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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Nov 28. 2023

내가 가장 평안할 때(6) 적의사회2

착한 사람에게도 적의는 방해의 이름으로 불쑥불쑥 찾아온다

착한 사람들이 품고 있는 적의는,
역설적이게도 '나는 착하다'는
자기 착각에서 벗어날 때
점점 치유되고 진정한 성숙으로 나아간다.



지난주 평일 강남의 출근길 전철.


그날따라 30분 늦게 나왔더니 러시아워 시간대가 되었다. 사람들이 붐비며 앉을 자리가 없는 그때 전철에 들어서자 내 앞에 분홍빛 임산부석만 비어 있었다. 그날 나는 롱스커트에 부츠, 롱코트를 입었고 나이는 40대이지만 충분히 30대 임산부로 비춰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팔에는 회사 근처 오래된 옷수선 장인에게 맡기려고 제법 커다란 비지백을 들고 있었다. 순간 2초간 동공이 흔들렸지만, 만원 전철에서 결혼도 안한 처녀가 임산부인척 연기하며 뻔뻔하게 앉는건 아니다 싶어 그냥 서서 가자 했다.


그런데 그 찰나에 20대 반으로 보일듯한 남자가  핸드폰 게임을 하는 듯, 폰만 쳐다보며 거이 나를 밀치듯 임산부석 자리에 앉았. 그 순간 주위는 5초간 정적이 흘렀다. 승객들의 눈빛 레이저가 그 남자에게 몰렸고, 내 옆에 아주머니는 대놓고 계속 째려 보았고, 그 남자 바로 옆의 아주머니도 쳐다보다 민망해 하더니 보던 책으로 체념하듯 눈길을 피했다. 즉 나 말고도 모두가 합법적으로 그에게 적의를 느낀다는 것 곧 나의 적의가 멍석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 남자 바로 앞에 서있는 나야말로 무심히 있는게 호구 같은 상황이었다. 나도 대놓고 째려볼까 했으나 교양과 소심으로 눈길을 어정쩡하게 숨겼다. 대신 나의 소심한 적의는 사진 한 장의 증거물만을 몰래 남겼다.


나와 그는 앉은 자와 짐 들고 서서 가는 자로 그렇게 대여섯 정거장을 가고 있었나 보다.


나는 원래 사람 외모에 무디고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질색한다. 잘 생겼든 부족하든 말이다. 그런데 내 밑바닥의 속사람 즉 내 통제가 쉽지 않은 무의식 표층에서 적의가 올라왔다. 대놓고 적의를 발산하지 못한 나는, 보는 이 없는, 저 의식의 심연에서 그를 짓밟고 있었다.


'와, 사람들도 많은 만원 전철에서 멀쩡한 사람이 무슨 실례람. 키도 땅○○한 데다 족비 같이 생긴 이 남자. 정말 진이다. 휴... 이럴 줄 알았으면 앉을 걸 그랬나'


사실 나와 우리 가족들은 키가 모두 아담하다. 특히 어머니는 키가 아주 작기에 키나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발언은 무식하다 여길 정도다. 그런데 내 안에 잠시나마 적의가 들어오니 내가 그간 고수했던 아름다운 철학과 신념은 한순간에 금이 갔다. 이 생면부지의 남자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그를 탓하고 잠깐이지만 불쾌한 이유를 들이 붓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보여지는 외모였던 것이고 나는 아무에게도 들키않을, 내 의식 저편에서 함부로 그를 폄하하는 발언들을 허용했던 것이다.





적의라는 말에는 악의라는 어감이 따라다닌다. 그래서 적의는 왠지 마음보가 타고나게 못 뗀 사람들이 장착하고 다니는 필수템 같아 보인다.


그러나 세상을 잘 들여다 보면 적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 적의를 남 신경 쓸 것 없이 쌍권총처럼 대놓고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엄마 몰래 쉴 새 없이 달음질하게 하는 오락실의 게임 스위치처럼 께름칙 하고 부끄럽지만 놓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늘은 그중 후자 곧 적의를 드러나지 않게 품고 사는 소심한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 싶다. 이 사람들은 대개 내성적이고 착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드러내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착한 사람이 적의를 품고 산다고? 좀 의외지 않는가? 착함이란 온 세상을 다 품어 줄 것 같은 포용력의 대명사인데 말이다.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다. 겉사람은 포용력이 있고 그 자신도 포용력을 삶의 지표로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속사람은 스며 나오는 적의로 혼란과 자아불일치, 고통에 휘둘릴 수 다. 이른바 착한 사람이라 일컬어지고 아니 엄밀하게는 그렇게 일컬어지기 원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태반의 순해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순해 보이는 그들이 적의를 품게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나의 ‘착함’에 흠집을 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내 착함은 겨울동산의 완벽한 유리성벽처럼 견고해야 하는데, 어느 날 흠집 많고 꾸정물 많은 녀석이 내 인생에 등판해서 나의 옷을 꾸정물로 더럽히는 것이다. 내안에서부터, 자꾸 내가 완벽하게 착하지 않다고 한다. 명예로움과 인정, 착함이 주는 여러 베네핏에 위협을 받는다. 아니 착하다는 자기 위안을 흔든다.


우리는 모두 동화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를 안다. 너무 가난해서 성냥을 팔았던 소녀. 그러나 성냥을 사주는 이가 없어 자기가 팔던 성냥을 하나씩 다, 마지막 성냥개비가 그치고 숨이 멎는 아이.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인생을 이 동화의 주인공인 성냥팔이 소녀에 감정이입하며 자주 자기 연민에 허우적거린다.


'나 같이 착한 사람이 이런 사람들, 이런 곳에서 사무치게 홀대를 받고 살아왔어. 억울하고 원통하고 슬프다'


그러나 냉철하게 볼 때, 우리는 내 주변의 많은 성냥팔이 소녀들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냉정한 행인일 때도 많다. 누군가 임산부석에 면피하고 앉았을 때, 그 남자의 고단한 인생 또 고단한 하루를 5초만 시간 내어 들여다 보려 했다면, 그 하루의 적의는 이내 연민과 관심으로 바뀔 것이다.


사랑과 관심, 도움이 필요한 내 주변의 성냥팔이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런 사람들에게 절대자가 철퇴를 가하는 것이 우리 내면의 엉클어짐이 아닐까? 내 무관심으로 꺼트린 타인에 성냥의 불꽃이 얼마나 많으며, 내 적의가 그 꺼진 성냥개비 주인을 얼마나 소외시켰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착하다는 명패는 그저 나의 인정욕이라는 또 다른 탐욕의 산물일뿐, 나 자체의 지고지순한 성품이 아닐 수 있다. 그렇듯 인간은 다면적이고 입체적이며 자기도 자신을 헤아리기 어려운, 그야말로 죄성의 뿌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존재이다. 이를 알 때 타인들이 나를 착하다고 하는 말이 마냥 반가울 것만은 아니다. 심지어 자기 스스로 착하다 자칭하는 것은 착각의 중병일 수 있다. 적어도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때마다 그렇게 조언한다.





나는 누구보다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아왔다. 요즘도 내 가장 가까운 이는 자주 '진짜 착하다'를 연발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본래 착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착한 사람일 수 있다면, 그건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착하거나 인격적이라는데 공을 돌려야 한다. 내 덕이나 내가 명성을 얻어 마땅하지 않다는 이다.


착한 사람들의 적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왜곡되이 침잠된다. 우울증, 불면증, 피해의식, 원망, 남 탓, 환경 탓, 무기력증, 분노 등. 더 심각해지면 스스로를 헤치듯  자기비하, 모멸감, 자살충동 등으로도 심화된다.


그러나 내 인생에 악당의 등판은 진짜 나의 민낯을 드러내주는 절대자의 선물이다. 착한 사람이 미처 발견하기 힘든 속교만과 자기의가 대표적. 교만이란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모두를 일컫는다. 그 안에는 삶을 채우는 행함뿐 아니라 생각과 의지, 감정 모두를 아우른다. 절대자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다. 그러나 의외로 착하다 자칭하는 이들은 착하다는 '자기의' 때문에 절대자(하나님)를 만나기가 어렵다. 어떤 면에서 진짜 교만의 고수일 수 있다는 말이다. '착하다'는 칭찬이나 명성이 우상이 된 사람들은 초기 로마기독교로 치면 그 우상 때문에 절대자에 배교할 수도 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이 얼마나 독이 많은 사과인지 이 대목에서 절감하게 된다. 


나는 천재 만나기 전 모태솔로였고 내내 혼전순결주의자였다. 그러나 나는 혼전 순결을 결과적으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달리 보진 않았다.  성경은 마음에 음심만 품어도 간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무엇이 착한가. 나도 오가다 야한 영상을 우연히 보면 음심이 일어나고 생각과 상상으로 무슨 야한 시나오리인들 안 썼겠는가.


'나는 본래 착한 사람이 아니다'


이것이 자칭 착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 내면의 적의를 뽑을 수 있는 단초이다. 사람앞에서는 착할 수 있으나 절대자 앞에서 조차 착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착각이다. 착각을 벗어내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철저히 인정하는데는 세월이 더 많이 소요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자주 탕자와 형을 비교한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른 편에서 제대로 기술하겠다.


인간이 보기에 상당히 착한 사람도, 집에 알코올중독 가정폭력 아버지나 오랜 질병, 장애 가족 심지어 뉴스에 나오는 엽기적인 가족이나 타자들과 부대껴 살다보면 없던 적의도 생겨난다. 나의 말쑥하고 티 없는 인생에 오물을 뒤집어 쓰게 만들고 나의 완벽한 하루를 망친 그들. 그러나 적의는 거슬러 올라가면 인정하기 어렵지만 나의 죄성이 뿌리다.


그렇기에 주변 사람들 때문에 내 내면에 적의가 꽂힐 때, 나의 화를 돋구는 그 사람들의 고통을 들여다 보면 치유가 일어난다. 그들의 좌절, 소외, 절망, 결핍, 상처, 가난, 어그러진 그간의 인생역정 등. 그러면 내가 피해자라 여기는 고통보다 때론 그렇게 벼랑 끝에서 불가피하게 가해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고통이 더 커보인다. 그들은 가해자라 탓할 사람도 없는 스스로 무너지는 불쌍한 가해자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나병(예전엔 문둥병이라 지칭하던 병) 환자가 그 예이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가족에게 피해를 끼치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가해자로 지목되어 소외와 배척을 당해야 했던 사람 말이다.


착하다는 명성을 유지하고 싶은데, 나를 화나게 해서 평범한 짜증쟁이로 만드는 가족, 남편, 아내, 시어머니, 며느리, 직장 상사나 동료, 선생님, 제자, 친척, 이웃나아가 나를 둘러싼 모든 타자들. 그러나 이젠 크고 작은 적의가 들어올때, 그들이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단 몇 분만 간을 내서 생각해 보자. 내 적의가 금새 녹아내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신학자'생각하지 않는 게으름' 교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 봐준 부지런함 대한 절대자의 하늘 선물은 바로 마음의 치유, 자유일 것이다. 






서두에 말한 임산부석에 앉은 청년. 그의 대한 외모비하의 무의식적인 생각들을 돌이켜 보면, 평소 외모 비하하는 사람들을 혐오하고 저질이라 여겼던 내가 맞나 싶다. 길 가다 보면 행인들이 심코 고도 비만여성이나 대머리 남성을 비하하듯 묘한 표정을 짓고 갈때가 있다. 나는 그럴때면 그분들 뒷모습에서 남몰래 기도해 주었다. 행인들의 시선에 상처 받지 않토록 말이다. 또 장애가 있는 분이 보이면 도와주거나 잠시 기도하며 지나갔다. 그러나 임산부석의 청년이 잠깐 무례하고 이기적이었다고 순식간에 너그러움이 사라지는 나를 보며 그간의 내 모습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이 선택적 호의가 진짜 나의 민낯이고 나는 여전히 적의 누적량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얼마든지 표정, 손, 발 나아가 악의로 진화될 수 있는 위험한 시한폭탄 곧 죄성임도 절감했다. 


나는 그날 이 일을 묵상하며 마음 한켠에서 통곡의 기도가 나왔다.


'제가 아직도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인간입니다. 저의 가식과 위선을 용서해 주세요. 제가 착한 척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비참한 나의 내면을 때마다 새롭게 해주시고, 제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순전하고 정말 착한 사람이 되도록 제 안의 적의를 때마다 씻어 주세요'


착한 사람이라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절대자가 아닌 사람을 의식할 때가 많았는지. 내가 절대자(하나님)를 1인 관객으로 무대에 서있다고 생각했다면, 나는 과연 그 청년을 어떻게 바라봐마땅했을지.


물론 그날 전철 출구를 나올 무렵에는 이내 절대자를 의식하며 그를 불쌍히 여기자며 불편한 마음들을 금새 털어냈다. 나는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고 나에겐 선의와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음을 감사하면서 말이다. 동시에 내가 착함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환경적 혜택이 나았던 것일뿐 나도 얼마든지 악에 기울어질 수 있음을 생각했다.


적의를 마땅히 품게 만드는 이른바 내 인생의 방해꾼들. 그들은 나의 자기 발견을 위해서 절대자가 보내주신 하나님 나라의 성냥팔이 소녀들이다. 이젠 스스로 함몰되어 있던 착함의 자기 착각을 벗고 내 주변에 가득한 성냥팔이 소녀들을 환대하는 연습을 하자. 마음의 언어부터 생각, 눈빛, 말, 행동, 삶으로서 말이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장 40절)





.



*본편은 저번주에 '맡김'편과 동시에 써놓았는데, 오늘 글 올려드립니다 :)





#누군가를 도와주고 내가 재정적으로 빠듯해진 상황에서 남몰래 마음이 어려워지던 때에 마음의 방향을 얻었던 큐티입니다.

때론 선의를 갖고 인간이 보기에 착한 일을 하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하거나 내 삶에 부침이 생길 때, 처음의 착한 마음을 지키는 것도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절감했습니다.





[생생큐티] 2023년 11월 10일(금)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야보고서 1장)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2-8)


시험은 물론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성도들의 믿음이 성숙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바로 시험이다. 따라서 야고보는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면서 그 시험이 가져올 복에 대해 가르침 또는 암시해 준다. 그 복은 첫째, 덕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며 둘째, 실제로 믿음을 체험하는 것이며 셋째, 천국의 상급을 예비하는 것이다.

ㅡ 톰슨 주석 중 ㅡ



시험. 교회에 다니면 자주 듣게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감상 ‘시험’이라고 하면 피동적 입장에서 불가피하게 당한다는 느낌, 억울한 피해의식이 묻어 납니다. 야고보는 이 시험은 3절에서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로도 의역해서 풀어내고 있습니다. 시험의 본질적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것으로서, 시험이 인간들에게 버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것이 ‘믿음의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시련(試鍊 (試練))이란 말은 사전적 정의가 다양한데 저는 아래 정의가 와닿았습니다.

1. 겪기 어려운 단련이나 고비.

2. 의지나 사람됨을 시험하여 봄


시험과 시련이 순환구조처럼 의미를 주고받는 것만 같습니다. 믿음이 고비를 만났다, 믿음이 단련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고비를 만나고 단련된다고 하니 추상적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믿기 원하는 믿음의 근본 골격부터 구슬을 꿰야 합니다. 믿는다는 대상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성경과 성령으로 통해 믿기를 요청하는 각론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고 선하시다는 성품에 대한 기본 뼈대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창조하시고 그 인생의 주인이요 주권자로 섭리하신다는 것,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로는 예수님을 보내 인간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뜻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과 부활, 다시 오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주요한 뼈대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에 고비가 온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온다면 말입니다. 시험은 다양한 형태로 옵니다. 질병, 사고, 인간관계, 여러 상실과 결핍 등 다양합니다. 그런데 이 시험은 우리의 영혼과 마음, 정신, 육체, 삶에 꼭 수고와 고통을 주기 때문에 아프고 힘듭니다. 고통을 담담히 쉽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맞닥뜨릴 때 인간은 해결한다고 표현하기 보다 대부분 견딘다고 표현합니다. 고통은 약을 먹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태반의 경우는 당장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3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험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내 인생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이런 상실과 결핍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가’ 이 대목에 이르면 고통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심지어 하루 아침에 하나님께 척을 지게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시험은 이 대목을 의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네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도우심, 구원을 믿겠는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가를 테스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고비의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진짜 신뢰하고 믿는다는 것은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것 곧 인내의 질과 양에서 드러나곤 합니다. 믿음은 때론 어떤 일에 대한 강력한 신뢰일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크고 작은 시간의 차이 곧 내가 문제가 해결되기 원하는 때와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을 주시는 시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믿음은 항상 인내와 함께 합니다. 그래서 시험 곧 믿음의 시련을 만날 때 인내를 얻는 기회로 알며 인내해야 한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뜻이 밝히 이루어지는 그 지점까지, 나의 생각과 조급함과 욕심과 자아를 꺾고 잠잠히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4절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전해지려면 믿음의 경주를 잘 뛰고 결승선까지 잘 인내해야 한다. 이런 믿음은 또한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키는 것과 긴밀하게 상호 보완작용을 한다. 믿음을 인내로서 온전히 붙들 때, 우리의 인격이 온전히 성숙해지며 우리의 능력, 태도 심지어 세상살이의 여러 면면도 온전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올해 9월 조카 진국(가명)이를 재정적으로 4600만원 넘게 현금을 동원해서 도와주며 내가 빠듯해진 상황과 연말 넘고 넘어야 할 회사일들을 바라보며, 잠시 마음에 두려움과 부침이 밀려 들었습니다. 나는 힘들 때 기도와 말씀 외에 숨는 것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잠입니다. 어제 또 초저녁에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새벽 12시 조금 지나 일어나 얼얼해진 마음을 들여다 보고 음악을 듣고 기도하고 묵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여 토닥였습니다. 평소에 누구에게도 나의 힘듦을 잘 토로하지 않는 성격인지라, 나의 얼얼함은 하나님께 들고 나가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 앞에서, 지금껏 그랬듯 잘 인내하면 된다는 심플한 방향을 따뜻하게 받고 감사하며 위안이 되었습니다. 인내는 억지로 지어지는 억울한 짐이 아닙니다. 나의 믿음을 성장시키고 동반해서 인격과 삶의 여러 열매를 맺게 도와줍니다. 문제들을 인내하며 오늘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힘을 주실 것이고 계속해서 하늘로부터 놀라운 힘과 지혜를 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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