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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환 Oct 28. 2020

삶이 되어 버린 나의 역마살

대금과 함께 세계로               김  명환

  

       

1.  역마살의 태동     


역마살이라고 하면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역마살을 떠 올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즉 어디 한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낭인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는데 나의 어렸을 때의 경우가 그랬다.     


학교 공부 때문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야 했던 우리는 온기 없는 집안을 벗어나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 일쑤였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토요일이면 어머니가 계시는 시골에 가서도 몸에 배지 않은 농사일에 진저리가 쳐져 두 집 모두 우리들에게는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학교를 다니는 집과 시골집을 오가며 생활하다 보니 친구들도 사귀기 힘들어 언제나 외톨이가 되었고 시간이 되면 만화방에 가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소일하며 역마살의 꿈을 키워 나갔는지 모르겠다.     


정말 어렵게 고등학교를 마쳤으나 취직 시험에 떨어지고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보험회사의 외무사원으로 서울 시내를 누비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사람에게 보험을 들어줄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6개월을 고생만 하다 시골로 내려와 친지의 도움으로 사립학교 서무과에 취직을 하였지만 하는 일이라는 것이 학생들과 학교 실습지에서 같이 일을 하거나 일꾼을 사서 논과 밭에서 일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고 그런 일이 없을 때는 건물을 보수하거나 다른 작업을 하는데 동원되어 정말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고역이었고 어서 벗어날 궁리만 했었는데 그것은 군에 입대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2.  역마살의 준비     


남들은 군에 입대하게 되면 가기 싫어 계속 미루다 마지못해 입대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비해 나는 군에 가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육군 훈련소에서는 모든 것이 힘들고 그때는 상급자들의 폭력과 기합이 많아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 견딜 만 했다.     


내가 군에 입대할 때가 1976년 12월 27일이었다.  장정으로 대기하는 동안과 훈련기간은 아주 혹한기로 그때 당시에도 몇십년 만에 몰아닥친 한파로 고생이 극심했고 훈련소에서도 그것을 감안하여 최대한 좋은 곳으로 배치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었는데 그 덕분인지 미군부대 즉 카투사로 배치되어 내 인생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고 본격적인 역마살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3.  역마살의 시작은 책으로 시작하다.     


논산 훈련소를 마치고 다시 카투사 교육대를 지나 자대에 배치되었는데 처음에는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었지만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는 나의 자유로운 생활이 전개되었다.  책을 통한 세계 여행이었고 역사 여행이었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책을 통해 이루어졌었다.       


세계의 역사를 책을 통해 보고 미군들과 이야기를 하며 영어를 다시 배우고 그러면서 간접적인 역마살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내 인생에 있어서 군대 생활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경험을 했기도 했었지만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고 내 역마살을 키워주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때 생각나는 하나는 미군의 사병들은 거의 흑인과 유색인종이었고 백인이라도 무식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같았다.  클럽에서 맥주를 마시다 막사로 돌아오는 길 운동장 벤치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가 보니 같은 소대의 흑인 마크 이병이 울먹이는 소리로 미국에 있는 마누라에게 소식을 전하는 녹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글은 겨우 이름이나 쓰는 정도고 마누라에게 편지를 쓸 형편이 되지 못해 이렇게 녹음기를 놓고 마누라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녹음기로 녹음하여 테이프를 보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같이 근무를 할 때는 지들이 점령군처럼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때 당시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큰 위험한 나라라고 해서 독일이나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들 보다 위험수당을 더 많이 받았고 달러를 가지고 나가 암달러상에 팔면 은행에서 바꾸는 것 보다 더 많은 돈을 주었으며 PX 물품을 영외로 가지고 나가 월급 외로 얻는 수익이 무척이나 많았다.      


미군 부대에 근무한 30개월의 기간은 정말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 정황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과 함께 미군의 모든 문화는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같이 생활하며 그들과 동화되며 그렇게 우리나라 사람들과 조금은 다른 역마살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역마살로 가는 가교가 되었고 신선한 충격의 시작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면서 또 나의 역마살을 충족 시켜준 것은 수송부대에서 근무하며 운전병으로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정비소대에 근무하며 수송소대의 차가 고장 나거나 사고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대형 구난차로 픽업을 할 때 선임 탑승자로 여러 곳을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군에서 생활 할때의 모습

                                     

                                         

미군 부대에 근무하면서 여러 나라 출신의 미군들과 생활을 하며 즉, 유럽에서 온 사람, 남미에서 온 사람, 아시아계 미군, 정말 다양한 인종, 다양한 지역 출신의 그들과 살면서 언젠가는 나도     세계여행을 하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4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에 생각해 보아도 그때가 정말 좋았다는 생각이고 책도 많이 보았고 공부도 열심히 했고 클럽에서 연주도 많이 보았고 맥주와 칵테일도 많이 마시고 쇼도 즐기며 남들이 즐기지 못하는 여유를 많이 즐기고 여유를 누렸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자취를 하며 어렵게 중, 고등학교도 거의 고학으로 학교를 다녔는데 군대에서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세계에 대한 새로운 도전의 역사를 만들어 주어 어떻게 감사의 말을 해야 되지 모르겠다.               




4.  전설이 된 나의 역마살(직장 재직 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못하고 서울에 갔다가 다시 사립학교에 잠시 근무하다 34개월 군대 생활을 하다 제대를 하고 시골집에서 취직 시험 공부를 한다.     


1979년 9월 제대를 하고 시골집에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가을이라 무척이나 바쁜 시기라 연로하신 어머니는 가을에 추수로 무척이나 바쁘시고 나는 취업 시험 준비로 촌각을 다투고 있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밥을 하시고 대충 한술을 뜨시고 아들 밥은 챙겨 놓으시고 밭에 나가신다.  나는 저녁에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저녁을 먹고 조금 있으면 어머님은 피곤한 몸을 뉘시고 나면 나는 그때부터 어머님이 깨시는 새벽까지 공부를 한다.     


어머님이 깨시는 그 시간에 나는 잠이 든다.  그러고 잠이 깨면 점심때가 된다.  어머님이 챙겨 놓으신 밥을 먹고 어머님과 밭에서 같이 일을 하며 그렇게 하루를 지내는데 어머님이 생각하시기는 매일 늦잠만 자는 마음에 안 

드는 일도 못하는 아들이라 치부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힘들게 아들을 키워 놓았는데 일도 제대로 못하고 어머니 말씀대로 반 푼수, 즉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때는 몸으로 하는 힘든 일도 못하고 또 좀 배운 것은 있어도 취직이 되지 않아 좀팽이처럼 사는 사람들도 정말 많았었다.      


그렇게 겨울을 지내고 봄에 은행에 모집 공고가 있어 시험을 보고 취직에 성공하였다.  사령장을 받으러 서울에 갔는데 발령은 부산으로 났다.  고향은 충청도인데 부산으로 발령이 났으니 정말 사단이 나도 그럴 수가 없었다.          

  


  가.  거시기가 뭐냐? (부산에서)     


신입행원 시설의 부산 생활은 고난과 질타의 시간이었다.  고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구박을 받아야 했고 고향은 충청도지만 전라도와 가깝고 또 군대에 가기 전에 전라도에서 근무한 덕에 전라도 사투리도 가끔 튀어 나오는 거시기라는 단어는 전라도 사람을 좋게 보지 않는 부산 사람들의 질타를 받으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직장이나 마찬가지지만 새로운 직장에 가면 지연이나 혈연과 학연의 도움을 받아 업무와 함께 앞으로 직장생활의 노하우를 배워야 되는데 외지에서 온 이방인은 언제나 외톨이가 되어야 했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고 부산에서 1년 반이 지나간다.  합숙소에서 생활하다 또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 친구 집에서도 왔다 갔다 하며 그렇게 지냈는데 직원들 인사이동 발표가 있는 날 차장님이 부르신다.  너 혹시 진주에 연고가 있는지 물어보신다.  아니 없다고 하는데 차장님 표정이 이상하다.  그러시면서 이번에 네가 진주로 발령이 났는데 뭐 생각나는 것이 없느냐 물어보신다.  지난번 인사 관련 설문지에 근무 희망지 1번과 2번은 대전으로 했고 3번은 혹시 진주로 발령이 나면 지리산에 자주 갈 수 있을 것 같고 옆에 있는 여자 직원의 고향이 산청이라 진주로 쓰기에 그냥 진주로 썼다고 하니 차장님 표정이 밝아지신다.               

  



  나.  여직원과 사고치고 진주로(?)     


나의 첫 인사이동은 정말 많은 이야기 거리를 불러 일으켰다.  자기 희망지에 그것도 제 3지망에 여직원이 간다고 해서 설마하고 써 놓았는데 정작 발령이 나니 옆의 여직원과 사고를 치고 쫓겨 오는 것으로 소문이 난 것이다.  그것도 남자 행원과 여행원이 같이 발령을 받아 가니 더 이상해진 것이다.  정말 사고를 쳤으면 남자와 여자를 서로 떼어 놓아야 되는 것이 맞는데 소문은 그렇게 났고 소문의 진원지는 아마도 전화교환 아가씨였을 것이란 심증이 간다.     


옛날에는 전화를 걸거나 받을 때 전화 교환대를 거쳐 나가고 들어오기 때문에 교환 아가씨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통화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자기 신고서를 여직원과 장난으로 진주로 써 놓았다는 것을 여직원과 이상한 장난을 쳐서 쫓겨 오는 것으로 와전된 것이다.     


그러나 부임한지 2개월 만에 내가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는 것으로 모든 해프닝은 끝났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니 나와 같이 발령을 받았던 여직원은 나만 괜한 소문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 하소연을 했었

다.     


어쨌든 진주에서 2년을 넘게 잘 살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발령이 났다.          

  



다.  어떻게 이리 먼 곳까지(강원도 태백으로)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한 지점에서 2년이 넘으면 인사이동이 되고 그랬는데 그때 당시에도 인사이동이 너무 잦다고 하여 조금 완화되는 분위기로 원하지 않으면 3년 까지는 유예되었는데 갑자기 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전국의 모든 은행들이 한 지점에 2년을 넘긴 직원들은 모두 인사이동이 되었다.  나도 2년하고 1개월이 지나 발령 난 곳이 강원도 태백이다.       


경남 진주에서 강원도 태백은 그때는 어떻게 찾아 가는 방법도 난감하였다.  지금이야 스마트 폰으로 검색하면 다 나오지만 일단 부산으로 갔다가 부산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부산에서 강릉으로 가는 첫차를 새벽 6시에 타고 강원도 태백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넘어 도착한다.     


아직 점포가 개설되어 있지 않아 개설준비위원으로 발령을 받아 한창 지점 공사를 하고 있는 곳에서 지점장을 만나 인사를 드리니 아니 진주에서 어떻게 이리로 발령을 받았지 하고 물으시는데 뭔가 일을 저질러 쫓겨 오는 것 아니냐는 뉘앙스를 풍긴다.     


난 정말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곰곰이 생각하니 강원도 도계지점이나 태백지점은 유배지라고 한다.  특히 강원도 출신이 아닌 외지인에게는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어머니께서도 기차를 타고 태백에 오시는 길에 탄가루로 새까만 탄광촌의 사택을 보시면서 내 아들도 저런 곳에서 살겠지 하는 마음에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본 다른 사람이 위로하는 말을 듣고 목을 놓아 우셨다는 말을 듣고 뭔가 명예 회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단은 지점장께 내가 왜 이리로 발령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고 또 지점장께서도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시니 제가 원하는 곳으로 빠른 시기에 인사이동을 시켜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나도 인사부장께 사신을 보내 명예 회복을 주장하였더니 이례적으로 태백에 온지 1년도 되지 않아 고향인 논산으로 발령을 받았다.          



태백지역의 탄광을 견학하고 소감문을 올린 사내보의 모습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강원도 태백은 들어올 때 오는 길이 험하고 날씨가 모질게 춥고 어떻게 살까 걱정이 되어 울며 들어왔다가 떠날 때는 정이 들어 떠나기 싫어 나갈 때도 울고 나간다고 한다더니 태백을 떠나 올 때는 더 근무를 해도 좋았을 것 같았다.     


9월에 발령 받아 갔다가 이듬해 8월에 떠나 왔기에 혹독한 겨울을 지내며 무척 고생을 하였지만 눈에 쌓인 태백산을 등산을 하며 비닐 포대로 눈썰매를 탔었던 기억과 5월에도 밤에 눈이 내려 새벽에 설경을 선사했다가 해가 나오자 바로 녹아 버리는 모습을 보았고 6월 현충일을 전후한 기간에 피는 철쭉은 무척 아름다웠다.  시커멓게 흐르는 황지 천을 보며 자란 어린이는 강을 그릴 때 검은색으로 칠한다는 곳이지만 황지시장 인근에 있는 식당에서 연탄불에 구워먹는 한우의 맛을 잊지 못해 요즘도 시간이 나면 태백을 여행한다.          

  



라.  순간으로 지나간 고향 논산에서의 생활     



타향에서 생활하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정말 많이 돌아다닐 일이 많았다.  놀러 다니기도 하였지만 카드를 권유하고 가계수표를 사용하는 계좌를 홍보하러 옛 은사님을 찾아 인근의 학교를 많이 돌아다니고 학자금 연체자를 찾아 시골길을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또한 대리로 진급하기 위한 책임자 고시라는 시험이 있어 그 시험공부에도 매진하며 정말 바쁘게 생활했었다. 그러면서도 토요일 일요일이면 시골의 어머님을 도와 농사일도 거들었다.  그러면서 무리를 해서 논과 밭을 장만해 드리기도 했었다.       


2년 동안 고향인 논산에서 생활하다 다시 이동할 때가 되었다.  대전에 근무하려고 신청을 하니 어렵단다.  다시 역마살이 도져 방랑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인천으로 신청한다.  부산에 사시던 장모님이 아들을 따라 인천으로 오셨고 그래서 논산보다는 대도시가 나을 것 같았다.           

  



마.  객지 아닌 객지(인천 부평)     



나는 결혼하면서 맞벌이를 하지 않겠다고 했고 또 그렇게 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없는 집에 살아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결혼 당시에 월급으로만 따지면 대기업 계열에 근무했던 아내가 은행원이었던 나보다 월급은 더 많이 받았지만 과감하게 포기하라 했고 그렇게 살았다.     


만약 아내가 직장 생활을 하였다면 그렇게 돌아다니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인천에는 처남과 장모님이 계셨고 처형 내외와 가족들도 있어 처가 동네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가끔 모여 음식도 같이 만들어 나누어 먹고 놀러 다니기고 하니 여기는 객지 아닌 객지로 별 탈 없이 생활을 하다 이제는 정착을 할까 생각하고 대전을 희망지로 적어 넣었더니 이번에는 충북 충주로 발령이 났다.          




  바.  충북의 충주지점에서     



은행에는 대개 지역본부라는 것이 있어 그때 당시의 예를 들면 부산지역본부는 부산과 경남지역을 관할하고 충청지역본부는 대전과 충, 남북을 관할하며 호남지역본부는 광주와 전남, 북, 그리고 제주도를 관할하는 식이었다.     


보통의 경우 직원들의 인사이동은 지역본부 내에서 이루어진다.  충청지역본부에 있다면 대전을 중심으로 근무를 하는데 대전 시내에 경쟁자가 많으면 일단은 대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가 대전 지역에서 자리가 나면 들어가는 그런 구조인데 나는 은행에 들어온 지 8년 만에 부산지역본부, 강원도를 관할하는 동부지역본부, 충청지역본부를 거쳐 경인지역본부로 갔다가 다시 충청지역본부로 오게 되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나는 그때 당시에도 전국을 돌아다니는 전설의 역마살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야유회를 가거나 등산을 갈 때면 국내의 지리는 거의 꿰뚫고 있었다.  여행도 좋아했고 낚시도 정말 좋아했다.  더군다나 등산은 지역본부 내 산악회에 가입하여 매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열혈 팬이었고 그러지 않을 때는 가족과 함께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이들 어렸을 때 텐트를 치고 야영하던 모습

                                                

                              

  사.  마지막의 방랑은 제주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서울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 전라북도와 부산을 거쳐 경남, 강원도, 충청남도, 인천을 지나 충청북도에 있다가 다시 이동할 때가 되어 이번에는 제주로 가기로 신청을 한다.  제주도에는 3개의 지점이 있는데 1지망부터 3지망까지 제주지역으로 신청을 하니 정말 제주지점으로 발령이 난다.     


제주지역으로 발령 받기를 원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늦은 나이이지만 야간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제주도는 외부 사람들이 별로 없어 대학가기가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정은 달랐다.       


제주도에서는 대학교에 들어가기도 어려웠고 육지에서 온 직원이 근무하기에는 여건이 별로 좋지 않았다.  더구나 아이들이 학교를 가는 시기라 되도록 이면 빨리 제주를 벗어나 오랜 기간 정착할 곳을 찾아 안주를 해야 될 것 같았다.     


1년 반을 제주에 근무하면서 제주도 곳곳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고 한라산 정상에도 몇 번을 올랐는지 모를 정도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아 같이 안내를 맡아 돌아다니거나 식사를 대접하고 또 대접을 받기도 하다 보니 대출을 끼고 샀던 인천 부평동의 조그만 아파트 한 채가 날아갔다.     




     

  아.  대전이 아니면 안 나갈래요.     



제주에 온지 1년 반이 지났을 때 지점의 정원이 축소되어 책임자 중 한명이 육지로 나가야 되는데 다른 책임자들은 전부 제주사람인데 나만 육지 사람이다.  전입 순서로 따지면 먼저 부임해 온 다른 사람이 나가야 되지만 가능하면 내가 나가 주기를 바라는 눈치다.  나는 대전시내로 보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하니 정말 힘들게 대전으로 발령이 났다.     


대전에 근무하면서 여행도 많이 다녔지만 야간대학에 입학하여 만학의 꿈을 이루었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경영학 석사 학위도 취득하였다.  공부를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집 근처의 도서관을 찾아 같이 공부하며 생활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인 것 같다.     


13년간의 대전에서의 생활은 정말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었고  IMF 금융위기를 맞아 많은 은행들이 통폐합되고 상상을 초월하는 금융권의 구조조정이 일어났고 수많은 금융인들이 정든 직장을 떠나야 했다.     


다행히 나는 대학 공부를 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석사 논문을 준비하며 우리 보다 먼저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던 남미 등의 사례를 공부하면서 금융기관들의 구조조정은 서로 인수 합병을 통해 몸을 키워 시장을 지배하고 그런 다음 비용 절감을 이유로 지점을 줄이면서 대폭적인 인원감축으로 이어지는 것이 정석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이 난국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직원들과의 차별성을 갖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인사고과를 잘 받았을 리는 없을 것이니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여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자산관리사 자격증을 비롯하여 투자관련 모든 자격증, 보험관련 자격증 등 앞으로 은행에서 필요로 하는 자격증과 함께 필요한 교육을 이수하여 놓았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많은 구조조정이 있었고 퇴직을 압박 받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내가 원하지 않을 때까지 근무를 했으니 정말 다행이지 않았나 싶었다.  대전에 근무하는 동안은 정말 열심히 살았다.  공부도 많이 했고 여행도 정말 많이 다녔다.  대전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차가 없다가 학교를 다니며 차를 구입하고 학교와 출 퇴근용이 아닌 여행의 용도로도 많이 썼던 것 같다.  휴일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할 때는 담요를 들고 잠자리를 차로 이동하여 새벽에 출발하여 동해안에서 일출을 보고 경주를 둘러보고 남들은 경주에 도착하는 시간에 우리는 다 보고 집으로 돌아와 쉬는 그런 여행을 즐겼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부터는 아들의 모든 생활이 학교에서 해결되니 우리 둘만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금요일 일이 끝나면 차를 몰고 나가 한참을 돌아다니다 모텔에서 잠을 자거나 정말 늦은 시간에는 찜질방에서 쪽잠을 자고 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익산의 시골에 어머님이 계시고 부산에는 처형 내외가 사시고 인천에는 장모님과 처남 내외, 서울에는 처형 내외가 살고 있으니 가끔은 그곳으로 가기도 하며 역마살의 타고난 기운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여행을 즐기며 대전에서 살았는데 아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하였다.     


처음에는 하숙을 시켰는데 한 학기가 끝나고 나니 안 되겠다 싶어 서울로 이동 신청을 한다.  모두들 말린다.  그래도 옛정이 무서운 것인데 서울의 다른 지역본부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 다음에 명예퇴직이 실시되면 퇴출 1순위라고 하며 극구 말린다.       


하지만 나의 역마살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이며 퇴출되면 어차피 다른 일을 찾아야 할 텐데 대전 보다야 서울이 나을 것이고 노숙을 하더라도 대전역 보다야 서울역이 낫지 않겠느냐며 서울 행을 강행한다. 



         

  차.  인생이 바뀐 서울 생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가 쫓겨나다 시피 떠났던 서울,  그때 생각에는 다시는 서울에서 생활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각박한 인심은 그만 두고라도 매연과 교통난과 함께 집 문제도 그랬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40년이 지난 후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집도 구입해 들어올 수 있었고 떨어져 있어 공부에 소홀했던 아들도 집에서 학교를 다니니 안정을 되찾아 가는 것 같아 서울로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년이 넘게 지속된 직장생활은 언제나 고난과 함께 긴장의 연속이었다.  업무가 사람을 상대해야 되고 사람을 관리해야 되고 거기다가 돈도 관련이 되니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이 어떤 때는 끔찍하기 까지 하였다.  그것이 금융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숙명이 아닐까 생각된다.       


서울에 온지도 5년이 지나고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될 즈음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다고 한다.  조건이 나쁘지 않다.  과감히 신청을 한다.  신청 당시에 대학 졸업반인 아들의 취직이 확정되었으니 아들과 나의 역할이 바뀌게 된다.     


아들이 취직해서 돈을 벌고 나는 놀고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그것은 한달 만에 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취직하여 첫 달 월급을 아내에게 주었던 아들은 월급 받기가 너무 어려운데 앞으로는 엄마한테 돈을 안 준다고 한단다.  나도 그러면 네가 알아서 모아서 결혼도 하고 모든 일은 네 책임으로 하고 앞으로는 하숙비는 내라고 했는데 그건 안낸 것 같다.     


지금 서울에 온지 15년째 같은 집에서 살고 있지만 이곳에서 살면서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가 원하는 직장을 잡아 결혼을 해서 분가하고 딸도 유학을 다녀와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고 결혼하여 나가 사니 이제는 우리 내외만 이곳에 살고 있다.                                                                                                   

                      

파란색으로 표시한 곳이 내가 근무했던 곳이다.




                             

6.  전설이 된 나의 역마살(퇴직 후)     



나는 어려서부터 돈벌이를 했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돈을 벌기 시작해서 만 54세에 명예퇴직을 하고 그 후로 2년간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나니 만 57세에 돈벌이를 끝냈다.  퇴직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 많이 남은 생활에 돈이 되는 일을 찾기 위해 공부를 하는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돌아다닌다.     


하기야 돈을 벌려고 생각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자격증, 즉 자산관리사나 보험대리점과 투자관련 자격증 등을 가지고 보험대리점 등을 설립할 수도 있고 그런 회사를 찾아 취업을 할 수도 있었지만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행복한 현재를 포기하지 말자고 생각해 미뤄 두기로 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국내의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근무를 했었고 여행도 무척 많이 다녔으며 해외여행도 많이 나갔었다.  동남아시아와 중국 등은 패키지를 이용하여 몇 번을 다녀왔고 홍콩과 마카오는 영어가 통하니 아내와 둘이서 배낭여행으로 다녀오고  은행에서 보내준 유럽의 5개국을 배낭여행으로 16박 17일을 다녀오기도 했었다.  집사람과 둘이 시카고를 보름동안 다녀오고 호주도 보름동안 배낭여행을 했었다.     


은행 생활을 하면서 안식년 휴가와 연차를 이용하여 해외여행을 다녀온 간이 큰 직원을 상상이나 했었을까?  하기야 지금에는 의무적으로 연차를 사용하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바쁜 업무에 연차 휴가는 통상 임금의 1.5배의 연월차 휴가 보상금을 받는 것이 당연시 되던 때였었다.  안식년 휴가는 그저 규정상의 문구라 생각했었는데 나는 그것을 사용했었다.     


퇴직은 나의 역마살이라는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가.  40여 일간의 미국여행     



2011년 3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있던 때 일본의 나리타를 경유하여 미국의 LA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우리나라의 항공사 보다 배 이상 저렴한 비행기를 타기 위해 많은 불편과 시간을 할애했던 것이다.  조금의 불편함과 하루 정도의 시간을 더 들이는 것이 4 ~ 50만원의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번의 여행은 LA에 도착하여 나스베가스와 그랜드캐년을 현지 투어를 이용하고 비행기로 나스베가스에서 시카고로 갔다가 거기서 암트랙 패스를 한 달간 12구간을 끊어 시카고에서 뉴욕과 워싱턴을 돌아보고 시카고로 왔다가 밀워키와 미니애폴리스를 다녀왔다가 시카고에서 미 대륙을 횡단하는 샌프란시스코로 그리고 LA로 와서 샌디애고를 여행한 다음 다시 LA와 샌프란시스코와 요세미티 국립공원 현지 투어를 하는 것으로 여행을 마쳤다.     


저렴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일본에서 미국으로 가는 항공사 직원들의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똑같은 의심을 미국의 입국심사대에서도 경험하며 배낭여행의 어려움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에 호주를 여행하거나 할 때에도 저렴한 항공권을 구입하기 위해 일본을 경유하거나 싱가포를 경유하는 것을 이용하기도 했었다.  한번 공항을 빠져 나가기가 어렵지 한번 하고 나면 그 다음 부터는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나.  지구 한 바퀴를 비행기를 타지 않고 돌아본다.     



조금은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겨본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보는데 비행기를 타지 않고 돌아보기 위해 동해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의 브라디보스톡으로 출발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동쪽 끝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약 1만 키로 미터가 조금 안되고 기차를 타고 6박 7일을 달려야 되지만 사흘을 브라디보스톡에 머물다 하바로프스키로 가서 그곳을 둘러보고 기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의 동쪽 도시 울란우데로 가서 바이칼 동쪽을 여행 한 다음, 이르크츠크에서 바이칼 서쪽을 둘러보고 옴스크를 지나 모스크바로 다시 상떼빼떼르부르크로 해서 핀란드의 헬싱키에 도착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출발하는 블라드보스톡 기차역 플랫트홈

                            

부부가 함께한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유럽과 크루즈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미국을 여행한 루트

        

어쨌든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한달 가까이 러시아를 여행을 하고 북 유럽으로 와서 카우치 서핑으로 여행을 시작했으나 서로 부담도 많고 같이 돈을 쓰다 보니 경비도 만만치 않아 차라리 비용을 지불하고 자는 방법으로 바꾸어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한 여행을 시작하였다.  


2개월의 유레일패스를 끊어 핀란드의 헬싱키를 출발하여 여러 도시를 여행하고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기차역인 노르웨이의 나르빅을 지나 오슬로, 스웨덴의 스톡홀름, 독일의 함부르크, 체코의 프라하, 오스트리아의 빈 등을 여행하였다.     


계속하여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와 크로아티아의 자그래브, 슬로바키아의 코시체, 브라티슬라바, 체코의 체스키크롬로프, 독일의 뮌휀, 다시 스위스를 둘러보고 다시 프랑스의 파리에서 머물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독일의 함부르크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밀라노, 로마 등을 지나고 프랑스의 니스를 지나 스페인의 발렌시아와 마드리드, 세비아를 돌아보고 바로셀로나에서 일주일을 머물다 대서양 횡단 크루즈를 타고 미국의 마이애미에 도착하여 머물다 다시 암트랙 패스 보름간 8구간을 끊어 마이애미에서 워싱턴을 지나 시카고로 또 시카고에서 달라스를 다녀오고 다시 시카고에서 캐나다의 밴쿠버로 가기 위해 나섰다가 폭설로 포기하고 돌아오는 등 미국 대륙을 기차로 종단과 횡단여행을 모두 했었다.     


정말 대장정의 여행이었다.  장장 4개월 가까이 배낭여행을 했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 와야 하는데 크루즈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면 정말 비행기를 타지 않고 지구 한 바퀴를 돌 수 있는데 아쉽게 크루즈 표를 구할 수가 없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시카고에서 한국에 오는 직항은 무척이나 비싸다.  터키의 이스탄불을 거쳐 오는 터키항공이 무척 저렴하다.  보름 동안 이스탄불에서 스톱오버를 하는 것으로 아이들이 항공권을 구매해 준다.     

다시 터키의 이스탄불에 와서 사프란불루, 앙카라, 괴뢰메,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셀축과 이즈메르 등 약 보름동안 터키를 여행하고 한국에 돌아온다.  두 명이 지구 한 바퀴를 약 5개월을 여행하면서 쓴 비용이 약 2천 3백만 원 가량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엄청난 돈이고 여행기간과 여행 거리를 따져 보면 많이 쓰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은 서로 다르니 이해하는 것도 다르다.     


직장을 그만 두고 내가 주로 하는 일은 은행관련 지식과 함께 금융기관에 취업을 위하는 학생들을 위한 진로 상담이나 그런 쪽의 봉사활동을 하고 나에게 좋을 것 같은 우리 악기인 대금을 배우고 커피를 내리는 것과 스포츠 댄스와 함께 봉사활동을 위한 심리 상담 등의 스킬을 습득하고 사회공헌 활동의 봉사활동에도 참여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다 남미를 여행하기 위해 떠난다.      

                        


휴먼 북으로 봉사한 내용을 보도한 잡지의 모습

                     



  다.  나를 찾아 떠나는 중국과 남미, 그리고 일본 여행     



이번에는 혼자 여행을 하기로 하고 준비를 한다.  비용은 약 천 만원을 한도로 생각하고 돈이 떨어지면 돌아오는 것으로 한다.  남미로 가기 위해서는 가장 저렴하게 가는 것이 미국의 LA로 가는 방법이 제일 좋을 것 같아 항공권을 구입하는데 북경을 거쳐 가는 것이 제일 저렴하다.  이번에는 편도로 끊는데 북경에서 한 달을 머무르는 스톱오버를 신청하여 중국의 차마고도와 계림, 북경 등 어떤 때는 동행자와 함께 돌아다니고 어떤 때는 혼자서 한 달 중국을 여행하고 LA를 거쳐 멕시코에 도착하여 동행자와 함께 멕시코를 여행하고 다시 쿠바로 날아가 혼자서 약 보름 간 쿠바를 여행한다.     


쿠바를 여행하고 멕시코의 칸쿤으로 왔다가 페루의 리마에 동행자가 있어 같이 리마에서 마추픽추까지 같이 여행을 하다 동행하던 사람들과 헤어져 혼자서 페루의 쿠스코를 지나 티티카카호수의 우르스섬을 지나 볼리비아의 코파카바나, 라파스, 수쿠레를 지나 소금사막을 여행하고 칠레의 아까타마로 해서 산티아고와 발파라이소, 푸에로트 문트, 칠로에 섬, 오소르노, 푸에로토 바라소, 푼타 아날레스를 거쳐 아르헨티나의 우수아니아로 간다.     

우수아니아에서 엘 칼레파테로 가서 모네나 빙하를 보고 다시 엘 찰틴을 지나 남미의 스위스라 불리는 바빌로체로 갔다가 네우켄을 지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문다.                                                                                        

 다시 로사리오를 거쳐 프레이토이과수와 브라질의 폭포를 감상하고 쿠리티바에서 머물다 수도인 상파울루에 도착한다.  한참을 상파울루에서 머물다 마나우스로 가서 브라질의 아마존 밀림에 들어가 며칠을 보내다 니우네자네이루로 왔다가 상파울루로 돌아왔다.     


상파울루에서 어디로 갈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이제는 집으로 돌아 왔으면 좋겠단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들이 결혼을 하려는데 아빠가 없어서 못하고 있단다.  돌아갈 비행기 표를 검색하는데 상파울루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는 모두 비싸다.  다른 곳을 거쳐 와도 비싸기는 마찬가지 인데 일본의 도쿄로 오는 비행기 많이 저렴하다.       


상파울루에서 멕시코시티를 경유하여 나리타에 가는 비행기를 탄다.  그리고 이왕에 일본에 온 김에 보름 동안 도쿄와 나고야 교토를 여행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혼자서 158일 간의 여행을 하면서 동행이 있을 때는 동행자의 의사에 따라 돌아 다녔고 많은 시간은 혼자서 여행을 하였다.  숙소는 주로 게스트 하우스를 이용하였고 한 도시에서 머물다      

    


중 남미의 여행 루트

                                                                                                  

                                            

다시 이동 방법과 다음 여행지의 숙소를 미리 예약해 두고 갔다가 어떤 곳은 다음 날 이동하기도 하였지만 좋은 곳은 사흘에서 나흘을 머물기도 하고 좋은 곳은 일주일도 머물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수단은 멕시코의 칸쿤에서 페루의 리마까지는 비행기를 이용하였지만 그 이후로는 버스로만 이동하였다. 칠레에서는 한번 버스를 타고 32시간을 여행한 경우도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가족들의 응원이 없었으면 여행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힘들고 외로운 여행이었지만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또 삶을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교훈을 얻기도 하였다.  천당과 지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천당과 지옥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들의 말대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바로 상견례가 이루어지고 그해 가을 아들은 결혼하여 우리를 떠났다.               




  라.  동유럽 여행 ( 탈렌에서 크레타 섬까지)     



혼자서 중국과 남미,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온 지  반년도 지났고 아들도 결혼해서 나갔고 딸은 호주에 유학을 갔다 오더니 필리핀에서 오래 근무하다가 여자가 들어가기 힘들다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하다가 이제는 폴란드에서 근무를 한다.     


동생 결혼식 때문에 한국을 다녀왔으니 이번 휴가는 유럽의 그리스 쪽을 여행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와 같이 하면 어떻겠느냐고 이야기한다.  나는 무조건 오케이다.  그리고 네 휴가 전에 우리는 여행을 시작하다가 같이 합류하는 것으로 하자고 한다.     


일단은 모스크바를 거쳐 에스토니아의 탈린으로 향한다.  탈린에서 닷새를 머물며 헬싱키에서 카우치서핑때 호스트와 재회의 기쁨을 맛보기도 하며 여유롭게 우리 둘만의 여행을 즐긴다.  버스를 타고 타루트에 머물다 다시 발가로 이동하여 쉬다가 라트비아의 리가로 가서 여유를 부려본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트아니아 등의 발트 3국은 도시 환경도 좋고 물가도 저렴하며 옛날 공산주의 국가로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기 때문에 흑인이나 제 3국의 사람들이 없어 안전하다.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또 어느 도시가 좋으면 이틀이나 사흘을 묵으며 도시를 둘러보기도 하고 카페에 앉아 뜨거운 와인을 홀짝거리며 시간을 보내도 나쁘지 않다.  리가를 지나 리예파야를 지나고, 니투아니아의 클라이페다, 니다를 거쳐 수도인 빌니우스로 간다.     


이제는 폴란드로 넘어와 그다인스크, 헬과 스포트, 말보르크를 여행한다.  주말을 맞아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딸을 만나 같이 여행을 하다 딸은 근무지로 가고 우리 둘은 쿠라쿠프, 아우츠비츠와 소금광산을 여행한다.  자코파네를 지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여행 중인 친구와 극적인 상봉도 하고 국경 마을인 세게드에서 휴식을 취해 보기도 한다.  세게드에서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로 갔다가 리슈에서 머문다.  마케도니아의 스코페를 지나 불가리아의 소피아로 이동한다.       


이제는 딸과 합류하여 같이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스의 테살로키니에서 만난다.  이제 부터의 여행 일정은 딸의 스케줄에 따르고 딸이 정한 숙소에 머물게 된다.  테살로키니의 숙소는 우리가 먼저 들어간다.  딸이 예약해 곳을 찾아가니 괜찮은 가정집의 한 층을 게스트하우스로 제공해 준다.       


딸과 함께 하니 숙소도 좋고 딸이 사주는 음식도 식당으로 가니 좋다.  그렇게 카람바카, 아테네, 산토리니까지 열흘간의 휴가를 같이 즐기고 딸은 폴란드의 근무지로 떠나고 우리 둘만 남는다.         



                                                                                                    

에소토니아의 탈린에서 그리스 크레타 섬까지의 여행 루트

                             


다시 우리 둘만의 여행이 시작된다.  나머지 여행은 그리스의 남쪽 섬 크레타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열흘간을 여행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와 에디오피아로 해서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싶었는데 아내가 극구 말리고 국내의 어수선한 정국이 여행을 다니는 우리들의 발목을 잡는다.  우리가 한국 사람임을 알면 네 나라는 지금 난리도 아닌데 너희들은 왜 도망 나와 돌아다니느냐고 한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 비행기 표를 끊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오르는 것으로 여행을 마친다.                                    

                                                    

                                                                      

동유럽을 여행을 위해 다시 찾은 모스크바

                   

          


  마.  새로운 도전 아프리카로     



그리스에서 아프리카로 여행을 못하고 되돌아 와 아프리카로 여행을 꿈꾸며 검색을 하는데 트럭킹에 동행할 사람을 구한다고 한다.  젊은 사람인데 내가 나이를 좀 먹었는데 같이 가면 어떻겠느냐하니 상관없단다.     


그렇게 시작된 아프리카 여행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시작하여 탄자니아의 마사이 마을과, 응고릉고로, 세링케티, 킬리만자로, 바가모요를 지나 다르에스살람, 잔지바르, 말라위와 모잠비크의 여러 곳을 트럭을 타고 여행하였다.        


짐바브웨의 여러곳을 여행하다 세계 3대 폭포 중의 하나인 빅토리아 폭포를 여행하고 보츠와나와 나미비아의 나미비 사막을 지나고 정말 많은 곳을 여행하는 67일간의 일정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 도착하는 것으로 트럭킹을 마친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빅토리아 폭포

 


아프리카의 나미비 사막의 아름다운 모습



아프리카 여행을 시작한 지 77일 만에 트럭킹 여행이 끝나고 이제 홀로 남았다.  그냥      

한국으로 가기는 뭔가 좀 서운하다.  닷새를 케이프타운에 머물며 여러 사람들이 같이 하는 투어를 찾아보았는데 찾지를 못하고 혼자서 남아프리카의 로즈 가든을 달리는 버스를 타고 여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아프리카를 여행한 루트

                                 

버스는 내가 묵고 있는 숙소에서 다음 목적지의 숙소까지 데려다 주는 버스로 케이프타운에서 오하네스버그까지 운행하는 버스다.  그 버스를 이용하여 한 달 정도 혼자서 스텔렌보스, 모셀바이, 나이스나, 포트엘리자베스, 이스트 런던, 더반을 지나 요하네스버그까지 와서 비행기를 타고 홍콩을 지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떠오르는 태양과 아카시아 잎을 따 먹는 기린의 모습이 아름답다.

                     


아프리카에서의 여행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였고 혼자 케이프타운에서 요하네스버그로 오는 여행 중에 더반에서 3인조 강도를 만나 죽음의 문턱에 까지 갔었는데 다행히 깨어보니 큰 부상은 입지 않았고 여권과 카드 등은 빼앗기지 않아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바.  미지의 세계 알래스카 여행     


남미 여행을 할 때 딸이나 아들이 결혼을 한다고 할 때까지 여행을 계속한다고 했었는데 중간에 아들이 결혼을 한다고 해서 돌아왔고 정말 결혼을 했었다.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도 딸이 결혼을 한다면 일찍 들어갈까 그렇지 않으면 계속을 여행을 하겠다고 했었는데 강도 사고도 있었고 여행을 계속하기도 마음 상 어려워 귀국을 했는데 근무지를 한국으로 옮긴 딸의 결혼도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마땅한 사람이 있다고 하여 한번 만나 보라고 했더니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다며 소개시켜 주더니 어떻게 일사천리로 상견례를 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결혼식을 한다.     


남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고 둘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부모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결혼식을 치루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일을 치루고 서로 살고 있는 원룸들의 방이 빠지지 않고 또 갑자기 방을 얻기도 어려워 살림도 제대로 장만하지 못하고 있어 우리가 없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둘이 여행을 나가기로 한다.  



알래스카 빙하의 모습


                                           

일단은 중국을 거쳐 밴쿠버로 간다.  밴쿠버에서 며칠을 지내고 로키산맥 투어를 다녀오고 밴쿠버 섬의 나나이모에서 며칠을 다시 보내다 크루즈를 타고 알래스카로 향한다.  크루즈를 타고 지나는 알래스카는 정말 아름다웠다.  또한 크루즈 여행 나쁘지 않다.  7박 8일 동안 안락한 숙소가 제공되고 이동 수단이 되며 각종 편의 시설과 함께 무제한 제공되는 식당 등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환상의 여행이 아니던가?     


밤에는 이동을 하고 낮에는 항구에 정박하여 도시를 돌아보고 특산물을 구매하거나 음식을 맛보는 것도 크루즈 여행의 묘미라 할 것이다.  크루즈는 케치칸과 후나, 주노, 스캐그웨이에서 정박했다가 마지막에 도착한 곳이 스워드이다.     


스워드에서 앵커리지로 버스를 타고 왔다가 앵커리지에서 8일 간 차를 랜트해서 페어뱅커스로 갔다가 톡으로 해서 치킨을 지나 캐나다 국경까지 갔다가 다시 발데즈를 돌아보고 앵커리지로 다시 왔다가 호머를 둘러보고 앵커리지에서 시카고 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것으로 알래스카 여행을 마친다.    




알래스카 여행 루트.  해안선은 크루즈로, 육지는 렌트카로 여행하였다.

            



사.  인권, 역사와 음악을 찾아 떠나는 미국의 동 남부 여행     

앵커리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에 내린다.  시카고에는 처형 내외가 살고 계신다.  며칠을 시카고에서 지내다 아내는 처형 집에 있게 하고 나 홀로 여행을 떠난다.  아프리카 여행시의 트럭킹과 비슷한 여행 형태로 차와 숙소만을 제공해주는 여행 상품이다.  미국의 동 남부 지역을 도는 코스로 약 보름 동안 우리 돈 2백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오로지 차비와 숙박비의 비용이고 식사와 입장료 등은 모두 개인이 내야 된다.       


여행 시작은 뉴올리온스에서 시작되지만 나는 시카고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미조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며칠을 지내다 멤피스를 지나 뉴 올리온스에 도착하여 일행을 만나고 버밍엄, 조지아의 서배너, 사우스캘로나이너의 찰스턴, 애틀란타, 린츠버그를 지나 테네시의 네슈빌을 여행하고 멤피스로 갔다가 다시 뉴 올리온스를 여행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친다.                                                    



미 동남부 여행 루트

                                                                                                                         

                 

                    

  아.  꿈을 찾아 떠나는 캐나다 대륙의 기차 여행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출발한 여행은 알래스카를 여행하고 다시 미국의 동 남부를 돌아다니다 다시 캐나다의 대륙을 기차로 여행하기 위해 시카고에서 클리브랜드를 지나 캐나다의 나이아가라폴스에 여장을 풀고 여행을 계획해 본다.     


사흘을 나이아가라폴스에서 머물다 토론토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기차 여행을 시작한다.  일단은 토론토에서 캐나다의 동쪽인 퀘백으로 갔다가 다시 더 동쪽인 헬리팍스로 가서 다시 오타와를 지나 다시 토론토에서 위니펙으로 다시 북쪽인 파스로 간다.  위니펙에서 파스는 일주일 한번 기차가 운행된다.  파스에는 닷새를 머물며 우리가 타고 왔던 기차가 다시 내려올 때 타고 위니펙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캐나다의 대륙은 정말 넓어 기차가 다니는 길도 워낙 길다.  전부다 복선으로 깔지 못해 단선으로 달리다 어느 곳에 기차가 머물고 있다가 비켜주고 다시 출발하는 것이 반복되기에 연착이 잦고 속도도 느리다.  우리가 여행할 때는 곡물을 수확하는 시기라 화물차의 운행이 많아 열차가 무척 연착이 되기도 했었다.     


위니펙에서 제스퍼로 오는 기찻길은 환상적인 경치를 자랑한다.  제스퍼 또한 로키 산맥의 이름난 관광지로 수려한 경치와 함께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프린스 조지를 거쳐 프린스 루퍼스를 다녀온다.  프린스 루퍼스는 캐나다의 북서부 끝 미국 알래스카의 시작지점으로 제퍼스에서 로키 산맥을 지나는 철도로 제스퍼에서 프린스 루퍼스까지 계속 달리면 약 24시간이 안 걸리지만 밤에 통과하면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없어 중간의 프린스 조지에서 하룻밤을 자고 낮에만 운행을 한다고 한다.



캐나다 기차 전체 여행 루트


캐나다 동부 여행 루트


캐나다 중부 여행 루트


캐나다 서부 여행 루트


                                     

기차 여행을 하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기찻길은 없었던 것 같았다.  다시 제스퍼에서 밴쿠버로 오는 기찻길도 정말 아름다웠다.  캐나인을 포함 세계인들의 버킷 리스트 중의 으뜸이라는 캐나다의 육지 크루즈라는 비아레일의 기차 여행을 한달을 넘게 여행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로써 나는 2개월의 유레일패스로 유럽 곳곳을 기차로 여행한 이래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러시아 대륙을 횡단하였고 미국 대륙을 종단과 횡단하였으며 캐나다 대륙도 횡단, 종단을 하며 많은 여행을 하였다.     


지금은 코로나19의 위험으로 세계 여행은 떠나지 못하고 있지만 전에 다녀온 여행을 되새김하며 역마살 기운의 불씨를 살리고 가끔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하면서 불씨를 키워가고 있다.  다시 기회가 된다면 인도와 중동 등 가까운 곳을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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