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양동의 시장.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과 가정폭력으로, 우리 가족들을 자주 쓰러지게 했던 봉천동의 겨울을 접고 2막의 시대를 열었던 안양. 그 중심에 어김없이 관양시장이 떠오른다.
나는 재래시장이 좋다.그래 난 마음이 지치고 낙심될 때면 재래시장으로 바람 쐬러 나가곤 한다. 얼굴에 세월의 상흔이 역력하며 때론 지쳐 보이기까지 한 상인들. 그러나 가게문을 열고 손님을 맞을 때, 그분들에게선 활력 넘치는 생기를 본다. 이른 아침 문을 열고 늦은 저녁 문을 닫는 상인들의 매일의 일상에서 가끔은 고결한 향취마저 느껴진다.세상의 유흥과 손쉬운 스킬, 넘쳐나는 화술이 가득한 서울의 어느 도시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이름도 없이 채소집 아줌마, 정육점 아저씨로 불리지만 그분들에겐 단단한 어제와 오늘이 물씬 풍긴다.
그 관양시장이 2023년의 추석을 맞았다. 올해는 튀김, 전을 파는 가게들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진풍경이 흥미진진하다. 우리 집은 수년 전부터 명절때 전을 직접 부치지 않고 사서 먹는다. 전 부침을 주로 했던 넷째 언니가 몸이 약해진 것도 있고 그 사이 코로나를 거치며 간소화는 우리 모두의 매너이자 배려가 된듯 하다.
그간 관양시장에도 변화가 있었다. 10년전엔 한 두 개이던 반찬가게는 밀키트, 간편식의 부흥을 좇아 도로변 가게들까지 합치면 10개 가까이 늘어난 것 같다. 그중 4개가 밀키트 반찬가게다. 원래 명절에 대목을 맞는 전부침 가게는 두 군데였다. 그런데 올해는 4군데로 늘어났다. 버스 도로변에 몇 년 전에 신장 개업한 치킨집이 전 부치기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초입에 새로 생긴 프랜차이즈 반찬가게에서도 실시간 전부침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나는 한마터번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전을 이렇게 좋아했을까 싶을 정도로 각 가게마다 사람들이 최소 10명 이상씩 대기줄을 타고 있었다. 물론 최근 도전장을 내민 치킨집은 업종의 불분명성 때문인지 손님이 간헐적으로 있을 뿐 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치킨을 튀기던 주방 셰프로 보이는 청년이 나중에는 홍보를 맡은 듯 "전이요, 전" 하며 목청을 돋우는 안쓰러운 장면을 연출했다. 나는 어디서 전을 샀을까? 나는 치킨집 청년들의 발버둥이 안쓰러워서 거기서 25,000원어치 전을 샀다. 그런데 맛을 본 적이 없던 터라, 후에 내가 욕을 먹을까봐. 실은 중간께 원조 전부침 가게에 다시 들러 10명 대기줄을 타고 30,000원을 또 샀다. 우리 집에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싸준다는 명분으로 스스로를 애써 설득시키며.
채소집에 가서도 이놈의 오지랖은 가만 있질 못한다. 큰 언니가 골뱅이무침 재료만 요청했는데, 대목을 맞아 목청을 돋우는 상인들 모습에 눈이 정신을 못 차린다. 올해는 유난히 상인들의 청년 자녀들 내지는 청년 창업 상인들의 열정이 눈에 띄었다. 20대나 30대 초로 보이는 청년들의 재래시장 가게. 전에는 꽤 생소했는데 어느덧 익숙해지는 모습이다. 그들은 내 조카들과 비슷한 나이 또래다.
안양시 소재 관양시장 전경 (2021년 추석)
결국 큰언니가 요청하지도 않은 거봉 한 상자와 귤팩 4개를 사버렸다. 채소가게 가서도 청양고추와 미나리, 오이만 사면 되는데, 굳이 고사리와 도라지도 사고야 말았다. 명절 3대 나물에 시금치가 들어가야 하는데, 올해는 작은 묶음이 8000원이란다. 나의 인심에도 영 과소비 같아 시금치를 들었던 손은 내려놓았다.
맞다. 이 오지랖은 앞선 원조 전 부침 가게에서 더 활약을 했다. 전을 파는 반찬가게에 10명이 넘는 대기줄 옆으로 참기름, 두부 파는 가게가 있었다. 그 옆의 노점 채소가게는 장사 방해 안 되게 하라며 "우리 무시하지 마셔" 하는 동안. 이 가게는 옆 가게에 몰려드는 손님들을 부러운듯 난처했을 표정을 애써 숨기며, 내내 밝은 표정을 유지하려 했다. 인심은 단연 참기름, 두부 가게로 쏠렸다. 전 부침 대기줄에 있던 손님들이 전 부치는 시간이 오래 걸리자 그 참에 참기름 가게의 여러 식재료들에 눈길을 돌렸다. 그 사이 손두부가 꽤 여러 개 팔렸다. 나도 얼려져 있는 큰 통의 식혜와 묵을 사고야 말았다. 전을 살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양손으로 들고 있는 일명 장바구니 비닐봉다리 녀석들이 무거워 손가락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결국 짐을 양쪽으로 내려놓고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전을 샀다. 처음 계획보다 3배는 많아진 비닐봉다리들. 무거워 미치겠다 싶은 그 순간에, 이상하게 얼굴은 히쭉거리며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요즘 물가가 비싼데 이건 과하다 싶다가도 이내 손해 봐도 좋다며 통이 커진다. 내 등뒤로 울려 퍼지는 여전한 외침소리가 아득히 정겹다. 민족 대명절 추석, 경기도 안양시 관양동의 한 재래시장의 풍경은 분주하고 소란했지만 따뜻했다.
앞서 말했듯, 중학교 1학년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내가 고등학교 1학년때 봉천동에서 안양으로 이사 왔다. 우리가 살던 동네가 재개발 지구에 묶이면서 보상금이 나왔던 터이다. 이참에 넓은 집에서 살자며 내가 태어나서 계속 자란 17년의 세월이 묻어있는 고성 같은 집을 떠났다. 내 친할머니의 막내딸이자 나에겐 막내고모를 시집 보냈던 봉천동 집. 큰고모 재혼 후 방황하던 그녀의 맏아들을 살뜰히 품어준 것은 오히려 우리 집, 우리 엄마표 밥이었다. 그 큰오빠의 배다른 남동생이며 큰고모의 다른 친아들, 그는 늘 그의 어머니에게 쿠사리를 먹으며 자주 매 맞고 훌쩍였다. 초등학교 때도 중. 고등학교 때도. 그 배다른 남동생이 어쩜 자기 엄마보다 더 의지했을 사람도 사실 우리 어머니였다. 배다른 이 두 형제의 어머니는 몇 년 동안 암과 투병하다 6년 전엔가 돌아가셨다. 큰오빠는 독일에 살고 남동생은 홀로 남은 아버지와 산다. 그 두 형제의 아버지이며 내 큰고숙 역시 우리 어머니의 건강을 늘 끔찍히 챙긴다. 우리 7남매의 어머니이자 5남매 시댁의 맏며느리, 외할머니의 3남매 중 막내딸. 그 어머니는 우리 칠남매뿐 아니라 친척인 이들 두 형제에게 여전히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사진출처: 평생 가난한 사람을 찍었던 휴머니스트 최민식 사진작가 (tistory.com)
내 어머니는 참 바다와 같은 분이시다. 세상의 여러 고통과 신음이 그 바다로 흘러들어와 많이들 훌쩍이고 무너져 울었다. 세상이 방황할 때, 늘 그 자리에서 변함없는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자애로움으로 주변을 껴안으셨다. 어쩜 내가 초등학교를 지나 청소년기 또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집을 좋아하는 집순이가 된 유력한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 집은 대가족의 큰집이라 명절이 되면 사람들로 부쩍였다. 어머니는 전 부치고 요리하느라 쉴틈이 없었다. 그러나 친할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명절은 최대한 간소화 되었다. 이젠 언니들도 오래전에 모두 출가했고, 최근 몇 년 동안 어머니가 추간판 탈출증 수술, 뇌경색 시술, 심장 수술, 당뇨병 합병증으로 엄지발가락 절단 등 전에 없이 병원과 입원이 잦으면서 이젠 명절의 간소화는 모두의 매너가 되었다.
한때 어머니는 한 달 동안 전혀 움직이지 못해 내가 대변과 소변을 다 받아내야 했다. 뇌경색이 왔을 때, 내가 광속으로 어머니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초기 치료를 받았지만 왼쪽 다리에 마비가 와서 한동안 휠체어로 다녀야 했다. 그럼에도 또 그러나. 올해 80세가 넘으신 우리 어머니는 지금은 기적처럼 휠체어나 목발 없이 혼자 걷고 화장실도 혼자 다니신다. 모두의 염원과 정성어린 간병이 있었기도 하거니와. 어머니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과 무엇보다 자신 보다 주변 사람들을 더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어머니는 강하고 모성은 늘 신비롭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모든 직장인이 그러했듯. 나도 한동안 집에서 풀 재택으로 일했다. 하루 세끼 어머니를 챙기고 24시간 어머니를 간병하며 일하느라 주방 식탁에 나와서 밤 10시까지 일을 했다. 지난 몇 년간은 어머니의 여러 병들과 코로나로 시간이 전쟁처럼 지나간 것 같다. 이 기간 나도 사람인지라 심신이 지치고 무너지질만도 했고 예민하게 날카로워지기 쉬웠다. 특히 나같이 업무강도가 꽤 높은 직종에 종사하면 더욱. 그러나 그 기간 의외로 나는 굉장히 평정심을 잘 지켰다. 어머니가 밥을 잘 안 먹어 병원에서 위험을 경고 받은 몇 번을 빼고는 언성을 높이는 일도 거의 없었다. 직장일도 매해 전년보다 성과가 더 좋았다. 신앙으로 다져진 내면의 기초체력이 주효했다. 동시에 치열한 전쟁통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며, 조용히 세상을 받아내고 품어주고 재워주고 세워주셨던 내 어머니의 품. 나는 아주 조금이나마 그 어머니의 바다를 배우고 있나 보다.
진국이는 이번 추석 명절에도 외할머니댁을 찾았다. 자기 엄마 이상으로 의지하고 때로는 이모들, 삼촌들을 능가할 만큼 외할머니를 챙긴다. 올해도 외할머니는 진국이가 오면 용돈 준다며 추석 며칠 전부터 매일 오만원권 지폐를 만지작 거렸다. 내가 식사 잘하면 1주일에 3만원씩 용돈을 드린지 한참 되어 제법 용돈 지갑에 현금이 쌓여있다. 진국이 외할머니는 올해 5kg 증량하면 연말에 나로부터 상금도 받는다.
관양동 재래시장은 어쩜 우리 엄마의 얼굴이 아닐까. 내가 엄마를 존경하고 사랑하듯 어쩜 그녀를 닮은 관양동 재래시장은 내내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될 것 같다.
인생은 전쟁과 휴전을 반복한다. 때로 인생이 너무 힘들어 처절하게 지쳐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우리가 묵언으로 붙들고 있는 오늘의 생과 내일의 희망(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화려하거나 찬란하지 않아도 좋다. 오늘 일일 매상 몇만 원이 때론 내일의 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밀키트 :(손질된 재료와 양념,조리방법 등이 함께 포장되어 있어)집에서 간편하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제품.
**쿠사리 - 腐(くさ)り : 구박, 면박, 꾸중 흔히들 속어로 남을 구박하거나 면박을 주거나 핀잔을 줄 때, '쿠사리준다'라고 합니다.
#2019년 11월 중국발 코로나19 발병 이후 2년째 되던 해. 여전히 코로나 중인 연말에 마음이 지치고 무너지려 할 때마다 큐티를 했습니다. 아래는 신앙적으로 마음을 힐링시켜 주었던 큐티중 하나로 원문과 제목 그대로 공유합니다.
2021년 12월 20일(월) 우리가 꿈꾸는 그날(요엘 3:9-21)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 *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심이니라”(요엘 3:17,21)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어지는 우리들도 세상 민족이 일으키는 전쟁과 문제들에 열외 될 수 없습니다. 아니 가끔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 전쟁을 허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백성들에게 허용된 전쟁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임하도록 격려합니다. 9절 b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병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지어다" 평화의 시대를 살았듯. 그들에게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라고 합니다. 심지어 스스로 약한 자로 생각되는 자도 강하다 하며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도록 독려합니다. 그날은 전쟁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의 날입니다.
전쟁에 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음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왕이신데, 그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신들의 인생에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있다는 사실에서 말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지만 막상 치러내야 하는 전쟁들이 한없이 무겁고 힘들게만 느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보습과 낫을 쳐서 칼과 창을 만들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전쟁이 끝나면 그들에게는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승리가 전제되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이 진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피난처가 되시며 산성이 되십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산 시온에 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을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사에 불가피한 ‘전쟁’과 그것이 주는 유익을 생각합니다. 낫과 보습만으로 삶이 가능한 평온한 시절. 인간들은 흔히 하나님께 절실하지 않습니다. 그런 평화의 시대에도 하나님께 간절하다면 그는 참으로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이며, 영성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태반의 사람들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와 고통, 고난에 직면해서야 생각합니다. 나는 한갓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창조주요, 심판주와 절대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도 많고 내 자력으로 이 땅에서 호흡하고 사는 것 자체가 은혜이며 기적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매일 치러내는 삶의 전쟁도, 예기치 못 하게 튀어나오는 여러 문제들도. 잠깐은 불편하고 마음이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나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라" 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사랑하라" 결기 어린 용기로 문제를 대면할 순 없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삶이 주는 전쟁 같은 부침과 고난과 불편을 찡얼거리는 불평과 원망으로 대응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나를 일으켜 세워줄 또 나를 새롭게 각성케 해줄 보석 같은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말입니다.
한해를 치열하게 때론 황망한 문제들 속에서 쏜살같이 살아온 것 같습니다. 문제들과 씨름하고 그 문제를 해치우느라 제대로 책도 못 읽고 휴식다운 휴식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삶은 어떤 의미에서 휴식보다 전쟁에 더 가깝고 전쟁이 동반된 삶이 오히려 생명력을 동반함을 깨닫습니다.고난에 의미를 부여하고 적극적으로 임할 때, 그 고난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임재에 머물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능력 아래 살게 합니다. 제가 이를 기억하고 쉽고 편하게 살아서 좋은 한 해가 아니라. 크고 작은 문제와 부침이 있었지만 그래서 더 행복한 한 해였음을 토로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그 하나님께 2021년도 감사로 영광을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