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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Oct 18. 2023

내가 가장 평안할 때(2) 고통1

고통(고난)의 날, 침묵하는 신(God)

자기중심의 헤드폰을 빼고
가시(죄)의 얼음집에서 나오면




내 고통(고난)의 날에 침묵하는 신(God)     

인간들이 수천 년 동안 고뇌했던 난제 중에 하나일 것이다. 나도 이 문제로 수없이 묵상하고 한때는 방황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전히 다 알 순 없지만 고통이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신뢰는 나날이 깊어지고 있다.



10년 전엔가 셋째 형부가 고생하는 장모님(우리 어머니)을 위해 신혼 때 선물로 장만해 드렸던 아파트를 날렸었다. 셋째 형부는 노량진에서 강의하는 나름 일타강사였는데, 온라인 교육사업에 손을 댔다가 반사기를 당했던 것이다. 물론 그보다 한참 전부터, 나는 우리 집이 부유한 집안이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을 가장 경외하는 집안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일련의 사태가 어쩜 나의 기도응답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놀라울 정도로 거이 요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당시 시세로 5억은 넘었을 아파트를 날리고 1000만원 보증금에 월세 55만원 월세집으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고 그 주에 봉사모임에 갔는데, 어떤 분이 나를 보고 그러셨다. “오늘따라 신수가 훤하시네요. 무슨 좋은 일 있지요?” 바로 며칠 전 엄청난 고초를 겪었는데, 나의 얼굴빛이 평안하다 못해 해피해 보이기까지 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날 뻔했다. 그리고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늘 좋은 일이 많지요"


그때 실제로도 마음이 이상하게 평안했다. 남들은 멘탈이 나가 무너질 수 있는 엄청난 일을 겪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이사하느라 육체적인 피로감과 막막한 미래에 대한 인간적인 번민은 있었지만 내 깊은 영혼은 이상하게 안심이 되고 평안했다. 아마도 이 고난을 내가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가정이 절대자가 보시기에 더 성숙한 영원한 가치관을 갖기 위해서라면 잠시의 고통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오래전부터 소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10년이 지난 지금 은혜로 날렸던 집만큼의 주택을 분양받아 살고 있고 거기에 수배의 다른 것들도 채워졌다. 나는 늘 오늘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에, 이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돌아올 인간적인 복을 바랐던 것은 아니다. 육신적인 복보다 하늘소망을 더욱 붙들때 오히려 플러스 은혜가 채워지는 것에 자주 황송할 따름이다.


10년 전 사건뿐 아니라 나는 내 인생에 종종 고통이 찾아올 때면, 스스로 점검하는 항목이 또 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혹여 내가 동일한 고통에 있는 주변 사람들이나 저 멀리 세상 누군가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배제하고 살진 않았는지에 대해서다. 절대자가 인간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우리 머리로 절대 다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그중에는 타인의 고통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며 도와주는 사람으로 연단하는 의미도 있다. 즉 나를 어제보다 더욱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프리즘으로 내 고통의 문제를 해석하면 고통이 상당히 가벼워지고 억울함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운 죄송함이 밀려든다. 깊은 반성(회개)을 함과 동시에 이 고통을 통해 성장하고자 열의에 차게 된다. 물론 그럴 때도 고통이 육체는 힘들게 하지만 내 마음의 중심까지 헤집고 들어오지는 못 한다. 그래 고통 중에 있는데도 마음은 늘 평안한 신비로운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고통에 대해서, 나는 얼마 전 큐티를 하며 아래와 같이 고통의 속성 내지는 이유를 기록하였다.      


1. 의를 위한 고난 ex. 순교, 핍박
2. 자기 죄 때문에 자초한 고난 ex. 징계, 벌, 심판(생전&사후)
3. 절대자(하나님)의 축복(은혜)을 장차 받을만한 깨끗한 그릇이 되도록 예방적으로 주는 고난
4. 절대자의 축복을 받고 더 교만해지고 타락해서 매(징계)로 맞는 고난   

오늘 말씀은 굳이 좁혀 생각해 보자면 2번과 4번에 후자들에 해당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고통에 과도하게 함몰되거나 극감정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손가락의 가시처럼 우리의 온정신의 신경을 교란하고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것은 일체 할 수 없는, 전인격과 감정의 끈을 비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몰입과 함몰은 이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는 관심을 덜 들이거나 무관심하게 합니다. 때론 “너 보다 내가 더 아파”라며 타인의 고통에 아예 척을 지는 무자비함 마저 보입니다. 이런 자기 중심성은 나의 죄로 인해 타인이 고통받고 아파하는 것에 무디어지거나 심지어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지금 절대자(하나님)는 너 때문에 친구가 아프다며 내 꿀밤을 때리시는 건데, 나 홀로 꿀밤만 서러워 찡찡거리는 형국입니다. 죄 특히 교만이 인이 박힌 사람일수록 자기 중심성, 피해의식,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 극에 달합니다. 엽기 범죄자들이 그 극단의 예입니다.
   
ㅡ 전문은 아래 큐티 발췌문 참고해 주세요 ㅡ     


   

고통의 목적은 조금씩 색을 달리 할지라도 위 주요 네 가지만 놓고 보더라도, 고통은 가시(죄) 가운데 태어난 인간을 죽을 때까지 계속 따라다닐거라 예상할 수 있다. 고통은 인간에겐 숙명적인 난제인 것이다. 이 말은 인간에게 거룩과 성화를 원하시는 절대자가 우리를 깨끗한 그릇, 온전한 그릇이 되도록 늘 연단할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20대 때 기독교의  대학생선교단체에 오래 있었다. 그때 만난 멘토가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이 시대 대학생들이 병드는 것은 'easy going life(쉽고 편한 삶)‘를 최종 삶의 목적이요, 지향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고난이나 고통을 악으로만 규정할 때 인간의 삶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든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고통 속에서 성화되고 성숙되는 필연을 안고 태어났고 절대자는 그렇게 우리를 다듬어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피해야 할 것으로 특정하고 터부시 할때, 그때부터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석이 안 된다. 늘 억울하고 힘들어 죽겠다며 울부짖고 밖으로는 사람과 환경, 세상을 향해 온갖 피해의식을 퍼부으며 어둠의 늪으로 침잠되어 들어간다. 남 탓, 환경 탓, 나라 탓, 정치 탓, 교회 탓, 불교 탓. 탓탓탓 하다 끝난다. 물론 나를 둘러싼 세계에 고착화된 문제들은 교정하고 정화하고 개혁해야 하고 그런  일에 참여도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 역시 매일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잊을 때 인생이 꼬이고 힘들어진다.      


쉽고 편한 삶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지점부터가 인생의 치명적인 패착인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자는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고 편한 삶이 목적이 될 때, 인생의 고통이 감당이 안 되고 내면이 쉽게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내 인생에 다가오는 고통의 목적과 이유가 깨달아지고 해석될 때, 어떤 문제가 와도 평안한 내공이 쌓이게 된다. 물론 나도 아직은 서툴러서 매일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는 연습생 수준이다.

  

“고생하기 싫고 고난 감당하기 싫으면 무덤에 가면 된다”


그 시절 멘토가 주신 이 간단한 대명제는 냉철하지만 인생을 사는 고도의 지혜이다.


사람들은 평안을 얻으려고 사람과 온오프의 여러 모임들을 찾아다닌다. 기법과 책, 활동을 탐색하며 그래도 안 되면 마녀사냥하듯 '탓'을 돌릴 대상을 송곳처럼 타겟팅 한다. 물론 때론 그것이 잠시 도움을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틸틸과 미틸 남매가 찾았던 그 파랑새는 집 밖이 아니라 집안에 있었듯. 근본적인 평안을 길어 올리는 비결은 바로 나의 내면 안에 답이 있다. 우리는 실은 그 답을 어느정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다만 수고하고 고생하는 삶을 받아들이기가 거북하고 싫은 것이다.


그러니 이제 고난과 수고를 사랑하는 체질변화를 시작하면 된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한 단단한 기반과 중요한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패착(敗着) : 바둑에서, 그곳에 돌을 놓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판에서 지게 된 아주 나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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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고통의 날에 신(God)의 부재에 힘겨워하는 인간들의 고뇌에 대한 큐티이다. 이 난제는 다각도로 보아야 하지만 오늘은 본문 말씀을 기초로 '인간의 죄가 고통을 초래하는 관점'만을 좁혀서 묵상했다.






[생생큐티]2023년 10월 6일(금) 오직 너희 죄악이(이사야 59장)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사야 59:1-8)    

    



오늘 말씀은 오랜만에 주석을 인용하며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사야 59장 1~2절 말씀을 톰슨 2 주석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합니다.

59:1-2 이사야는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기 전에 58:3에서 있었던 백성들의 자가당착적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답변은 성도들의 고통과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능력 부족이나 사랑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에 위배되는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남은 문제인 나의 죄를 해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하고 끊임없는 기도와 응답을 통한 대화의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58:9)         



인간들의 오랜 고뇌와 투정 때론 통렬하다 못해 살기 어린 주제. "고통의 문제 앞에서 신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이 주제 하나만으로도 세상에 출간된 책만 창고 몇 개는 들어갈만한 양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교수, 철학자, 신학자, 성직자를 포함해서 이름 없는 민초들의 애달픈 호소와 심장이 찢어 파열될 것 같은 고뇌. 그 절절한 지성과 감성, 영성을 뭉뚱그려 절대자에게 항의한다면, 그분은 이 질문에 굉장한 서사와 묵직한 수식어가 잔뜩 붙은 장문을 기술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이 문제를 “누가 그것을 몰랐을까 봐 그러니?” 할 정도로 냉철하면서도 여지없는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 너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대변(대언)함을 생각컨대, 사랑의 하나님이 이 무슨 인정 없는 냉정하신 말씀입니까.      


인간들은 언제 구원과 구조를 요청합니까? 너무 고통이 극심하거나 진짜 죽을 것 같을 때 우리는 구원을 간구하고 누군가 인간에서 구조와 도움을 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긴급하고 고통스러운 때에 왜 하나님은 바로 도와주지 않는 걸까요? 아니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면 응답받는다고 하는데, 자주 내 기도와 간절함만은 매번 외면 당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의인이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해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간구에도 소돔과 고모라는 불심판을 받았고 노아에 믿음의 순종에도 그의 가족 외 다른 인류들은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세례 요한은 예수님도 ‘여자가 나은 사람 중 이만한 사람이 없다’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지만 억울하게 옥살이하고 심지어 음란한 여자의 계략으로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죄악 된 세상에서 의인의 고통이 꽤 많이 허용되고 때론 방관되는 것만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 응답이 지연되었거나 중보기도에 불구하고 세상의 죄악을 치료하거나 하나님의 대승적 관점, 때로는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있는 섭리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의인의 순교로 죄들이 강력히 박멸되는 역사가 그 예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경우를 빼고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죄를 물 먹듯이 짓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죄란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삶 및 관련된 전인격적인 모든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이를 양심 없이 산다고도 표현하는데 정확한 매칭은 아니나 연결고리는 있습니다. 세상사의 태반의 경우, 앞서 말한 선하고 의롭게 사는데도 고통의 문제가 여전한 경우보다는 과반수 이상이 인간들의 죄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즉 크게 고통과 고난을 나누자면 아래와 같이 생각되나 상세 분류는 더 있을 것입니다.

1. 의를 위한 고난 ex. 순교, 핍박

2. 자기 죄 때문에 자초한 고난 ex. 징계, 벌, 심판(생전&사후)


또 축복과 연관해서 보면,

3. 절대자(하나님)의 축복(은혜)을 장차 받을만한 깨끗한 그릇이 되도록 예방적으로 주는 고난

4. 절대자의 축복을 받고 더 교만해지고 타락해서 매(징계)로 맞는 고난       


오늘 말씀은 굳이 좁혀 생각해 보자면 2번과 4번에 후자들에 해당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고통에 과도하게 함몰되거나 극감정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손가락의 가시처럼 우리의 온정신의 신경을 교란시키고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것은 일체 할 수 없는, 전인격과 감정의 끈을 비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몰입과 함몰은 이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는 관심을 덜 들이거나 무관심하게 합니다. 때론 “너 보다 내가 더 아파”라며 타인의 고통에 아예 척을 지는 무자비함 마저 보입니다. 이런 자기 중심성은 나의 죄로 인해 타인이 고통받고 아파하는 것에 무디어지거나 심지어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지금 하나님은 너 때문에 친구가 아프다며 내 꿀밤을 때리시는 건데, 나 홀로 끌밤만 서러워 찡찡거리는 형국입니다. 죄 특히 교만이 인이 박힌 사람일수록 자기 중심성, 피해의식,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 극에 달합니다. 엽기 범죄자들이 그 극단의 예입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에 상당 부분은 거슬러 올라가면 내 죄가 단초가 된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이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아 절교상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죄라는 얼음집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그 자리에 그 얼음집 앞에 계시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가려 못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의 얼음집에 들어가 심지어 자기중심의 헤드폰을 착용하고 자기 목소리의 볼륨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것이 얼음벽에 막혀 하나님께 들리지 않습니디.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하나님이 을 해도 듣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들이 들어야 하는 것은 “나 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의 대형 헤드폰을 벗고 죄라는 무자비한 얼음집에 나오라”인데 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그들의 말을 외면하고 돕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들이 아예 폴리스 라인을 긋고 하나님 접근금지를 자초한 것입니다. 누가 봐도 답답한 노릇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사야가 탄식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그러니깐 백날 신이 없다느니 신이 무능하느니 신 타령하지 말라고, 나아가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이냐느니 신세타령도 하지 말라며 호통을 치는 것만 같습니다. 당장 자기 중심성과 죄에서 나오라고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잡으라고, 그 뒤에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인생의 여러 난제를 수습하고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해법을 들으라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인간은 세상의 이치와 진리, 순리를 감을 잡아 어느정도 알면서도 왜 어긋나게 살며 고통을 자초하는가 생각합니다. 절대자(하나님)에 대한 전문가가 적은 세상은 바다의 모래알만한 인간의 적은 지식으로 신의 존재 규명부터 그 성품이 성격파탄인지 무능인지까지 탁상공론합니다. 재래식 똥통 속의 구더기가 인간과 인간들이 사는 세계를 구더기의 지능과 지식으로 규명하려는 것보다 더 황당한 시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택하신 그의 종들을 메신저(소통창구)로 조금씩 하나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인간의 언어로 옮겨 놓았지만 절대자에 대해서 극히 적은 지식입니다.  그렇기에 내 인생의 고통과 난제를 해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신을 다 해체해서 납득이 간 뒤에 빅딜 하자는 태도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자신을 계시하는 정도만 우리가 조금 알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류가 갖고 있는 절대자에 대한 지식은 이 정도입니다. 그보다는 당장 집에 불난 우리의 위급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불을 끄고 수습하는 것입니다. 그 불을 낸 원인이요, 늘 불을 다시 낼 수 있는 화재원인 같은 내 죄를 먼저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그 죄들은 아주 사소한 것부터 사이코패스적인 것까지 다양합니다.     

 

저는 고통의 문제가 오면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것이 없는가?”를 먼저 돌아보는 것이 순서임을 깨닫습니다. 간혹 의인의 고난, 축복 전 예방적 고난이 있을 있지만. 태반이 후자의 고난이 많으므로 섣불리 자신을 의인 욥의 고난이나 사도바울의 순교자적 고난에 전치해 대입하는 것은, 하나님편에 때론 대략 민망하고 황당할 수 있습니다. 아니 욥도 자신을 의인이라 자칭하기보다 죄인이라 자인했고 사도 바울도 우리가 의롭게 평가하지만 정작 그는 그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 고백했습니다.      


내 인생에 풀리지 않는 난제, 고통의 날이 올 때. 제가 남 탓, 환경 탓 심지어 하나님탓 하기보다. “내 죄 탓이오, 내 모든 죄의 탓”임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한 묵상과 회개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제게 때마다 영적 분별력과 지혜를 덧입혀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CCM찬양_1. 우리 때문에  

          2.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feat.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장면 발췌


https://www.youtube.com/watch?v=qBEyACVVljg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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