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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영 Feb 20. 2020

"이런 책은 읽지 마세요."

어느 책 덕후의 지극히 주관적인 책 편식 법

최근 리디 셀렉트, 밀리의 서재 등 월정액 도서대여 서비스가 유행하면서 나를 비롯한 많은 책 덕후들은 (해당 회사들이 몰려있는) 강남을 향해 만세 만세 만만세를 불렀다.


망할 놈의 도서 정가제로 때문에, 혹은 두줄로 쌓고 위로 겹쳐 쌓아도 책상이고 방바닥이고 더 이상 책을 놓을 부동산이 없어 피눈물을 쏟으며 책을 고르고 골라서 사야 했던 북호더에게- 단돈 만원으로 수십, 수백 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책 서비스라니! 이보다 더 매력적인 게 어디 있으랴. 한겨울에 도토리로 가득 찬 고목나무 안을 들여다보는 다람쥐가 이런 기분일까 싶다. (하지만 구독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해서 매달 구입하는 책의 양이 줄어들지는 않더라.)


여하튼, 사흘에 한 권 꼴로 전투적인 독서를 하다 보니 이런저런 책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개중에서도 첫 문장만 읽고도 책을 덮고 싶게 만드는 힘(?)을 가진 책들이 꼭 있었다. 그리고 이런 책들은 대부분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책의 첫머리나 일부분만을 보고 책의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다. 그래서 몇 번이고 꾹 참고 읽어보려고 했었다. 특히 고전이라는 것들이나, 아마존 베스트셀러라는 것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몇 번이고 책을 덮고 다른 책으로 뇌를 씻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렇게 몇 권을 겨우겨우 읽고 나면, 책을 읽기 전보다 퇴화(?)하는 것을 느꼈다. 구독 서비스니 망정이지, 정가를 주고 샀으면 더욱 찝찝했을 것 같은 책에 굳이 시간까지 투자했다니. 그것은 마음의 양식이 아니라 마음의 그라목손이었다.


분명 조각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부분만 아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아래에 꼽은 저자들의 책이 전부 상종 못할 쓰레기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당신이 여성이거나, 유색인종이거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면 결코 편안하게, 혹은 즐겁게 읽을  없는 책일 확률이 높다는 뜻일 뿐이다.


그러니 이 점 유의해주길 바라고, 이하 내가 뽑아낸 "이런 책은 읽지 마세요"  TOP3를 발표해본다.



1. 백인 남성이 쓴 자기 계발서

백인 남성의 자기 계발서는 유난히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류의 메시지를 자주 전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서 인종/젠더면에서 명백한 우위에 있는 백인 남성에게 한정된 말일뿐이다. 동양인, 게다가 여성인 내 입장에서는, 마음만 먹는다고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내가 영국에서 일할 적에 요직에 앉은 남자는 거의 모두 백인 남성이었다. 딱 한 명, 유색인종인 여성 매니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다른 백인 남성 매니저보다 경력이 무려 7년이나 많았다. 심지어 그 여성 매니저는 국적이 영국인이었는데도 말이다! 비단 서양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하버드 졸업자인 유색인종 지원자는 탈락하고 고등학교만 졸업한 백인 남자가 동양 나라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고 있는 꼴을 보면, 솔직히 좀 허탈해진다. 그래 뭐, 피부색을 골라서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마냥 그들을 탓할 수는 없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났다면, 적어도 본인들이 가진 특권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사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정말로 순수하게 본인의 노력만으로 그 자리에 갔을 거라고 생각하는 나이브함이 너무도 꼴 보기 싫다. 그러니 백인 남성이 본인의 불행을 토로하며 노오오오력 따위를 외쳐봤자 유리천장도 경험 안 한 니가 뭘 알아 조랭이떡 같은 게라는 심정이 될 수밖에.  


물론, 이들의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먹히는 대상 독자가 있기는 하다. 첫째가 백인 남성이고, 두 번째가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둔 나라에 거주하는 남성들이다. 최근에 읽었던 백인 남성 저자의 자기 계발서 중,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내용은 이것이다. "이 세상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빚 진 게 없다. 그러니 그만 좀 징징대고 어른이 돼라."

아마도 이런 독설은, 위에 말한 남성 독자들의 놀라우리만치 비대한 자아를 잠재우는 대에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넷플릭스 <Bad Moms>


다른 말로는 여성, 그것도 유색인종 여성이라면 굳이 그런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 소파 깊숙이 파묻은 궁둥이를 일으켜 세우라고 해도 그 말대로 할 수가 없다. 내 궁둥이는 애초에 소파에 닿아본 적도 없으니까!


게으를 수 있는 것도 특권이고 권력이다. 뭇 남성들이 동의하든 말든 내 알바 아니고, 이 사회에서 여자가 게으른 것은 죄악이다. 꾸미는데 게으른 여자는 여자이길 포기했다는 말을 듣는다. 남의 감정을 살피는데 게으른 여자는 씨X년이다. 게으른 엄마는 맘충이고 게으른 딸은 쓸모가 없다. 게으른 여성이 일할 수 있고 설 수 있는 자리? 없는 좆 빠지도록 부지런해도 없는 자리가 있을 것 같은가? 이렇듯 여성이미 지나칠정도로 노력하고 있기에, 그런 중압감을 느껴보지 못한 저자가 쓴 책에 깊게 감명을 받기란 쉽지 않다.



2. 한국 남자가 쓴 문학 및 에세이

한국 남성 작가가 쓴 에세이는 특유의 노란 장판 감성, 루저 감성이 짙게 배어 있어서 읽기가 무척이나 괴롭다.

개인적으로 이들이 쓴 연애 에세이가 특히 가관이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내용이 나랑 섹스 안 해준 썅년에 대한  이야기거나 나랑 섹스해놓고 떠나간 썅년에 대한 이야기다. 거기에 첫사랑 이야기를 조금 더하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자신의 첫 자위나 몽정 이야기, 또는 자신과 노란 장판 위에서 섹스 한 그 여자가 결혼을 했더라는 이야기까지 하면 짠! 에세이 한 권 완성!

게다가 이들의 여성관은 정말 납작하기 그지없다. 그 여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했다면 왜 그 행동을 했는지 알려고도 안 한다. 그냥 여자는 신비의 미스터리어스 한 존재일 뿐이고 자신의 아련한 기억에 성녀 혹은 창녀로 남아있을 뿐이다.

다시 노란 장판 감성으로 돌아오자면,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의 가사가 그 감성을 매우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남성의 에세이는 어젯밤 마시다 남은 미지근한 싸구려 커피 캔 안에는 담배꽁초가 들어있고, 눅눅한 비닐장판에는 발바닥이 쩍 달라붙고 바퀴벌레 한마리쯤 슥 지나가도 신경을 안 쓰는 자신의 망한 인생을 토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또, 역시나 섹스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대충 내가 루저라서 여자들이 섹스를 안 해준다는 얘기 거나 내가 루저라서 여자와 섹스를 못한다는 얘기인데, 전자는 여자를 탓하지만 후자는 스스로를 탓한다. 어느 쪽이든 굳이 읽고 싶지 않은 내용이다. 거기다 굳이 뭘 그렇게 가르치시겠다고 일갈도 하고 비판도 하고 풍자도 한다. 그럼 역시나 그런 마음이 들고 마는 것이다. 니가 뭘 알아. 조랭이떡 같은 게.


xTvN <최신유행 프로그램_요즘것들 탐구생활>

또 스스로를 엄청난 루저라 자부하지만 그들의 책을 쭉 읽다 보면, 대부분 서울 중심부 출신에 인 서울 대학교를 졸업한 수재들이다. 약간 진짜... 어쩌라고 싶어 진다. 힙합분야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게 바로 그 아가리 갱스터라는 그건가?


더불어 한국 남성 작가의 문학은 왜 걸러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첨부된 사진으로 대체한다.

김훈 <언니의 폐경>


아는 등단 작가님의 말씀이, 남성 문인들에게 '자신의 인생'과 '여자'를 제외하고 글을 쓰라고 하면 그렇게 어려워한다고 한다. 난 제발 대한민국 남성 문인들이 영산강 어머니와 누이의 젖무덤 좀 그만 찾았으면 좋겠다. 자꾸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셨다는데 댁을 낳은 것도 기른 것도 어머니다. 댁의 아버지는 어머니 아랫도리에서 혼자 재미 본 것밖에 없다.



3. 일본 남성이 쓴 심리서


현재 출판되는 대부분의 '심리서'는 자기 계발 측면의 심리서와 심리/정신분석학 측면의 심리서로 나뉜다. 전자는 화술, 인간관계 등 사회적 심리를 다루고 후자는 말 그대로 정신분석이나 뇌과학으로써의 심리학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출 및 출판되고 인기를 얻는 심리서는 전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듯 하다.


일본의 심리서는, 작가의 성별에 상관없이 오컬트적인 면을 강조하는 느낌이 강하다. '긍정적 언어의 힘'을 강조하는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말에는 강력한 에너지가 깃들어 있고 그것이 우주에게 전달되어 카르마가 되어 돌아온다! 는 스케일이 되면 읽다가도 좀 당황스러워진다. 이 외에도 스피리츄얼 파워(영적 힘)이라던가 파워스톤이라던가, '기운'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는 일본 특유의 신토(神道) 문화, 즉 모든 사물에 신이 깃들어있다는 민속신앙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뭐... 이 정도는 문화적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솔직히 재미있기도 하고 :)


하지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좀 더 본격적인 심리서에 대한 내용이다.


일본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는 혼네(本音)-다테마에(建前) 문화가 있다. 한국도 분명히 상대의 KIBUN을 배려해서 속마음(혼네)을 숨기고 상대를 대하는(다테마에) 문화, 즉 '사회생활'이라고 부르는 문화가 있긴 하다. 다만 한국은 그것을 개인인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정도로 해석하는 반면 일본은 사회 전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때문에 일본의 심리서를 읽다 보면 정말 이 정도로 속마음을 감추고 산다고? 싶은 내용이 꽤 많아 괴리감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정신과 의사가 쓴 심리서에는 트리거를 당길 만큼 자극적인 환자의 이야기가 많아서 읽기가 괴롭다. 아마 그 정도로 심각한 케이스가 아니면 병원을 찾지 않거나 못하도록 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그 정도로 심각한 케이스에 공감하고 있다면 역시 책을 찾아 읽으며 자가치료를 행하기보단 병원 방문을 권하고 싶다.


게다가 일본은 여전히 가부장적인 문화가 강하기 때문에 '가족'의 문제를 대부분 어머니 한 사람에게서만 찾는다. (애비는 어디 가고?!) 모성애를 중시하는 것에 비해 어머니, 또는 여성의 심리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다는 걸 종종 느낀다. 그래도 여성 저자의 책은 차라리 낫다. 적어도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는 인정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경우는 결국 여성이 겪는 심리적 문제를 '여성 특유의 무언가'로 퉁친다. 여자력(女子力)이라는 단어가 있을 만큼 "여성은 (획일적인 방향으로) 여성스러워야 한다"는 압박도 심하고, 그것이 저자의 문체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경우가 많아 솔직히 페미니스트 여성의 입장에서는 읽기가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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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이 리스트를 SNS에 썼을 때는, 반쯤 재미로 쓴 것이라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누군가는 묻는다. 그럼 자신이 좋아하는 ㅇㅇ작가, XX작가는 무슨 죄냐고.


솔직히... 내가 알게 뭔가. 그렇게 좋으면 가서 영업 글이라도 찌던가, 그게 훨씬 독자 유입에 도움이 될 텐데 왜 나한테 와서 난리야?  (솔직히 그런 질문 한 사람 중에 진짜 그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도, 책을 읽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편견이 있다)


그리고 물론, 당연히, 나도 그동안 읽고 큰 감명을 받은 책 중에 남성 작가가 쓴 책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남성 작가의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너무 큰 모험으로 느껴진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 든다. 이 다음장을 넘기면 소수자 혐오적인 표현이 나올까 봐, 이다음 챕터에는 페미니즘을 희화할까 봐, 막상 다 읽고 났더니 여성인 나로서는 전혀 적용할 수 없는 내용일까 봐. 혹은 그냥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의 저자가 성폭행범이거나 가정폭력범일까 봐! (나도 안다! 나 피곤하게 사는 거!) 겨우 책 한 권 읽는데도 이렇게 많은 산을 넘어야 한다니, 너무 귀찮지 않은가. 그것도 내 돈, 내 시간을 들여서 말이다.


다행히도 이미 시장에는 그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매달 수백, 수천 권이 쏟아져 나온다. 많은 여성작가들의 책이 그러하고, 인종 또는 문화적 다양성을 가진 작가들이 그렇다. 어차피 우리가 가진 (책을 살 수 있는) 돈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도 한정되어 있다면 내가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작가의 책을 읽고 그를 응원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책을 편식한다고 비난받기에는,

이미 그런 글로 이루어진 세상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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