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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Nov 06. 2023

내가 가장 평안할 때(4) 적의 사회1

적의를 건강한 정의로 바꾸는 힘은 무엇일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 8장 7절 b)


성경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익히 들어 아는 유명한 말씀이다. 간음하는 현장에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붙들려 온 여인, 그녀는 수치와 부끄러움뿐 아니라 바로 현장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위기에 해 있었다.  시대는 여자를 온전한 인간으로 계수하지 않았기에, 한낱 죄로 더럽혀진 여자는 정의의 이름으로 가볍게 율법의 처분에 맡겨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기묘한 연막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사회였고 종교지도자들은 정치, 경제에도 관여할 수 있는 유대인들의 지도자요, 기득권층이었다. 중세시대 한때는 종교가 정치까지 장악했던 교황의 제왕적 권세가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그런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라는 존재는 자신들의 삶의 기반과 명예 심지어 생계까지 위협할 수 있는 존재였다. 당시 존경받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는 여인을 미행해서 현장에 잡아낸 이 전후 상황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집요하고 치졸하며 살의가 가득한가에 대해서 말이다.


즉 정의라는 명분 이면에 '적의'를 가득 깔고 있는, 인간 내면의 참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정적들의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 정의와 적의를 분리하기 위해서 미움받을 용기를 내서 그들의 본성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아래는 해당 성경말씀을 그대로 발췌해 본다.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장 1절~11절)



사회 정의라는 명분으로 한 여자를 개 잡듯이 길바닥에 내던져서, 자기보다 훌륭한 예수라는 존재를 제거하려는 음모. 인간 내면의 끔찍하고 잔혹한 진면목을 드러내는 계획. 그러나 이런 참혹한 인간의 이중성과 위선은 비단 2000년 전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만의 문제일까?






적의(敵意)란 사전적 정의를 인용하면 '적대하는 마음' 또는 '해치려는 마음'라고 한다. 나는 이것을 대상을 적(敵)으로 규정하고 지목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감정과 마음들이라 말하고 싶다. '적' 나아가 '원수'라  지칭되는 대상들에 대해서 우리 인간 내면에 일어나는 감정들을 떠올려 보라. 미움, 원망, 분노, 복수, 혈기, 다툼, 정죄, 판단, 살기, 시기, 질투 등 다양하다.


인간은 타인의 에러(죄, 허물, 오류, 실수 등)에 아주 성능 좋은 센서를 장착한 영악한 존재들이다. 반면에 나 자신의 에러에 대해서는 그 센서의 성능이 떨어질 뿐 아니라 고장 난 허술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 자신의 에러 중 그 심각성을 놓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적의'이다. 적의 곧 누군가를 미워하고 복수하고 척을 져야 한다 기조는 우리 인간 본성에 너무도 자연스럽다. 적의는 인간 내면에 있는 탐욕, 인정욕, 인기욕, 명예욕, 질투와 경쟁, 자존심, 돈욕심 등 온갖 본성에서 양분을 먹고 자란다. 그리고 자주 법, 개혁, 정의, 종교, 정치, OO운동, 발전, 정화 등 바르다 못해 뚝뚝 부러질 것 같은 '자칭' 정답들로 가면을 쓰기도 한다. 인간의 적의가 이 아름다운 단어들과 합쳐질 때, 세상은 처참할 정도로 맹목적으로 잔인해진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등은 그 극악한 사례 중 하나이다. 


적의와 그럴듯한 명분이 합쳐질 때 그것을 통제할 도구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적의를 통제할 최후의 보루가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이며 나의 양심인데, 아름다운 명분은 나 자신도 속이기 때문이다. 즉 나 스스로도 내가 옳게 행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심지어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한다. 나의 가려진 탐욕과 일그러진 감정들은 이제 저 수면 밑바닥에 은닉되며 나는 정의의 사도로 둔갑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도 기만하여 속일 수도 있다는 대목은, 인간이 온갖 탐욕을 포함한 죄들을 끝내 회개하지 않고 야금야금 몰래 음미한 것 아니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것에 대한 하늘의 징계일지도 모른다.


로마서 1장 28절-29절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혹자는 로마서 1장의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를 깊이 반성(회개)할 기회를 살아서 박탈 당한 자들, 그래서 살아서 이미 심판이 확정된 사람들의 얘기라고 말한다.  


또한 이 적의는 개인인 나의 내면에서 벗어나면 희한한 사회 메커니즘과 현상 속에서 사람들을 농락하고 세상을 왜곡시킨다. 한쪽에서는 본성대로 <적의>를 소비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 <적의>을 생산한 댓가로 이득 즉 돈, 자리, 명예, 인기, 저작료, 광고수입료 등등을 취하는 그들만의 공생 세계. 우리 인간 내면에 적의의 본성은 사실 관성적이고 편하고 자연스럽다. 그래서 인간들은 다른 사람과 화해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포용하며 자비심을 가지라는 말들은 부담스러워 한다. 이런 덕성들은 고작 교양을 치장하는데만 주로 쓰고 싶어한다. 그리고 실제 삶에서는 누군가를 험담하고 깎아내리고, 허물을 들추고 약점을 비판하며, 편을 가르고 척을 지는 등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희열과 시원함을 느낀다. 그래서 그간 도덕과 양심, 체면과 교양 때문에 억누른 악한 감정들은, 누군가 명분이란 이름으로 멍석을 깔아주어  배설할 정당한 기회를 줄때 쾌재를 부른다. 호재를 만난듯 득달같이 욕설을 담은 악플을 달고 비난을 쏟아낸다. 익명성일때 적극성은 더욱 배가 된다.


그 사이 우리의 인간성은 더 추락하고, 인간관계는 엉망이 되며, 무엇보다 나의 내면의 질서가 깨져 삶의 평화가 깨진다. 동시에 그 덕에 명성을 얻고 돈을 고 직책을 얻는 사람들은 저 위에서 만면의 미소를 띤다. '인간들은 참 다루기가 쉬워'하면서 말이다.  삶의 주권과 감정의 주도권을 착취 당했는데도 우리는 인식하지 못 한다. 우리가 적의로 치부하는 장사치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감정이 혹사 당하고 삶이 고갈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평안을 일상적으로 누리게 된 비결 중 하나로 <적의>라는 주제를 꺼낸 이유이다. 내 내면의 평안,  엄밀하게는 절대자의 은혜를 고갈시키는 것들이 무엇일까 돌아봤을 때 직면하게 되었다. 내 안에 상당히 많은 양의 적의가 누적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직면'이라기보다 정확하게는 '인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실 내가 느끼는 평안은 나의 신앙에 열매이지 궁극의 목적은 아니다. 빙산의 일각인 평안만을 도드라지게 말하는 이유는 종교가 없는 분들이 당장 갈증을 느끼는 소재를 중심으로 함께 고뇌하기 위해서이다. 그래 종교적, 신앙적인 도움이 체계적으로 필요하다면 종교가 있는 가까운 지인들의 도움을 받길 바래 본다.  글의 취지들에 대해선 그간의 저의 글과 댓글들을 참고해 주시길 양해를 구한다.


오늘은 먼저 나의 내면에 <적의 누적량>이 상당히 많다는 것과 우리 주변과 사회에 가득한 적의를 인식하는 정도에서 운을 떼 본다.


적의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부화뇌동해서 평안을 잃어버리고 삶의 아름다음이 훼파 당한 현장을 목도해 보자. 더불어 나의 내면과 외부에 산재해 있는 적의들에 대해서는 이젠 미움받을 용기를 갖고 NO!를 외쳐 보자.

        



#2020년 크리스마스때 이성으로부터 고백을 받았는데, 이를 밀어내는 등 내 연애의 이상심리로 인한 고통과 절망을 토로하며 방향을 잡았던 큐티입니다.

참고로 천재는 이 큐티후 얼마 안돼 알게 되며, 저의 연애에 대한 이상심리의 고통에 대해서 상담해 주다가 친해지며 연인이 되었습니다. 거이 편집 없이 그때 썼던 큐티 그대로 공유드립니다.





[생생큐티] 2021년 1월 19일(화) 나의 아픔을 아시고 도와주시는 예수님(누가복음 7:1-17)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1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을 갖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를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서도 우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십니다. 그럼에도 독생자를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하늘 위에서 인간들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돕고자 하시는지 가르쳐 주시기 위한 시청각 자료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인간들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하고 실제적으로 도와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극명한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과 과부의 아들이 나옵니다. 두 사람 모두 기구한 인생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노예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 했습니다. 그런 종이 이제 겨우 인간 대접해 주는 주인을 만났는데,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런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이제 좀 살만하니 죽음이라니요. 한편 과부의 독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과부는 경제 독립하여 먹고 살기 어려운 계층이었습니다. 이 과부에게 아들은 인생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그만 아예 죽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과부는 사느니 죽는 것이 나을 것만 같습니다. 어찌 인생이 이렇게 야속하고 기구할 수 있을까요. 마치 하나님께서 이들의 인생에 눈을 감고 방치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애달픈 사연과 내면의 고통, 절규, 절망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각자 자기 몫의 고통은 본인이 당해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들의 고통에 대해서 그들 본인처럼 느끼고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기 때문이며, 느낄 뿐 아니라 사랑하기에 그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받으십니다. 누군가의 고통과 아픔을 아는 것과 사랑이 함께 할 때, 그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때론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됩니다. 누구도 나의 고통을 다 알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은 인간에서 실존적 고독과 소외, 좌절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하고 공감하실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 우리는 무엇이든 아뢸 수 있고 도움을 간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종의 병을 고치는 것이 너무 절실하고, 독자 아들을 살리는 것이 너무 절박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런 나의 절절함을 그 깊이와 넓이, 사연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십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연애와 결혼문제에 절망과 실패, 두려움이 많은 나의 고통을 생각합니다. 흔하디 흔한 이들이 독신주의자이고 비혼자이며 노처녀,노총각들입니다. 그 흔한 사람들 중에 익명의 하나가 되어 있는 나. 나의 고통은 너무도 쉽게 일반화가 되어 무딘 또는 흔한 고통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 나 자신이 내 지난 상처와 좌절, 아픔의 시간들을 일반화에 묻어 놓고 일부러 무디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아파하고 있고 절망하고 있으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그 밑바닥을 드러내기 싫은 만큼. 시시콜콜 말하기 싫을 만큼.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은 나의 고통을 일반화하여 치부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복중에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예수님께서 나를 더없이 사랑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저는 OO와의 문제로 또다시 좌절하고 절망하고 두려워하며 이내 그 고통과 아픔을 무디게 묻으며 아닌 척 일상으로 돌아가려 바빴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 고통에 직면하며 주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하였습니다. 백부장의 종이 그렇듯 독자를 잃은 과부가 그렇듯. 제가 저의 아픔들과 절망에 적어도 예수님께는 가장 진실하게 내면을 드러내며, 나의 간절한 소원이 타인들은 공감되지 않더라고 부르짖어 간구하기를 기도합니다. 독자 잃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누가복음 7장 1절~17절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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