 책상은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었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둘러앉았다. 초가을 햇빛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고 손부채질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긴장감에 입이 타서 마스크 밑으로 텀블러에 담아 온 물을 연신 삼켰다. 글쓰기 수업이어서 그런지 학생은 여자밖에 없었고 풍기는 느낌도 비슷했다. 도서관을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의 긴치마를 입은 학생, 말을 조리 있게 할 것 같은 인상의 노란 카디건을 입은 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첫 수업인 만큼 우리는 간단한 자기소개와 글쓰기 수업을 수강하게 된 이유를 발표해야 했다. 무수히 많은 새 학기를 보내봤어도 첫 수업에 하는 자기소개는 항상 떨린다. 게다가 앞 순서에서 내가 하려던 말을 이미 해 버려서 겹치지 않는 멘트를 생각해 내느라 머릿속이 바빴다. 강의 커리큘럼상 100일 완주 날짜가 새해 1월 1일이길래 신청했다는 학생, 회사 보고서가 아닌 자신만의 글을 써보고 싶어서 신청했다는 학생, 한때 글쓰기를 좋아했던 기억이 나서 왔다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도 떨리는 목소리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회사에서는 재미나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회사 밖에서 한번 찾아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다.
우리는 첫 수업이 시작되기 10일 전부터 워밍업을 하기 위해 글을 올려 서로를 탐색할 수 있었다. 탐색을 해보니 나는 쨉이 안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재밌고 편안한 글을 쓴 사람들이라면 분명 아마추어는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자기소개를 들어 보니 전공자는 없었고 다들 글을 제대로 써 본 건 처음이라고 했다. 기가 팍 죽어버렸다.
브런치도 비슷하다. 내가 쓰고 싶은 주제를 가지고 맛깔나게 써 놓은 글들을 발견할 때마다 자신감이 곤두박질친다. 그럴 땐 나 혼자만의 유치한 시기와 질투 때문에 그런 글에는 라이킷을 누르지 않는다. 어떤 매력적인 작가님 글은 이상한 자존심에 구독을 누르지 않고 매번 검색을 해서 읽기도 한다. 그런 작가님 프로필에 잠깐이라도 글을 썼던 경력이 있으면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고 브런치에 합격하고 나서 첫 글을 발행할 때까지 다른 회계사들이 쓴 글은 일부러 검색해보지 않았다. 내가 쓰고 싶었던 얘기를 다른 회계사들이 이미 잘 써놓은 걸 보면 기가 죽어서 아무것도 몰 올릴 것 같았다. 그래서 첫 글을 올리고 나서야 회계법인과 회계사를 브런치에 검색해 보았는데, 앗… 역시나 내가 쓰려던 글감으로 더 잘 쓴 글들이 이미 많았다. 새삼, 세상에는 글 잘 쓰는 사람이 참 많구나.
수업 얘기로 돌아가면, 멋진 글벗들 덕에 기가 죽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부담 갖지 않고 즐겁게 쓰며 글과 친해지는 데만 만족해 보기로 했다. 그랬는데, 100일 완주를 하면 기념 상장을 준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럼 대충 할 수 없지. 나는 끈기가 없어도 지구력은 강한 사람이다. 이른 저녁부터 회식하는 날에는 알딸딸한 상태로 화장실에 가서 재밌지만 즐겁지는 않은 회식 자리에 관해 썼고 이사님과 같은 택시로 퇴근하는 날에는 상사와 퇴근길을 공유하는 불편함에 대해 썼다. 모든 글에 진심을 담고 정성을 쏟았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최소 문단 수 3개만 채워서 완성해 버린 적도 있고, 퇴고 한번 없이 초고를 업로드한 적도 있다. 그래도 그렇게 100일 완주에 성공했다.
대충 글 형태만 완성해서 올린 적도 있지만 꽤 정성 들여 쓴 적도 많다. 그런 글들은 아직도 기억난다. 한강물 라면에 대한 소신, 토마토마리네이드를 만든 사연, 스트레스를 받을 때 먹는 눈꽃 치즈 토핑 카레우동. 이런 이야기를 쓸 때 처음에는 '이게 맞나? 일기를 공개적인 곳에 올리는 것과 뭐가 다르지?'라고 고민했다. 글 쓰는 방법론을 가르치는 수업은 아니었기 때문에 에세이를 어떻게 쓰는지 전문적인 지식 없이 일단 써내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매일 쓰다 보니 일기와 에세이의 다른 점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고 내가 어떤 이야기를 쓸 때 즐거운 지도 알 수 있었다. 대충 쓰더라도 '완성'한다는 게 의미가 있었고 덕분에 정말 글쓰기 근육이 생긴 것 같았다. 헬스장에 주 5일을 가도 안 붙던 근육인데…
다른 학생들의 글을 매일 읽고 댓글을 달다 보니까 어떤 글이 독자를 끌어당기고 어떤 글이 읽기 불편한지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어떤 글감이든 상관없이 훌륭한 글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그전까지는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가 주목받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다른 학생의 글은 자신이 옷을 좋아해서 다음 날 입을 코디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해 놓는 게 행복하다는 글이다. 친구끼리 할 수 있는 이야기 같은데 어릴 때 코디하던 에피소드부터 대학생이 되어 쇼핑했던 이야기까지 재밌게 풀어 두어서 술술 읽었던 기억이 난다.
매일 쓰다 보면 글감이 똑 떨어져 버릴 때도 있는데, 그러면 글감이 떨어졌다는 글감을 가지고 글을 쓰면서 '이 정도면 프로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재밌는 건 그런 비슷한 글을 다른 학생들도 썼고 브런치에서도 종종 읽었다는 거다. 다들 품었던 이야기를 열심히 쓰다 보면 글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글감이 떨어진 사연에 대해 쓰면서 잠시 쉬어가기도 하나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쓰긴 했지만 매일 쓰진 않았다. 첫 수업 때 선생님께서 일기를 쓰는 학생은 손을 들어보라 하여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가 선생님의 "매일 쓰십니까?"라는 질문에 바로 깨갱, 손을 내렸었다. 방학숙제 일기도 매일 안 쓰던 내가 어른이 되어 100일 간 빼먹지 않고 썼다는 건 꽤 자랑하고 싶은 일이었다. 회사에서도, 일상에서도 뭔가를 해냈다는 기분을 느낀 지 오래였는데.
그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브런치도 시작하게 됐나 보다. '그냥 한 번 해보자'라고 생각했던 일을 정말로 해내고 나니까 이렇게 다음 길로 연결이 되었다. 역시, 꾸준함이 진리구나. 이때 또 한 번 깨달았던 꾸준함의 소중함을 더없이 소중히 하여 글을 계속해서 매일 썼다면, 나는 지금쯤 브런치 인기 작가가 되어 있었을 텐데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