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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Dec 09. 2023

내가 가장 평안할 때(7) 분별력

저조차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feat. 박경리 작가 생전 인터뷰

내 작품은 과연
성냥 한 개비만큼의 값어치가 있었던가
뙤약볕에 밟히는 노변의 잡초,
그 씨앗 한 알만큼의 값어치가 있었던가.
불꽃이 생명이 있었던가
분류같이 쏟아지는
상업주의 문화현상에서
펜대만 움켜잡으면 무엇하나,
무거운 절 떠날 것 없이
가벼운 중 떠나면 될 것 아닌가.
자학적인 자기 부정과 멍에를 벗어던지고 싶은 강한 충동은 계속 나를 유혹했다.
ㅡ 박경리 작가 ㅡ



사리분별을 잘하는 사람.

세상을 살아갈 때, 그가 현자(賢者)인지 아님 적어도 현명한 사람인지를 판단할 때 유심히 보는 덕목이다.


사리분별을 잘하려는 사람들, 오프라인은 물론 온라인 초연결 시대에 이른바 현명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유투버들의 각종 평론 내지는 품평은 수를 헤아릴 수 없고, TV에 자주 노출되는 유명인들의 사견들은 피로감마저 든다. 너무들 현명하다. 조언이 숲을 이르고 대양을 이룬다. 이렇게 방대한 조언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들. 인쇄술의 발명, 매스미디어의 발전, SNS를 비롯해 신종 플랫폼의 출현은 이른바 조언의 진화를 도왔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는 그 조언을 토대로 또 다른 조언을 생산해 내고 있다. 정보의 접근성이 좋아지고 정보량이 많아졌다. 즉 인풋(input)이 많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조언은 전보다 더 현명해지고 있을까?


얼마 전 대하소설 <토지>를 썼던 박경리 작가의 생전 인터뷰를 보았다. 소음이 폭주하는 세상에서, 그가 발동하는 '분별력'은 따가웠지만 이내 마음에 해갈을 주었다. 작가는 중간중간 문학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써 '인류애'강조했다.


점점 돈이 중요한 잣대가 되어가는 시대. 문학의 토지에도 그런 염증과 유혹은 이내 다가온다. 파격적인 횡보와 달변, 동성애나 자유연애 등 눈에 띄는 특이성과 노이즈마케팅, 개인기, 언론플레이 등등. 어쩜 글 쓰는 작가에게도 더없이 세속적인 액세서리가 요청되는 시대가 아닐까. 평생 세속주의를 경계하며 옷깃을 여미듯 살아왔던 고. 박경리 작가의 생전의 일성(一聲), 그래 닿기 힘든 고산처럼 큰 울림이 된다.


사회자
문학을 지망하는 많은 청년들과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한이 많아서 그런지 정서도 각별하고 문학의 비중이 점차 사라져 가는, 작아지는 이 시대에 있어서 총체성으로서의 인식으로써의 문학, 문학을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해 주시죠.

박경리
문학이란 것은 물론 그리해서 생존도 하고 돈도 벌고 하는데, 시작서부터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이런다면 문학 안되지요. 뭔가 내부에서 절실하게 소망하는 거. 거기에서 출발하고 왜 사는가 삶 자체를 규명하고 탐구하는, 그게 아니고 생산되는 문학작품은 결국 오락기구지요. 그 오락도 필요는 합니다. 문학도 그런 오락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그러나 그게 문학의 본질이고 본류라고 하면 이건 세상 다된 거지요.  

[출처] 작가 박경리 선생님의 인터뷰 - 3부|작성자 흑룡     



몇 주 전 옷수선 가게에 갔었다.

말 그대로 옷을 고쳐 입으려고 간 것이다. 옷을 수선하려면 내내 문제점을 뚫어져라 살펴야 한다. 그래야 버릴 옷도 살려 입을 수 있다. 그런데 인간 세상도 그럴까. 그것이 무엇이든, 문제를 발견하면 이내 고쳐지고 새로워질 수 있을까.  


옷수선 가게에서 있었던 에세이는 길이 관계로 깡통 주식과 옷수선 (brunch.co.kr) 로 나눠 발행하오니 함께 살펴 주세요. 



쓰레기를 남기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안 죽는 것이다.
지독한 박테리아도 죽이는 약이 있는데, 비닐은 안 죽는다.
- 박경리 작가 생전 인터뷰 중 -




박경리 작가의 말처럼 죽지 않는 것이 가장 무섭다. 비닐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죽지 않는 자아  또 그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정화되지 않은 더러운 감정 오물 역시 무섭다.


문학을 향한 박경리 작가의 분별력은 분명 뜨끔하고 따가웠지만 이내 안심이 되고 따뜻했다. 인류애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이지 아닐까.  반면 옷수선 가게 사장님이 느꼈던, 분별력을 자칭했던 실버모임의 뒷담화 소리들이 소음 내지는 감정쓰레기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대작가의 숭고한 분별력은 후진을 각성시키고 살리는 도구가 되었지만, 한낱 사사로운 감정 배설에 악용된 분별력은 타인을 해치는 무기가 되곤 한다. 그리고 어그러진 분별력은 타인을 아프게 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할 뿐 아니라, 정작 화자 자신을 더 시끄럽 불행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며칠 전 브런치에서  다작이 작가님 글에서 느낀 분별력은 함박 미소를 짓게 했다. 글의 제목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한해 책 몇 권 읽었는지 세어보고, 글 몇 편을 는지 헤아리는 일이 쓸모없다 느껴진다 했다. 그런데 반전은 그렇게 분별하고 판단한 일을, 자신은 오늘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미에, "정말 쓸데없는 일, 의미 없는 일인데 말입니다. 왜 이러고 있는지 저조차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마무리했다. 문득 묘한 성찰과 깨달음, 인류애, 위트 마저 느껴져 입꼬리가 올라갔다. 돌이켜 보건대 이 말은 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이 되뇌는 탄식이요, 절규 중 하나가 아니던가.


오늘도 동네 노인정의 풍경이 그려진다. 최노인은 네댓 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귤을 까먹으며 흥분한다. 요전날 박노인이 아들 자랑질을 했다며 우회적으로 한참 흉보다가는 이내,  "참, 우리 손주 녀석 대학등록금 때문에 걱정이야. 이번에 서울에 S대 대에 들어갔잖아. 대학 좋으면 뭐 하노. 학숙비며 돈만 왕창 들어가고. 요즘 애들 키우기 참 힘들어" 한다. 아들에서 손주로 치환된 동어 반복. 본인만  모르고 모두가 알 때 그건 블랙코미디가 된다. 허나, 여기에 이렇게 양념을 치면 자신과 주변 모두를 즐겁게 하는 스윗한 교훈이  것이다.

(근데 나마저 자랑을 하고 말았네)
왜 이러고 있는지
저조차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분별력, 그것은 타인과 세상을 들여다보는 현미경으로, 타자들을 볼 때보다 수배의 엄중함으로 자신을 더욱 담금질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 화자가 스스로가 말한 그대로 사는지, 천태만상의 현미경으로 되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분별력엔 사랑, 인류애, 우정, 의리, 덕, 동료애 등을 담아야 한다. 그때 시끄럽고 소모적인 또 자아와 탐욕의 악취가 나는 분별력이 아닌 교훈과 자아성장, 사랑이 담긴 향기 나는 한편의 서사가 완성될 것이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7:2)







*박경리 작가 관련 추천 영상 : (16) [KBS 7080레전드] � 문학다큐멘터리 '토지' (1987/10/18) - YouTube



# 누군가의 조언을 받고 때론 나도 조언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자칫 조언이 상대를 더 덧나게 할 수 있다. 특히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에서 이런 실수와 과오가 반복된다. 오늘 말씀은 '좋은 조언'을 하기 위해 반면교사가 되는 말씀으로 최근 큐티했던 내용이다.





[생생큐티]2023년 11월 29일(수) 분별력의 독(욥기 15장)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3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4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5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6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     



데만 사람 엘리바스. 오늘 말씀에서 그가 하는 말들을 보면 이론적으로 대부분 맞습니다. 그의 지식은 구약성경에 어느 정도 정통합니다. 적어도 그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시대 곧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말이다. 특히 구약에는 나병(한센병)이나 혈루병부터 대부분의 인간의 고통과 재난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개인이 겪는 재난과 고난을 죄에 대한 인과응보의 결과로 보는 것은, 그 시대 관점으로 시의 적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구약의 욥이 살던 시대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일하는 방식에 정통했다고는 하나,  친구를 대하는 방식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절친한 친구가 모든 것을 잃고 이제 정말 자살하는 것이 맞다 여겨질 정도로 처참한 상황에서, 엘리바스의 성경에 정통한 지식은 한없이 예리한 칼날 같습니다.      


엘리바스를 비롯한 욥의 친구들은 초반 얼마간은 생업을 뒷전으로 하고 욥과 함께 지낼 만큼 우정이 돈독했던 사람들 같습니다. 또 욥의 인격과 그간의 행적을 비추어 보건대, 친구들에게도 잘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욥으로부터 영육의 도움을 톡톡히 받은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직접적인 도움은 아니라도, 당시 준 재벌급 부자였고 의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욥의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하루아침에 쫄딱 망한 욥을 대하는 엘리바스의 정답적인 발언, 그중에서도 욥의 죄를 정죄하는 대목이 매몰찹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위한다고 한 말인데, 결과적으로 유익이 안 된 이유는 왜 일까요? 엘리바스의 상황을 상상하건대, 그의 우정이 순수한 순도 100%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람은 아무리 성격이 좋고 죽고 못 사는 사이라도, 경쟁하고 질투하고 오해하고 열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부부간에도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경쟁하며, 형제자매 간에도 그럴진대 친구인들 어떠하겠습니까? 엘리바스의 의미 있는 성경지식과 영적인 이해가, 욥에게 약이 되지 못한 것은, 그의 마음과 동기에 우정 곧 사랑이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설사 욥이 정말 죄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것이라도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욥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욥의 죄에 대해서 제사장적 기도를 금식하며 했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선포했던 이사야, 호세야 등 많은 영적인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책망했지만 그 이상으로 자기 죄를 아파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비판하고 책망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때론 순교를 각오하고 가난하게 살며, 하나님의 명령에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며 대가지불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에게는 함께 회개하는 마음도 무엇보다 대가지불도 없습니다. 엘리바스는 진정으로 욥을 사랑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2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연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말씀을 기초로 엘리바스를 살펴보자면, 그의 지식이 구약 시대란 시간대가 갖는 한계에서는 바른 판단이었을지언정, 엘리바스는 사랑이 없거나 아주 부족한 것이 명백합니다. 그는 과거 자신보다 훌륭하고 잘 나갔던 절친한 욥의 패망 앞에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며 자기가 그보다 더 나음을 완력을 쓰듯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그간 속내는 욥이 쫄딱 망하길 바랐던 사람처럼, 저 무의식에서 '그럼 그렇지. 그(욥)가 하나님께 과도하게 복을 받았어. 그건 불공평해'라고 되뇌었던 말들에 응답받는 양. 그에 말에는 욥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욥기 말미에 이런 엘리바스를 책망합니다. 동시에 욥은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하고 처음보다 수배로 더큰 영육의 복을 받게 됩니다.


인간의 지식은 늘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영원의 시간을 거쳐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 적용에 있어서도 늘 한계가 있습니다. 가령 구약의 말씀을 신약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인데, 둘 다 옳다 우기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일 하심을 때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 분별받는다면, 제대로 따라갈 지혜를 얻게 됩니다. 혹여 지식의 한계로 틈이 생긴다 해도, 그 조차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에 대해서 그가 아는 지식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사랑이 있는 친구라면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욥아! 보통은 죄에 대한 징계로서 고난을 받는데, 욥 너의 경우는 나도 이해할 수가 없구나. 혹여 미처 발견 못한 죄가 있었는지 함께 금식기도하자. 나도 베옷을 입고 함께 금식할게’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대가지불을 합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비판과 정죄만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인간의 지식은 울리는 꽹과리 곧 소음입니다. 나아가 사랑이 없을 때 성경말씀도, 하나님의 뜻도 제대로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교만과 질투, 열등감, 우월감 등 온갖 죄가 틈을 타고 끼어듭니다. 이미 그 지식은 사사로운 감정과 탐욕으로 오염되고 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땐, 먼저 나의 죄를 비춰봐야 합니다.      






저는 내가 누군가에게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나눌 때, 메신저인 내가 오염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천만한가 돌아보게 됩니다.


신앙연차가 올라갈수록 죄를 분별하는 눈은 점점 밝아집니다. 자꾸 타인의 죄들이 눈에 속속 들어옵니다. 지적해주고 싶습니다. 다소 소심하고 매너 있는 나는 타인의 죄들들 적나라하게 직접 지적하거나 뒷담화하는 일은 적습니다. 그러나 20대 때는 속으로 끙끙 앓으며 미워하고 정죄하느라 속이 시끄러웠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깊이 맛보면서 저도 점점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젠 죄가 분별되더라도 우선은 그를 위해 기도해 주고, 왜 그 죄를 끊지 못하는지 이해하려 니다. 가끔은 사랑과 긍휼이 분별력과 함께 할 때, 쓴소리로 조언을 할 때조차 상대가 잘 수용하고 살아나는 역사도 목도하게 니다. 성경지식과 분별력을 '사랑 없이 휘두를 때' 상대를 벼랑 끝으로 밀어 버리는 인격살인, 종교전쟁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를 깨닫고 분별력이 늘 은혜와 사랑으로 덮여 있도록,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욥기 15:1-35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3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4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5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6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

7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8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9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10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11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12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13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

14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15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16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17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18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9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

20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21 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

22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이 숨어서 기다리느니라

23 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24 환난과 역경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

25 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26 그는 목을 세우고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드니

27 그의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

28 그는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주하였음이니라

29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땅에서 증식되지 못할 것이라

30 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으로 그가 불려가리라

31 그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지 아니할 것은 허무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32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즉 그의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33 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34 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35 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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