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을 시작하고 네 번의 겨울이 지났다. 몇 년 된 취미치고 그동안 내가 뜬 실보다 사 모은 실이 더 많은 것 같다. 실을 살 때는 분명 목도리도 뜨고 양말도 뜨고 모자, 가방, 키링도 뜨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완성되는 작품은 없고 실만 쌓여갔다. 이사할 때 보니 실이 한 상자가 넘어버렸다.
그래서 저번 겨울에 10만 원짜리 대바늘 세트를 사게 되었다. 고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고수가 아니었다. 저 쌓인 실을 처리하지 못 한 걸 다이소 바늘 탓으로 돌리고 결제를 해버렸다.
보통 새로운 취미는 언제 그만두어도 아깝지 않게끔 최소 비용으로 시작해 왔다. 뜨개질도 최소한의 바늘만 다이소에서 사 와서 시작했었다.
그런데 실은 좀 달랐던 게, 장비가 아니라 "재료"이고 유통기한도 없어서 '언젠가 저걸로 작품을 꼭 만들 거야'라는 생각에 사는 게 아깝지 않았다. 색, 재질, 용도별로 다양해서 고를 선택지도 넓었다. 그리고 꼭 뭔가를 뜨지 않더라도 예쁜 색에 부드러운 촉감을 가진 실은 그냥 사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져서 소장할 맛이 났다.
그랬었는데! 이사를 하면서 나는 미니멀리즘 지망생이 되었고 이 소장품이 짐이 되어 버렸다. 무게에 비해 부피가 커서 다이소에서 산 제일 큰 수납 상자에 넣어도 넘쳐났다. '저거 떠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밀린 방학 숙제처럼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저번 겨울에는 상자 속 실을 소진할 수 있는 무언가를 뜨고 싶었다. 충동구매했지만 막상 색이 마음에 안 들어서 손이 잘 안 가던 겨울용 가성비 실 몇 볼을 먼저 집었다. 이것저것 뜨기 좋게 적당히 두꺼우면서 부드러운 카키색 실이었다. 나는 수족냉증이 심하니까 다리 토시를 뜨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리 토시라고 생각했던 작품은 사람들이 '레그 워머'라고 부르고 있었고 마침 그 겨울에 레그 워머가 유행이어서 참고할 영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이고, 그런데 뜨다 보니 내가 가진 바늘로는 노가다가 필수였다. 기본 대바늘만 있었는데, 이걸로는 편물을 여기로 옮겼다 저기로 옮겨야 해서 속도가 안 났다. 바늘 길이가 조금 더 짧으면 좋겠는데….
사실 이 노가다가 내가 뜨개질에 빠진 이유이긴 하다. 일에 치여 마음이 불안하고 스트레스가 심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 노동을 하다 보면 명상을 한 것처럼 근심과 불안이 가라앉았다. 실제로 뜨개질이 세로토닌을 분비해 우울감에 좋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는 힐링보다는 빠른 속도가 필요했고 나는 숏팁(짧은 대바늘)을 가지기로 했다. 검색해 보니 기본 대바늘을 자르고 깎아서 숏팁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뜨개질 입문자가 아니니까 장비에 투자해 보기로 했고 어차피 바늘 굵기 별로 다 필요할 거라 낱개로 사기보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세트를 들였다.
직접 써 보니 10만 원짜리는 달라도 정말 달랐다. 그동안 쓰던 바늘은 왠지 모르게 꺼칠하고 둔한 느낌이었는데, 새 바늘은 부드럽게 코팅되어 손가락이 편했고 코를 뜰 때마다 '탁탁'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쓸 수 있겠다.
그래서 레그 워머를 잘 완성시켰냐고? 아니. 다리는 두 개인데 레그 워머는 하나 겨우 완성했다. 바늘은 계속 쓰고 있냐 하면, 평생 취미니까 앞으로 꾸준히 쓰면 되겠지? 마침 바늘 10만 원어치를 샀더니 실 네 볼을 사은품으로 받아버려서 재료 걱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