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 클레어 Oct 05. 2023

내가 가장 평안할 때(1) 깊은 반성

자기주장의 시대에 나의 반성을 논하다

나는 1년 365일을 기준으로 보면 90~95% 이상 평안한듯 하다. 초등학교, 아버지 가정폭력 때를 제외하면 불면으로 뒤척여 잠 못 이룬 날은 내 인생에 3%도 안 되는 것 같다. 내 지난 브런치 글을 읽으면 알겠지만 과거에도 또 현재에도 나 역시 힘겨운 문제, 스트레스가 삶의 도처에 가득했다. 그래 나를 잘 아는 직장동료나 지인들도 가끔 궁금해한다. 평안의 진짜 비결이 무엇이냐고.    

  

내 평안의 비결은 무엇일까? 아주 간결하고 심플하다. 나는 절대자(하나님)에게 책망 듣는 시간이 가장 평안하고 안심이 된다. 기독교 용어로는 회개, 일반 용어로는 자아성찰이나 깊은 반성이라고 굳이 번역해 보자. 절대자의 책망이 내 귀에 들린다는 사실. 그 책망에 내 고집스러운 자아가 꺾이고 마음이 잘 굽혀질 때 안심이 된다. 내 잘못들이 분별이 되고 그것이 바로 나의 죄로 인정이 되고 회개할 때 카타르시스적 해갈을 맛본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가 고집 부리며 땡깡을 부리는 것보다 얼른 잘못을 인정하고 엄마 품에 안기는 것이 평안한 것처럼.       


세상은 점점 자기 소견(주장)에 옳은 대로 마음대로 하라고 종용한다.(사사기 17장 6절) 더 이상 참거나 인내하지 말고 자기 목소리를 높여 자기 권리를 주장하라고 종용한다. “네가 굳이 사과하지 말고 상대에게 사과를 먼저 요구하라”라고 역성을 내기까지 한다. 남편이 또 아내가,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직장동료, 친구나 친척, 동업자에 대해서. 가정의 고질적인 문제, 직장의 치부, 여러 조직과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하다 못해 지나가는 행인까지도. 내 눈에 보이는 족족 문제를 지적하고 까발리고 또 까발리며 주장하고 또 주장하라고 말이다. 네, 맞습니다. 이것도 꼭 필요합니다. 사회가 개혁되고 성장하려면 누군가 문제를 직면하고 도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성장통으로 세상은 많이 변혁되어 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개인의 삶도 또 세상도 여전히 소란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와 타자들의 고통은 끊임없고 사회갈등은 심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젠 세상은 서로 돕고 살자가 아니라 각자도생이 최선인 이상한 기조로까지 바뀌고 있다. 왜 전 세대보다 내 권리와 인권을 주장하고 관철을 많이 시켰는데도 우리는 평안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걸까? 심지어 살림은 더 팍팍해지는 것만 같다    


"먼저" 나 자신에 대한 자기 성찰과 반성이 선행되지 않아서가 아닐까. 성경에서는 이것을 눈에 티끌과 들보 비유로 적나라하게 돌직구를 날린다. 들보는 통상 크고 두꺼운 목재를 가리킨다. 이에 비해 티끌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크기이다. 내 눈에 들보와 같이 커다란 죄와 허물을 그대로 둔 채 다른 사람들의 작은 티끌 같은 문제들을 찾는데만 골몰하는 모습. 내 안구에 커다란 목재를 꽂은 채로 타인의 안구에 낀 티끌을 제대로 찾기란 아주 어렵다. 설사 기적적으로 티끌을 찾아낸들 내 눈의 시력은 그 사이 더 엉망이 되어 있을 것이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 (누가복음 6:42)     





세상을 변혁시키고 싶은가? 아니 내 가까운 남편, 아내, 자녀, 시댁, 처가, 친인척, 친구, 지인, 직장 동료나 상사들에게서 정 떨어지게 싫은 허물과 과오가 보여 이가 득득 갈리고 밤잠이 오지 않는가? 그것을 뜯어 고치고자 날마다 논쟁 배틀을 벌여 보고 그래서 드디어 이겨 보라. 나는 그때가 되면 과연 평안할까? 아니 그들의 말과 행동, 삶은 제대로 바뀔까.      


나의 과오를 먼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 그것은 나 자신부터 수용이 안 되는 법이다. 나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 우리는 자신의 과오와 치부를 은닉하며 타인과 세상에 대해서만 정의를 부르짖을 때 느낀다. 부끄러운 자괴감과 가식과 위선이 주는 존재의 가벼움, 그 불안감을 말이다.


그렇기에 세상과 그 누군가를 뜯어 고치고 강력하게 펀치를 날리고 싶다면, 먼저 내 마음 거울에 비친 떼구정물 가득한 나의 실체를 직면해야 된다. 그럴 때 나의 말에 힘이 실리고 타자들도 좀더 수용적으로 바뀔 수 있다.  


평안의 기본은 나의 가시(죄)에 직면하고 가시(죄)를 인정하고 먼저 교정하는데서 시작한다. 그 날마다의 자기 극기와 훈련, 회개가 나의 평안을 견고히 다져준다. 그것이 사회 개혁을 원하는 우리 모두의 기본기가 되어야 마땅하다.       


    


.

.

.

.

.

<내가 가장 평안할때>와 연관된 청년 클레어 글

자기 매몰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brunch.co.kr)

질투의 화신 (brunch.co.kr)

카프카의 < 변신 > (brunch.co.kr)

플라톤의 < 국가 > (brunch.co.kr)

우리가 꾸는 꿈 (brunch.co.kr)

오늘을 걷다 (brunch.co.kr)






# 주변에서 칭찬과 인정의 말을 많이 들을 때 도리어 나는 불안해 진다. 그때 하나님의 책망이 들리지 않고 나의 죄를 분별하지 못하며 또 죄에 무디어질까 봐서다. 또 겉모습만 치장하는 위선과 거짓이 덕지덕지 내 내면과 삶에 들러붙을까 봐서다.

오늘 말씀은 최근 세상적으로는 뭔가 잘 풀리고 칭찬과 인정을 받던 때에 했던 큐티이다. 인간은 자기 자리 곧 용서받은 죄인과 피조물의 자리를 지킬 때 가장 평안하고 또 안전함을 다시금 되새겼다.





[생생큐티] 2023929일(금) 주저앉지 말고 회복을 향하여(이사야 52)

1절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2절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징계로 당시 글로벌 강대국 바벨론의 전쟁 속국이 됩니다. 게다가 본국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치하에 있었고 일부 국민은 일본의 탄광이나 위안부등으로 전쟁 지배국에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야곱(이스라엘)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을 통틀어 이스라엘은 온세계 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입니다. 즉 선별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 이후 세상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소수민족을 선별해서 세상의 악에 저항해서 하나님의 의를 전파할 사명을 주기 위해서 선택한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땅을 약속받아 애굽(오늘날 이집트)에서 탈출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는 원주민이 있었고 그들과의 숱한 전쟁과 협정으로 지금의 중동지역 팔레스타인(옛이름은 가나안)에 그들만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를 이루는 3요소인 국민, 주권, 영토 모두를 지닌 제대로 된 나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가나안 토착 원주민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가나안 원주민이 섬겼던 풍요의 신을 이스라엘도 부적처럼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혹시 농사를 망치면 굶을 죽을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눈에 보이는 우상, 이방인들의 말에 의하면 풍요를 준다는 우상은 접근이 쉽고 그럴듯한 안전장치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즉 선별된 백성, 선민 이스라엘이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여 악의 편에 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버리고 다른 민족을 다시 선별하여 택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유명한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야’라는 말과 달리 그들을 고쳐 쓰시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한때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들이 부러워하고 닮아갔던 이방 백성들의 손에 몽둥이를 쥐어주어 이스라엘이 매를 맞게 허용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이방민족 바벨론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고 심지어 바벨론 국가에 끌려가 식모살이, 노예 등 하대란 하대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52장 1절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그들 내면의 씁쓸한 고통과 과거들을 만져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침략국의 포로요, 노예살이로 총명하던 옛날의 명석함은 없고 흐리멍텅한 눈과 무기력한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깨어나라고 그리고 힘을 내라고 하십니다.


이방의 포로로 험하고 때론 인생이 얼룩지고 더럽혀진 때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그들을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하며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께서 구별한 거룩한 백성이라고 호칭하십니다. 그리고 그 내면에 이젠 아름다운 옷을 입도록 권면합니다. 동시에 그들을 더럽히고 어지럽혔던 할례 받지 않는 이방인, 죄로 부정한 자들이 그들 근처엔 들어오지도 못할 것이라고 엄포하듯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배은망덕한 죄를 짓고 패가망신하며 망한 이스라엘. 이 이스라엘을 마치 처음 태어난 자식을 받듯 축복하시고 성결하게 구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만 그 공의는 언제나 그분의 사랑을 위한 도구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의로 징계하셨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사랑하셔서 회복시키기 위한 도구입니다.      


렘브란트의  작품 <돌아온 탕자>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바로 회개해야 함을 되새깁니다. 혹여 나의 완악한 고집과 무지로 죄에 대해 제때 회개하지 못해 결국 징계를 받고 잠시 인생에 심판의 회초리를 받을 때. 그때에라도 납작 엎드려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치 처음과 같이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이토록 심플한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의 길이 있는데도 인간들은 늘 잔머리를 씁니다. 왜 인간들은 죄를 지으면 회개하면 되는데, 자꾸 이것을 거부하고 미룰까요? 교만과 욕심, 자존심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처음과 같이 회복되기는 어렵다는 불신과 두려움, 절망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의 인생에 대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이 주는 불신입니다. 사단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며, 창세 이래 가장 악랄하나 인간들에게 아주 잘 먹히는 교활한 사단의 계략입니다.      


우리는 최소한 죄짓고 회개할 기회가 있을 때 그 회개의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검게 그으르고 붉게 찌들었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에 의지해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변화시켜 주십니다. 죄로 인해 엉클어진 인간관계, 재정(돈), 사건과 사고 등 우리 인생의 여러 막혔던 문제들을 풀어 주십니다. 제가 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고 작은 죄들에서 하나님의 회복과 은혜를 신뢰하며 날마다 신속하게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꾸는 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