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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Oct 26. 2023

내가 가장 평안할 때(3) 고통2

궁극적 소망으로 인도하는 섭리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가리켜 홀로코스트(Holocaust)라 한다. 아래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글중 일부이다. 인류가 전지구적으로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었던 고통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이 유대인 학살사건도 그들의 이스라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해석될 이야기들이 있지만 오늘은 이해되지 않는 고통의 예로 나누어 본다.


샤워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벌거벗은 몸뚱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심지어 털 한 오라기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그동안의 삶과 현재를 연결시켜 주는 물건 중 과연 남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중략)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중략)

그럼에도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중략)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어야 할 때가 있음에도,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중략)

두 번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 생각하라 (중략)

ㅡ  책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ㅡ


 

도대체 절대자(하나님)께서는 왜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는 고통들을 인간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일까?





나에게도 이와 관련해서 지독한 고통의 시간이 있었다. 애매하다 못해 억울할 수 있는 고통을 당할 때, 나는 내 영혼이 끊어질 것 같은 절망과 참혹함을 느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최종 죽은 사인은 심장파열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이 말할 수 없는 통증과 스트레스로 내적 고통을 겪을때 육신에서 심장이 견디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 심장 파열이다. 핍박과 억울한 모함, 육체의 찔림으로 십자가에서 죽어갈때 고통. 나는 그에 비할 순 없지만 이젠 조금이나마 알 것만 같다.    


질투. 예전에 통찰력이 있는 믿음의 선배들은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 말했다. '여자는 과반수 죄의 뿌리가 질투이며, 남자는 과반수 죄의 뿌리가 정욕이다'라고 말이다. 표면적으로 이유가 어떠하고 나열하는 동기가 어떠하든, 예리한 눈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두 가지 죄성에 수렴할 때가 많다고 말이다. 살아보니 놀랍게도 그랬다. 물론 과반수라는 것은 예외도 있다는 이야기니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는 금물이다.      


10년 전엔가 청년 봉사모임에서 조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조는 다른 조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부흥이 되고 있었다.  그 당시 다른 조는 참석인원이 5-6명인데, 우리 조는 8명~10명을 육박했다. 무엇보다 조원들이 조장인 나에 대한 신뢰와 단합 심지어 순종적 희생이 남달랐다. 게다가 이상하게 우리 조에는 잘 생긴 형제들도 많았다. 유독 말이다. 어떤 조장은 나보고 로비를 했냐고 농담을 했다. 근데 사실 조 배정은 거이 랜덤이었다. 그러나 나는 남자들 외모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스타일이었다. 어쩜 외모에 거이 휘둘리지 않는 희귀한 나의 성향 때문에 우연스럽게 그들이 내 조원이 되었나도 싶었다. 다른 조에서 소개해 달라 할 정도였으나 청년의 때에는 훈련받아야 한다며, 나는 인기 많은 그들에게 의자 나르고 짐 나르는 온갖 허드렛일을 시켰다.


그러던 가을 나의 생일을 몇 주 앞두고, 우리 조에서 가장 잘생긴 오빠가 조모임 때 말했다. 그는 해외에서 대학을 나왔고 외모 평가에 야박한 내가 보기에도 정말 연예인처럼 생겼었다. 물론 나는 그 오빠에게 이성적 관심은 전혀 없었다. 오빠가 내 생일날 손수 케이크를 만들어 오겠다는 것이었다. 그 오빠는 요리를 좀 하는데, 내가 조장으로서 1년 동안 너무 고생했다고 조원으로서의 배려였다.      


그즈음 같은 조에 그 오빠와 비슷한 연배의 신입 여자 조원이 있었다. 그 언니는 인간적으로 여러 고통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로 그녀는 직장일로 만난 유부남과 내연의 관계로 본처에게 고초를 당한 일이 있었다. 우리 모임에 왔을 당시엔 유부남과는 헤어진 듯했고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자살시도도 했던 것 같았다. 자신의 불륜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고민상담을 했던 터였다. 그리고 워낙 입이 무거운 나는 진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런 치명적인 문제는 조용히 탑리더에게 말하는 것이 관례인데, 그녀가 마음이 더 오픈되기까지는 비밀로 지켜주는 게 맞다 판단되었다.      


그런데 내 생일 1주일을 바로 앞두고 그 주 월요일에 사달이 났다. 언니가 모임이 끝나고 그날 저녁 나를 빼고 몇 명의 조원을 모아놓고 내가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며 울고불고했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황당했다. 조원중 가장 헌신적으로 돌보았고 따로 만나 사비로 밥도 사주었던 터였다. 그리고 내 천성에 누구를 해코지하고 일부러 상처 주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입히면 그를 피하지 대놓고 맞서지 않는 편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냥 한마디 단어인데 사실 상처될 말도 아니었다. 그것을 이상하게 뉘앙스를 꼬아서 심지어 내가 악의가 있었다는 듯이 말했고 심지어 거짓말로 살도 붙인 것이다. 우리가 친밀하니깐 직접 나에게 말해 오해를 풀면 간단할 문제이기도 했다.


동시에 한 가지 일이 또 떠올랐다. 몇 주 전 내가 언니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한 것이다. 그 모임은 밤 10시 이후에는 형제, 자매가 모임 밖에서 따로 만나지 말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그 언니는 모 형제와 그 규정을 여러 번 어기고 있었다. 나는 언니의 최근 상황을 알기도 하고 양쪽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 규정을 지키도록 권면했다. 그러나 언니는 반발했고 나는 그러면 이 사실을 탑리더십에 알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랬다. 언니는 이 얘기는 쏙 빼고 나의 사소한 말 한마디를 침소봉대한 것이다. 그리고 돌이켜 보건대, 언니가 나에게 케이크를 만들어 주겠다던 오빠에게 호감이 많았다는 사실도 말이다. 아차 싶었다. 그리고 언니가 내 문제를 가장 먼저 전화해서 불거지게 한 대상도 바로 그 오빠였다. 모임의 규정을 어긴 자신의 허물과 오빠에 대한 호감 그리고 그녀의 불륜 사실을 아는 유일한 한 사람, 나. 그녀에게 내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치부를 덮고 질투 어린 마음을 숨긴 채, 내 생일 불과 1주일도 안 남기고 조 모임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즈음 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 문제를 정의롭게 풀려면 그 언니의 그간의 모든 허물과 불륜사실까지 다 폭로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성경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한복음 10장 11절) 당시 조장인 나와 언니와 관계는 어떻게 보면 목자와 양의 관계였다. 세상에서는 불륜 그것도 내연녀는 질타를 받는다. 그러나 봉사모임에서는 그런 사람도 치유되고 살아날 수 있도록 도와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때 하나님 앞에서 죽을듯한 고통을 호소하며 눈물로 기도했다. 내가 살면서 이토록 억울함을 느끼는 사건이 처음이자 실은 지금까지도 마지막이다. 알코올중독 아버지 이후로 내 인생에는 유독 선량한 사람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기도하는데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분을 따르는 제자이다. 내가 함구하고 내 자아가 죽어지면 그 언니는 이 모임에 계속 나올 것이며 여기서 도움과 치유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 폭로하면 그녀는 이 모임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된다. 탑리더십에게만이라도 알릴까 싶었는데, 언니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억울함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나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그 순간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더 깊이 기도했다. 오히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나의 죄가 없는가를 돌아보았다. 그때 내 안에 명예욕, 인정욕이 보였다. 내가 워낙 나서기를 꺼려하고 모임에서도 이른바 자랑질도 거이 않는 사람인데, 나는 그런 겸비함조차도 나의 명예로 여겼던 것이다.(그래서 오히려 지금은 겸양을 가장하지 않도록 일부러 좀 자기 어필도 한다)  다른 조장들이 우리 조를 부러워하는 것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마치 절대자께서 나에게 도전하시는 것 같다. “네가 언니의 치부를 덮어주면 네가 이제까지 쌓아온 좋은 조장이라는 명예, 칭찬, 인정, 영적인 자존심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텐데 그럴 수 있겠니?”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억울하고 분노가 끓어올라도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준 제자의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해 가을 나는 언니의 치부를 하나도 드러내지 않았고, 대역 죄인인양 무조건 미안하다고만 했다. 조원들은 우리 조장을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라는 눈치였다. 조원들과 일일이 대화하면 그들은 금세 내 편으로 돌아올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실무를 도와주는 조원 1,2명 외는 아무하고도 일부러 통화하지 않았다. 파가 나뉘고 진흙탕 싸움이 벌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언니는 나중에는 다른 조의 친한 형제를 데리고 와서 한번 더 제대로 사과하라 종용했는데, 그때도 내가 잘못했다며  변명 한마디 안 하고 사과만 했다. 그 당시 나는 내 자아가 난도질 당하며 영혼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해 나는 조장을 더해도 되는데도, 그 모임의 조장 자리도 내려놓았다. 내가 없어져야 언니가 그 모임에서 날개를 돋은듯 지낼 것이며, 더 이상 모임에 잡음을 만들지도 그 오빠 때문에 나를 견제하려고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언니 때문에 나를 오해하게 된 여자 조원 한 명에게도 일절 아무 말 안 하고, 그녀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김밥을 사들고 가서 밥은 먹고 일하라며 독려만 하고 왔다. 그 시절 그녀는 가끔 밥도 못 먹고 아르바이트하며 고생하고 있었다. 후일 그녀는 좋은 전문 사역자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알았다. 자아가 죽는다는 것, 한알의 밀알이 썩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때 오로지 나의 의를 아실 절대자께서 언제가 이 모든 억울함을 다 갚아주실 것을 치열하게 간구하고 또 간구했다. 이 언니의 치부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오직 절대자의 일하심만을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입에 재갈을 물린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갈 하늘나라에서 뵙게 될 하나님을 깊이 묵상했다. 동시에 그간 나도 잘 인식하지 못 했던 나의 명예욕과 인정욕을 더 내려놓겠다며 회개에 집중했다.      



그 언니는 몇 년 후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모임을 떠났다. 그 언니가 대동해 나에게 사과를 한번 더 종용했던 다른 조 형제는 몇 년뒤 안타깝게도 남동생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그때 그도 그 모임을 떠났다. 그 당시 내 조원 중에서는 2명이나 전문 사역자가 나왔고 다른 친구들도 모임에 성숙하게 헌신하며 성장해 대부분 결혼했다. 얼마 전 그때 한 조원이 나의 생일이라며 10년이 지났는데도 카톡으로 케이크를 선물 주기도 했다. 물론 그 당시 조원들 모두 지금까지도 그 언니의 불륜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리고 놀라운 반전도 있었다. 나는 그 봉사모임을 나온뒤 바로 다른 부서 봉사모임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그전보다 100배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정말 좋은 사람들 속에서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게 되었다. 아마도 다른 봉사모임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그즈음 이직한 헤드헌터 업종에서 나도 알지 못했던 재능을 재발견하며 성과면에서도 좋은 퍼포먼스를 남기게 되었다. 몇주 전에는 삼성그룹 계열사 삼성OO 기업의 사장님 직속부서인 경영진단팀에서 내게 자문을 청하는 연락을 먼저 주었다. 그 기업은 내 원래 고객사도 아닌데도 말이다. 앞으로 종종 업계동향에 대해서 자문을 물어보겠다고 했고, 기회 닿으면 HR팀과도 연계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다른 대기업 고객사도 많고 지금은 일이 많으니 내년을 기약하자고만 했다.


절대자께서 나에게 지금과 같은 황송한 인간적인 은혜(세상 말로 복)를 주시기 전에 나를 시험하신 것도 같았다. 내 인생에서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양무리(사람) 먼저인지 세상 성공과 내 개인적인 명예가 먼저인지 말이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억울한 고통 아니 내가 함구하므로 나를 더 깊은 고통으로 스스로 밀어 넣은 일들 속에서. 나를 견디게 하시고 보호해 준 것은 절대자에 대한 신뢰와 나의 실존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적 곧 하늘소망을 더욱 붙든 것이었다. 이 고통이 그저 인간 대 인간의 애매하고 억울한 일로 해석되었다면 나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다. 아마 트라우마가 남아 지금까지 우울증을 앓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99% 타인의 불의 때문이라도, 1%의 나의 죄와 허물에 더욱 집중하며 회개하는 것. 또 절대자의 주권과 섭리, 갚아주심에 맡겼을 때, 그 일은 나에게 상처를 하나도 안 남기고 믿음의 훈장을 남겨 주었다. 더불어 절대자와 나는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성이 더욱 견고해졌다.





인생을 살다 보면, 내가 선의를 갖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들이닥치는 고통들이 있다. 제삼자가 보기에도 끔찍하게 억울해 보이고 울분을 자아내는 사건이나 사고 심지어 재해까지 다양하다. 이때에서야 진정으로 "신(God)은 살아계시는가? 신은 선하신가? 신은 그때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아니 신의 뜻이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를 되뇌며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를 찾으며 하소연을 토로하게 된다. 종교인뿐 아니라 이런 날은 종교가 없는 사람들까지 삶에서 배제했던 신을 떠올린다.


'도대체 전능하시다는 하나님께서는 왜 선량한 사람들이 악인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가? 그 억울하고 참혹한 일들을 막지 않고 허락하시는가?' 이것은 누구도 섣불리 답할 수 없고 실은 답해서도 안 된다. 그 의중을 다 해체하고 분해하려는 것은 마치 재래식 똥통속의 구더기가 자기의 지능과 경험에 기초해서, 인간과 인간들이 발을 딛고 있는 지구 나아가 우주를 헤아리는 시도보다 더 무모하고 황당하기 때문이다. 구더기가 인간을 알 수 있는 것은 2평도 안 되는 재래식 화장실 공간에서 몇분의 시간을 인간과 냄새 속에서 만나는 그 순간이 전부이며, 무엇보다 인간의 언어와 그들의 삶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늘 똥통 속에서 사는 구더기에게 세상은 똥안과 똥밖의 일차원적, 저차원적인 해석이 전부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이해할 수 없고 억울한 고통의 날에, 절대자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힌트를 성경에선 여러 곳 남겨 주었다. 아래는 내가 관련해서 최근에 한 큐티 내용 중 일부이다.


인간이 의를 행했는데 고난이 온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공의와 보호하심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이토록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직장도 버리고 인간관계도 자기부인하고 심지어 나의 자존심과 자아도 꺾으며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왜 내 인생에 이리도 고통이 끊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마치 하나님이 나의 인내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로마시대 콜로세움의 관중석에 하늘 식구들을 모아놓고 ‘어디 잘 견디나 보자’ 테스트를 하는 것 같은 분통 터지는 모멸감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중략)

이런 육신적이고 욕심 사나운 인간들은 같은 인간도 도울 수 없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스스로 통제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절대자는 고통이라는 방법으로 우리를 의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신앙의 연륜이 많고 하나님을 독실하게 믿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도 더욱 성화되도록 경험하게 되는 고통입니다.      

자범죄-자기가 의지적으로 짓는 죄-와 특정 죄의 징벌로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으로 소원을 바꾸어 주고자 주시는 고통은 우리로 인생의 모든 것에 잠시 멈춤(STOP)을 하게 합니다. 나의 실존에 대해서, 영원에 해서, 절대자인 신에 대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궁구하게 합니다. 이 고통이 이끌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닿으면 내 고통들이 해석이 되고 힘듦이 경감될 뿐 아니라 고통들을 감내할 힘을 얻습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소망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ㅡ 전문은 아래 큐티 발췌문 참고해 주세요 ㅡ   



인생엔 타인의 죄와 세상의 불의로 인한 고통이 가끔 찾아온다. 그때에라도 1%라도 있을 나의 죄를 먼저 깊이 반성(회개)하는 것이 먼저이다. 무엇보다 육신적인 세상이 아닌 초월적 세계 곧 절대자와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눈을 돌려야 할 때임을 감지해야 한다. 비단 종교가 아니라면 실존적으로라도 말이다. 그럴 때 애매한 고통들에 대해서 100% 완벽한 해석은 아닐지라도 그 고통을 감당할 힘과 소망을 덧입게 되고 나아가 풍성한 영육의 열매를 맺게 된다.  








# 아래는 불의한 사람이나 세상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묵상한 큐티입니다 




[생생큐티]2023년 10월 23일(월) 부활신앙, 천국소망을 위하여(시편 22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편 22:24)          


시편 22편 1절 a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 특히 다윗처럼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전폭적으로 맡긴 사람들은 삶이 어렵고 그래 때론 너무 고통스러워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을 아시며 도우실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좀 더 좋은 사람이라면, 이 땅에서 육신의 회복이나 육신의 복이 그다지 없더라도 하늘나라(천국)에서 갚아주시리라는 부활신앙-이 땅에서 죽으면 끝이 아니라 죽음 후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고, 구원받은 성도는 천국에서 주님을 만난다는 신앙으로 부활신앙은 죽음 후뿐 아니라 현재에도 유효한 현재적 믿음이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믿음의 경중을 굳이 따지자면 부활신앙까지 닿은 사람이라 보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데도, 종종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는 것은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분류를 더 상세하게 할 수 있으나 대략 떠오르는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a. 초신자 : 아직 믿음이 없고 성령의 거듭남이 없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경험되지 않아서     

b.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지 얼만 안 된 사람 :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거듭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권이 열립니다. 그럼에도 믿음이 이제 생긴 정도라 작은 사건, 작은 결핍이나 인간관계의 엉킴에서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답이 없으면 답답하고 불안하며 하나님의 부재로 느낍니다.      

c. 예수님을 믿고 오래 신앙생활 했으나 아직 기복신앙(이 땅에서 육신적인 복이나 문제 해결에 함몰되곤 하는) 잔재가 있는 사람 : 육신적으로 잘 풀리면 하나님을 경험하다 인간적인 고난이나 고통이 장기화되면 하니님의 부재를 느낍니다      

d. 예수님을 믿고 부활신앙(천국소망)과 나아가 순교신앙(예수님 믿는 신앙 때문에 핍박이나 고난, 죽음의 위협이 올지라도 불사하는 정금 같은 믿음)이 있는 사람 :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재를 잘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인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개인적인 고통의 지속, 세상의 부조리(예시.세레요한의 목베임 사건) 앞에서 잠시나마 인간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회의합니다.           


오늘 말씀은 위중 단연 <d>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저번 편에서 말한 아래 고난의 측면에서는 1번 내지는 3번에 해당될 듯합니다.   


1. 의를 위한 고난 ex. 순교, 핍박

2. 자기 죄 때문에 자초한 고난 ex. 징계, 벌, 심판(생전&사후)

3. 절대자(하나님)의 축복(은혜)을 장차 받을만한 깨끗한 그릇이 되도록 예방적으로 주는 고난

4. 절대자의 축복을 받고 더 교만해지고 타락해서 매(징계)로 맞는 고난             


그렇다면 다윗이 오늘 말씀 시편 22절 1절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다윗 개인의 믿음의 부족이나 인격의 미성숙에 기인하다기 보다는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조차 아무리 봐도 해석이 안 되는 고통, 애매한 고통에 대한 하소연입니다.


구약의 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 인정받는 독보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욥도 인간적인 재난과 고통 속에서 이 하나님의 부재를 느낍니다.      





인간이 의를 행했는데 고난이 온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공의와 보호하심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이토록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직장도 버리고 인간관계도 자기부인하고 심지어 나의 자존심과 자아도 꺾으며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왜 내 인생에 이리도 고통이 끊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마치 하나님이 나의 인내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로마시대 콜로세움의 관중석에 하늘 식구들을 모아놓고 ‘어디 잘 견디나 보자’ 테스트를 하는 것 같은 분통 터지는 모멸감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2절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믿음. 도대체 성도에게 믿음이란 무엇이며 그 믿음으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70~90년대 상당한 교회에서는 기복신앙을 선전했습니다. 선전했다가 맞을 것입니다. 기복신앙이란 이 땅에서 육신적인 복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가령 부귀영화, 자녀의 대학진학, 남편의 승진, 교세확장, 결혼 등등 우리의 욕심이 맞닿아 있는 것들이 대부분 다 포함됩니다. 너나없이 살기 힘들때 위로와 격려의 의미로 시작됐는지 모르나 부작용도 꽤 컸습니다.


그래서 개혁적이고 개념 있는 교회들은 이 시절 홍보된 기복신앙으로 균열이 생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찢어진 옷을 꿰매듯 기복신앙을 경계하며 본질로 돌아가도록 발버둥을 치며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도 그런 건강한 교회중  곳이고, 심지어 우리나라 공중파 뉴스에서도 교회들의 롤모델로 칭찬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초신자 곧 교회에 처음 나왔거나 가나안 성도(교회 안 나가지만 예수님을 믿는다 자부하는 사람들)들로서 성경말씀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이내 혼돈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종 아브라함에게 복을 자주 말씀 하셨고 성경 곳곳에서 복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복을 구하는 게 다 나쁘지 않다는 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기 바라는 복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며 주신 복의 핵심은 그에게 만사형통의 육신의 복을 준다가 핵심이 아닙니다. 그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복이란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 곧 죄와 사망권세의 문제에서 해방시켜 주는 복입니다. 신약에서 첫 페이지 마태복음 1장 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로 시작됩니다. 즉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그 조상이 아브라함임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 준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즉 아브라함을 통해 먼 훗날 다윗과 예수님까지 계보가 이어지는데, 이 계보가 갖는 복의 본질은 죄와 사망권세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다는 소식. 기독교에서는 이를 복된 소리(소식)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즉 성도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와 사망권세에서 구원받고 장차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망하며 우리의 본향 천국입성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100% 뼛속까지 이 땅에서 육신적인 복을 원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연스럽게 복음의 궁극적 종착역인 천국소망까지 닿기가 어렵습니다. 이 땅에서 100년밖에 못 산다고 해도, 그냥 죄를 지어도 이 100년 동안 잘 먹고 잘 사는 게 더 낫다는 것이 인간들의 고집스런 죄성입니다. 그런 자신들의 삶에 걸리적거리는 신의 존재 특히 절대자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그래서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 곤 합니다.           


이런 육신적이고 욕심 사나운 인간들은 같은 인간도 도울 수 없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스스로 통제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절대자는 고통이라는 방법으로 우리를 의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신앙의 연륜이 많고 하나님을 독실하게 믿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도 더욱 성화되도록 경험하게 되는 고통입니다.    


자범죄-자기가 의지적으로 짓는 죄-와 특정 죄의 징벌로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으로 소원을 바꾸어 주고자 주시는 고통은 우리로 인생의 모든 것에 잠시 멈춤(STOP)을 하게 합니다. 나의 실존에 대해서, 영원에 해서, 절대자인 신에 대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궁구하게 합니다. 이 고통이 이끌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닿으면  고통들이 해석이 되고 힘듦이 경감될 뿐 아니라 고통들을 감내할 힘을 얻습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소망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인생의 소소한 문제들과 고통 속에서 내가 집중하고 들어야 할 것이 시 복음이고 천국소망임을 생각합니다. 진국(조카 가명)의 사업실패와 폐업의 과정을 도우며, 돈을 여기저기 끌어 모으느라 4500만 원이 넘게 퍼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상당 부분을 제가 자청해서 감수하게 되었습니다. 집문제로 써야 할 목돈이 있어 모아둔 돈과 카드론 대출까지 정말 탈탈 털어 도와준 것입니다. 남들보다 많이 높은 연봉임에도 다시 빠듯해지는 나의 삶, 빠듯함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굴레가 숨이 턱턱 막히며 벗고 싶은 옷처럼 느껴질 때도 가끔 있습니다. 40세가 넘어서도 7남매뿐 아니라 9명의 조카들의 크고 작은 문제를 돌아보며 돕는 가운데 마음의 탈진이 올 것만도 같았습니다.      


내가 고통이나 고난을 적극적으로 감당하자는 마음임에도, 길어지는 아니 끊임없는 삶의 애로사항과 내 주변 사람들애환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통의 바다에 우리를 내던져 놓으신 하나님의 의중에 대해서 말입니다. 너무도 많이 들어 아는 해답임에도 순간순간 인적인 감정이 지나가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지금의 고난이 헛된 수고가 아님을 생각합니다. 이 고난이 나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육신적인 복에 함몰되지 않고, 저 위엣것 곧 나그네 된 이 땅의 삶을 마무리하고 갈 나의 원래 고향인 하늘나라를 더욱 절실히 갈망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인 제가 이 땅에서 늘 이 천국소망을 품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육신적으로 복을 받았다고 우쭐해져 기고만장하며 교만하거나 반대로 육신적인 결핍과 아픔이 많다고  주저 앉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서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로지 복음이라는 푯대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이끄는 종착역은 구원과 천국소망입니다. 제가 이를 기억하고 일상과 삶에서 소소하게 일어나는 문제, 먹고사는 생계의 수고를 감사하므로 늠름하게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사 하늘의 신령한 것들에 대한 분별력과 지혜를 때마다 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시편 2장 1절~ 21절)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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