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 소망으로 인도하는 섭리
샤워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벌거벗은 몸뚱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심지어 털 한 오라기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그동안의 삶과 현재를 연결시켜 주는 물건 중 과연 남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중략)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중략)
그럼에도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중략)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어야 할 때가 있음에도,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중략)
두 번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 생각하라 (중략)
ㅡ 책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ㅡ
인간이 의를 행했는데 고난이 온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공의와 보호하심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이토록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직장도 버리고 인간관계도 자기부인하고 심지어 나의 자존심과 자아도 꺾으며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왜 내 인생에 이리도 고통이 끊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마치 하나님이 나의 인내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로마시대 콜로세움의 관중석에 하늘 식구들을 모아놓고 ‘어디 잘 견디나 보자’ 테스트를 하는 것 같은 분통 터지는 모멸감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중략)
이런 육신적이고 욕심 사나운 인간들은 같은 인간도 도울 수 없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스스로 통제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절대자는 고통이라는 방법으로 우리를 의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신앙의 연륜이 많고 하나님을 독실하게 믿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도 더욱 성화되도록 경험하게 되는 고통입니다.
자범죄-자기가 의지적으로 짓는 죄-와 특정 죄의 징벌로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으로 소원을 바꾸어 주고자 주시는 고통은 우리로 인생의 모든 것에 잠시 멈춤(STOP)을 하게 합니다. 나의 실존에 대해서, 영원에 해서, 절대자인 신에 대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궁구하게 합니다. 이 고통이 이끌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닿으면 내 고통들이 해석이 되고 힘듦이 경감될 뿐 아니라 고통들을 감내할 힘을 얻습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소망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ㅡ 전문은 아래 큐티 발췌문 참고해 주세요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