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 나는 또한 공통점이 있다. 소개팅, 미팅, 중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심지어 어렸을 때는 생각했다, 중매나 소개팅 등은 외모와 조건 등을 먼저 따져보고 서로를 대놓고 셀링 하는 거대한 영업조직 같다고 말이다. 나이 들어, 생각이 조금 자라면서는 이런 극단의 혐오가 다듬어지긴 했다. 우리 부모님 세대 중에는 얼굴도 안 보고 중매로 결혼했지만 잉꼬부부로 백년해로하시는 어르신들도 계시다. 소개팅으로 만나 결혼해서 웬수를 입에 달고 살지만, 늘그막에 등 긁어주는 소담스러운 관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상상을 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고졸이라면, 고아라면, 불치의 병에 걸렸다면, 파산해서 가진 재산을 다 잃는다면,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전과자가 되었다면, 그때도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그래도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을 하면 좋겠다. 아니 사랑을 해야겠다는 상상을 자주 했다. 내가 연애에 과도하게 신중해진 이유이고, 매번 진짜 오래 사귀는 연애로 이어지지 못했던 이유 같다. 만나 보지도 않고 고사하거나 몇 번 만나고는 뒷걸음질 치게 하는 이유 말이다.
나를 잘 아는, 우리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때 이런 말을 몇 번 했다.
"고아나 장애우랑 결혼하면 고생이다"
"엄마 그것도 그릇이 큰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저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못 돼요"
어머니는 나의 이상적인 연애관, 결혼관에 대해서 간파를 하셨던 것 같다. 그때 '사'자 들어가는 남자들은 절대 안 만난다 생각했던 것까지도. 의사, 변호사, 교수 등 전문직 종사자들은 이상 성격자와 변태가 많다는 뜬소문에, 그런 하드코어도 나는 감당이 안 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천재와 내가 연인이 될지는 정말 까마득히 몰랐다. 따로 기술하겠지만 그는 내 남자친구가 되기 어려운 많은 요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 하나가 의사라는 직업이다.
TV 브라운관을 가득 채운 연예인, 유명인들. 간혹 그들의 연애사를 보면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다. "저는 마음을 잘 훔칩니다. 제가 작심만 하면 누구든 유혹하고 사귈 수 있어요" 나와 신체구조와 심상, 자라온 환경이 다른 어떤 이성의 마음을 잘 훔칠 수 있는 것이 자랑이요, 실력으로 자부되는 세상. 그리고 설어린 청소년이나 청년 아니 중년의 짝꿍이 있는 부부들까지도. 은연중 이런 실력이 없어 내가 지금 싱글이지, 이 웬수를 참고 사는 거지. 분에 어린 속상함과 억울함, 열등감을 묻고 또 묻어 놓는 게 아닐까.
그러나 나는 진짜 연애의 고수는. 다수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카사노바나 양귀비, 클레오파트라가 아니라. 내가 오래 기다려 선택한 사랑을 담고 가꾸고 지켜낼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깊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훔치는데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은, 실은 마음을 또 사랑을 지키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두려운 아이이다. 내 마음의 됨됨이가, 나의 인격, 조건이 때론 나를 둘러싼 환경에. 그가 나를 못 견뎌 차 낼까 봐, 카드 B라는 연명줄에 매여 세상을 부유하는 두려운 허세꾼들. 물론, 진짜 연애의 고수는 나랑 잘 맞고 내가 감당할만한 품성과 색깔의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는 전제는 기본이다.
이솝우화 episode2. 독수리를 부러워한 개구리
연못가의 개구리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개구리는 우연히 독수리를 만나 자신의 숨겨둔 소원을 말했습니다. 독수리는 개구리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 하면서 한 가지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나의 발을 입으로 꼭 붙들고 있으되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입을 벌려서는 안 돼."
개구리는 독수리의 도움으로 마침내 하늘을 날게 되었고 멋진 세상을 구경했습니다. 한편 하늘 밑에서는 다른 개구리들이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 개구리가 외쳤습니다.
"야, 누가 그런 놀라운 아이디어를 가르쳐 주었니?"
개구리는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했고, 참다못해 끝내 한 마디를 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바로 그 순간 개구리는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천클의 연애 초기의 일이었다. 따뜻한 햇살이 기분 좋았던 오후였다. 천재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말을 건넸다.
천재 : OO결혼정보회사에서 알바 좀 해달라고 메시지가 왔네. 상대 여자와 그냥 만나만 주면 돈을 주겠다는데. 이건 재밌는 알바지 않니?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OO결혼정보회사였다. 공공연하게 이런 방식으로 애달픈 청춘들을 기만했다는 것에 황당해 하다가, 이내 그 모든 독화살은 천재에서 떨어진다.
클레어 : 우씨! 너는 나랑 사귀면서 결혼정보회사로부터 계속 소개받아 온 거야?
천재 : 아니, 예전에 가입했던 건데. 내가 연애 중인 것을 모르니 연락을 준거야.
클레어 : 나 사귀는 사람 있다고 얘기를 해야지. 그 대목에서 여자친구에게 알바 나가볼까? 묻는 사람이 어디 있니?
천재 : 내가 그 돈 받겠다고 설마 그 자리에 나가겠니?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지
아르바이트의 댓가 일명 알바비는 대량 10만 원~20만 원 전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혼정보회사가 의사인 남자에게 매칭해 주는 여자이니 대략 외모나 조건은 괜찮을 테고, 재미 삼아 만나고 돈도 벌고. 얻어 건진다고 우연히 나간 자리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금상첨화고. 그래, 나는 남정네들의 계산법을 간파한 듯. 통 크게 얘기했다.
클레어 : 한번 나가보지? 그 세계가 어떤지 나도 궁금하네.
천재 : 싫어. 귀찮아. 그럴 마음도 없었어. 나갈 거면 너에게 이걸 왜 얘기했겠니?
클레어 : 그래도 기분 나빠. 결혼정보회사에 사귀는 사람 있다고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천재 : 내가 활동을 안 하니깐 계속 (서로) 연락이 없었던 거야.
클레어 : 그래도 나 기. 분. 나. 쁘. 다. 고!
나는 말을 통 크게 뱉어놓고는 순간 내가 너무 나갔나, 천재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눈치를 안 보는 것처럼 눈치를 봤다. 천재는 통제받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의 어머니는 최소한의 조언만 하고 무한 방임으로 그를 키우셨고 그래도 모범적으로 잘 자란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색이 바뀌어 가더니 험악한 얼굴로 묵직한 아이폰을 들었다. 그리곤, 결혼정보업체 사람이 남긴 카톡에 뭐라고 남기는 것 같았다.
천재 : 됐지? 나 사귀는 사람 있다고 했어.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 예전의 그 같았으면 화를 낼만도 한데, 그도 자기를 부단히 누르며 나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클레어 : 고마워. 나는 남자들이 근처도 못 하게 선을 확실히 긋는 거 알지?
천재 : 남자가 근방에오게는 했니? (이 말에 둘 다 웃고 만다)
우리는 화로 발그레져 갔던 얼굴을 가까스로 식히며, 평온한 일상을 급하게 추슬렀다. 천재가 나와의 연애에서 오래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 내가 그와의 연애에 안착해 가는 이유는. 그가 여자의 마음 특히 나의 마음을 좀 잘 읽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선망이 있고 다소간의 허영과 허세도 모두 있다. 앙증맞은 허세는 때론 귀엽지만 도를 넘으면 나와 상대에게 끔찍한 상처와 고통을 남긴다. 내 있는 모습 그대로, 내 성실한 나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도용해서 산다는 것은 범죄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결은 좀 다르지만 조금씩 그런 치졸한 마음이 있다. 이른바 후광효과는 그렇게 타인의 세계를 도용해서 나를 빛내려는 심리, 전략의 산물 중 하나다. 내 부모의 학벌과 재산, 내 연인이나 배우자의 외모나 직업 혹은 재력, 내 자녀의 성적과 성공, 우리 집안의 명사와 유명인들, 내가 나온 학교의 명성, 내가 다니는 회사의 인지도, 내가 몸 담고 있는 커뮤니티 사람들의 면면 등등. 물론 후광효과를 바라거나 누리는 것은 악이 아니다. 오히려 성실히 살아온 내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고, 때로는 천에 자연처럼 내 인생에 쏟아진 누려 마땅한 선물이기도 하다.
문제는 정당하고 성실한 때로는 자연스러운 대가가 아닌. 불나방처럼 후광효과에만 집착할 때이다. 그럴 때 개인은 병들고 기괴한 사회병리 현상으로까지 파급된다. 그리고 이런 타인명의 도용적 심리는 연애 나아가 결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흔히들 결혼은 최고의 인생역전이고 전략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마치 로또를 긁고 당첨 숫자를 맞춰 보듯, 고시공부해서 합격의 날을 기다리듯.
만약 내 남자 친구가 의사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가 아닌데 이런 말을 하면, 열등감의 소산이라 조롱할 테지만. 나는 이때다 싶어 펜을 들었다. 언젠가 세상과 맞짱 토론 해보고 싶었던 주제. 그래서 연재 제목에 일부러 <내 '의사' 남친의 이솝우화>라고 지칭한 것이다. 허영과 선망, 혐오, 호기심으로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를 이 시대 청춘들, 또 그들의 부모님과 무심했던 사람들까지도. 이 생각의 길을 걸어 봤으면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와 잘 맞는 사람일까? 이 사람이 내가 원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이 사람이 나에게 실망해서 언제가 떠나간다면? 연애 초기, 연인들은 달달하고 애틋하면서도. 출구전략이 없는 직진, 돌진이 혹여 따가운 생채기로 남을까 봐, 아련한 두려움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나 인생은 늘 공사 중이다. 공사가 언제 완공이 될지 모르는, 완공이라는 것이 가능은 한 것인지 의문인. 그렇기에 결론이 아니라 '과정'을 잘 살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생에서 성패와 결과물만이 중요한 가치라면, 그 태반을 이루고 있는 99% 과정의 시간들은 행복이 유보된 상태에서 소멸될 것이다. 마치 화장실 가다가 만 걸쩍지근한, 다 허가되지 않은 행복에 평생 목마르면서 말이다.
개구리가 독수리를 부러워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부러움은 본능이고 어쩌면 질투보단 상대를 존중하는 따스함에 가깝다. 또 질투인들 뭐가 문제인가, 나를 성장시키는 동력으로 삼는다면 질투는 약이 될 것이다. 나도 허다하게 부러웠고 쓰리게 질투했다. 남 모르게, 때론 스스로도 모르게.
문제는 내가 독수리처럼 살고 싶다고 독수리의 발을 잡아서 쉽고 오르려 하는 데 있다.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내게 날개가 있어야 한다, 지금 날개가 없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매일 한 계단씩, 성실히 고지를 향해 걸어 올라가야 한다. 먼 훗날 그 높은 곳에서 독수리와 조우해야 한다. 독수리는 그의 방식으로, 나는 내 방식으로 높은 곳에서 만나. 서로 달랐던 삶의 여정을 나누며 갑과 을이 아닌 너와 나로서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건강한 연애이며 고단하지만 값진 인생역전이다. 아니, 독수리가 약육강식의 고지가 아닌 평화로운 저지에 매료되어 저행 비행을 선택하며 더 행복하게 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큰 행복의 인생역전일 것이다.
※저희 짝꿍 천재(가칭)는 브런치 작가활동은 전혀 하지 않아요. 비슷한 필명'들'에 헷갈리지 마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