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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Dec 09. 2023

깡통 주식과 옷수선

옷을 고치려다 세상을 수선했습니다

앞서 발행한 내가 가장 평안할 때(7) 분별력 (brunch.co.kr) 에 기술한 예시를 별도 발행했습니다. 두 글을 아울러 보시면 좋습니다.



몇 주 전 옷수선 가게에 갔었다.


말 그대로 옷을 고쳐 입으려고 간 것이다. 옷을 수선하려면 내내 문제점을 뚫어져라 살펴야 한다. 그래야 버릴 옷도 살려 입을 수 있다. 그런데 인간 세상도 그럴까. 그것이 무엇이든, 문제를 발견하면 이내 고쳐지고 새로워질 수 있을까.


나의 짝꿍이 아끼던 카디건(cardigan)이 2벌 있었다. 그중 회색은 올초에, 자주색은 얼마 전 구멍이 난 것을 발견했다. 아주 고가는 아니지만 그의 어머니와 추억이 담긴 옷이었다. 족히 10년은 넘게 입었던 듯싶다. 그냥 버리기엔 아까웠다. 하지만 둘 다 구멍이 팔꿈치 부분이라, 수선이 아니라 재창조가 필요했다. 어설프게 동네 세탁소에 가지고 갔다가는, 디자인이 빈약해 빈축만 살 것 같았다. 세상엔 아니 고치느니 못한 일들이 많은데, 흡사 그런 애꿎은 일 중 하나가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회사 근처, 강남 부근에 솜씨 좋은 옷수선 집을 수소문했다. 강남은 집값만 명성이 자자한 게 아니라 온갖 분야의 장인 내지는 달인들의 집결소이기도 하다. 아니 그들의 궁궐이다.


몇 주 전 검색을 해서 드디어 30~40년 된 명품 옷수선집을 찾아냈다. 다행히 우리 회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의 거리였다. 부담 없이 사전에 연락하고 갔다. 인터넷 검색에서 봤던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가게는 아주 협소했고 외진 곳에 있었다. 주택가 다가구 오피스텔의 2층, 외부에 간판도 없었고 2층에 가정집인양 소규모 1인 벤처인양 다소 초라했다. 애써 들여다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자칭 명성이 자자한 그 가게는 자리 잡고 있었다.


가게 출입문이랄지, 현관문이랄지 모를 회색빛 철창 문은 열려 있었다. 입구는 1명 들어가기도 빠듯했는데, 그나마 절반은 짐들이 쌓여 있어 몸을 반으로 접어 겨우 들어갔다.


 놀란 것은 사장님의 안색이었다. 명성대로라면 화려하진 않아도 성공한 사람 특유의 윤기 나는 피부와 안락한 미소, 자신감 넘치는 재치, 에너지 충만한 말재간이 있을 듯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물론 사장님은 전화상 오늘 컨디션이 안 좋다고는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실상은 더 어려워 보였다. 목소리는 목감기에 걸렸는지 한참 잠겨 있었다. 얼굴은 수심이 가득했고, 머리부터 양말에 가려진 발끝까지 무기력은 온몸에 늘어져 있었다.


옷수선에 대해서 간단히 얘기하고 재빨리 나오려 했는데, 어떤 대목에서인지 내 오지랖 특유의 질문이 툭 튀어 나오고 만 것이다.


"여기서 (옷수선) 가게 하신 지 오래 되셨나봐요?"


그렇다. 나이 60대~70대,  젊은 용어로 아주머니, 격식을 차린 용어로는 어르신들은 이런 류의 질문을 격하게 좋아하신다. 이분들은 자녀들을 다 출가시키고 이젠 대화할 사람이라곤, 동네 노인정이나 종교단체 또는 이웃집 여편네라 부르는 동네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나 같은 이색적인 워킹우먼의 출연은 적잖이 신선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입에 거미줄이 가득했을, 사장님의 서사는 서두르듯 바로 시작되었다. 기본 1시간 촉이 왔다. 아차 싶었다. 그날은 유독 오후에 할 일이 태산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냉정하게 10분 안에 대화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리라, 속으로 입을 앙당그렸다. 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는가.


사장님은 그곳 강남에서만 족히 30년 가까이 옷수선 가게를 운영했다 한다. 연예인급 되는 명사들의 옷도 수선해 주고 돈도 꽤 벌어, 은근쓸쩍  자산이 10억은 훌쩍 넘었었다고 힌트를 흘리신다. 아들도 장가 보내고 이제는 소일거리처럼 일을 하고 싶은데, 직도 의뢰가 많아 자정까지 수선작업을 할때가 많다 한다. 그래서 안색이 엉망이고 초췌해 보인다고 에둘러 해명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해명이 못 내웠는지, 자신이 초췌한 또 다른 이유에 대해서도 입을 여신다. 작년엔가, 올해인지 혹자의 권유로 주식에 투자했다 한다. 주식 투자는 거이 처음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깡통주식이 되어 투자한 돈을 거이다 날린 듯했다. 나는 눈치 있는 경청가를 자처하기에, 그 금액이나 구체적인 내용 따위는 묻지 않았다. 사장님의 얼굴과 몸짓에서 묻어나는 무기력만으로도 충분히 추정되었다. 처음 보는 나에게 삶의 고통을 토로하는 70세를 바라보는 한 여자. 나는 혹시라도 이 분이 한강다리라도 갈까, 특유의 조바심과 걱정이 밀려들었다.


이미 대화는 40분째 이어지고 있었다. 틈이 보이면 자리를 뜨려고 손으로 가늘게 짚고 있던 가방은 그냥 한쪽에 밀어 두었다.


국민학교 3학년을 끝으로 먹고 살고자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던 소녀. 우연히 접한 옷수선 가게 보조일. 한 남자에게 호기롭게 먼저 대시해 성사된 가난한 신혼생활. 돈을 잘 벌어 내내 시집살이 없이 살았다는 신식 며느리살이. 착했지만 백수였던 남편을 종교 가구제작 사장으로 어엿하게 만들어낸 사연. 옷 수선집 보조 때부터 워낙 솜씨를 인정받아, 그 길로 서울에 올라서 일했고 돈을 많이 벌어 양장점을 열었다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우리 첫째 언니, 둘째 언니도 미싱일을 했었다며 맞장구를 쳤다.


시계를 보니 대화는 2시간 30분째 접어들고 있었다. 얘기가 너무 재밌었지만 나도 생업이 있는지라, 소심한 용기로 다음을 기약했다.


사장님은 말미에 신이 나서 말한다. 사장님은 원래 교회에 다니던 권사님이라고 한다. 코로나 전후로 예배엔 못 나가고 있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다니는 교회 바로 옆 교회에도 한참 다녔었다 한다.


"요즘 하나님께 비뚤어지려고 하던 차였거든. 근데 손님과 대화하다 보니 마음이 시원하다랄까, 생기가 난다랄까 그러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같아. 고마워요."


사실 내가 사장님과 대화 내내 취임새로 드렸던 말들은 조언 내지는 책망조 였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다른 사람들을 험담하는 자리는 피해야 한다, 교회 성직자나 리더십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뒤에서 조용히 중보기도해야 한다, 설교 쇼핑하기 보다 매일 큐티로 하나님과 단독자로 인격적인 교제를 해야 한다, 이런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사장님은 개인 서사 외에도 기독교, 불교, 가톨릭 등  종교인들과 종교 시스템이 갖는 문제점들을 내내 비판하고 불평했던 터였다.


나보다 한창 연장자인 어르신께 초면에 드리기엔 다소 어려운 쓴소리인데도, 지금 이분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한 조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호소력 짙게 말씀을 드렸던 터인데, 의외로 사장님이 조언들을 잘 수용하셔서 놀랐다. 혹여 이 사장님과의 만남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기에, 애절하게 탄식하듯 말씀드렸던 것이 통했던 것일까.


근데 나를 천사라 극존칭 한 것은, 아마도 그날 사장님의 내면에 천사가 둥지를 기 시작했던 것이라, 나는 그 공을 사장님의 예쁜 마음에 돌렸다.





2주 후 다시 찾은 옷가게.

사장님 얼굴에 화색이 돌고 피부에 윤기마저 느껴졌다. 신발을 벗고 가게 온돌방으로 들어가는데, 사장님은 대뜸 묻는다


"오늘은 시간이 좀 있어요?"

"..."


나는 순간 불안한 촉이 또 왔으나 대답의 방향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사장님이 냉큼 질문으로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나, 세네갈에 가서 선교도 하고 봉사도 하려는데, (손님의) 생각이 어떤지 묻고 싶어서요"


얘기인 즉은 세네갈에 아는 선교사님이 계시는데, 거기서 살면서 매달 100만 원씩 굶는 아이들을 후원하며 살고 싶다 한다. 물론 거기서도 옷수선 일은 계속할 것이라 덧붙이면서 말이다. 원래는 시골 내려가서 월 100만원 생활비로 살려했다. 그런데 그 돈으로 굶는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 하길래,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판단되었다고 한다. 상기된 얼굴에선 흥분과 기대가 그대로 드러났다. 사장님은 실은 옷수선은 조만간 은퇴하려 했는데, 아직 몸도 건강하고 손재주는 여전하니, 말년에 외국에 가서 봉사하며 살고 싶다 한다.


2주 전, 깡통주식 사건으로 혹여 자살할까 걱정되었던 사장님, 한 여인의 개벽할 변화에 잠시 어리둥절 했다. 나는 큐티(기독교 개인적인 성경묵상)는 하셨는지, 진짜 선교지 가서 평신도 자비량 선교하시려면, 지금부터 건강한 정통 기독교 교회에 가서 공동체 훈련을 받아보시길 권면드렸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선교사들이 정말 힘들어하는 건, 현지의 열악한 환경이나 재정, 수고 등이 아니라고 강조 드렸다. 오히려 선교사들이 버거운 것은, 현지에서 함께 사역하는 선교사끼리의 동역 관계임을 집어서 말씀드렸다. 즉 헌신자들이 처음엔 좋은 동기와 목적으로 투신하나 이후 '분별력의 남용'으로 종종 분란을 만든다는 요지였다. 이번에도 꽤 센 조언이었다.


늘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고 치명적이다. 나아가 내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랑 없는 분별력' 곧 인간 내면의 적이다.


내 말이 과할까 이번에도 우려했는데, 사장님은 오히려 한술 더 떠 셀프 디스를 하신다.


"그 말이 맞아. 내가 전에 적을 둔 봉사모임도 그랬지. 그래서 60세 이상 실버모임을 아예 없애 버렸잖아. 모이면 맨날 옆의 김노인, 장노인 흉보고 또 목소리들은 얼마나 큰지. 자기 말만 하고 충고는 들으려고도 안 해. 그러면서 맨날 모임 지적하고 또 서로 얼마나 싸워. 그 나이 되면 성격도 못 고쳐."


사장님의 셀프 디스에 되려 민망해진 나는 말을 이었다.


"그 봉사모임 리더의 소신과 용기가 대단히 훌륭하시네요. 구성원들이 단체로 반발할 수도 있을 텐데요. 근데 말씀엔 힘이 있어서요, 나이 들어도 (잘 수용하면) 변화될 수 있어요"


그렇게 교회를 잠시 떠나 철학, 불교, 유교를 부유하 탕자 사장님은 '자비량 평신도 선교사의 꿈'이 생겼다.


그날 신기하다 생각했다. 나는 분명 듣기 굉장히 불편했을 쓴소리도 했는데, 왜 사장님이 기분 나빠하지 않았는지, 어떻게 2주 사이에 급진적인 변화가 있었는지 말이다.


사장님은 강남에서 30년 가까이 옷수선 하면서 회의와 염증을 느끼곤 했다 한다. 이른바 강남의 있는 척, 잘난척하는 사람들에 질렸고, 학벌이나 재력, 직업 등에 따라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것에 질렸다 한다.


잘은 모르겠다, 그분이 강남에서 만났다던 숱한 사람들과 내가 어떤 대목에서 달랐을지. 강남 토박이들과 지내며 판단과 정죄 익숙해졌던 여사장, 그녀에 심장의 결을 교정해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초면에 절박했던 내 조언, 그것은 자칫 언어의 뾰족함으로 느껴지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 뾰족함이 되려 뭉특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어렴풋이 추측해 본다. 혹여 한강다리를 갈지도 모를,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를, 한 많은 강남의 한 여인을 향한 애정과 간절함 때문이였을까.


내가 나름 임원인데도 운전면허 없이 대중교통으로 소박하게 다니고, 초반에 바쁘다고 했는데 3시간 가까이 사장님 말씀을 경청하고, 갈 때는 내 명함을 주며 언제든 연락 달라하고, 또 중간에 전화를 걸어 큐티를 했는가 물어봐 드린 게 전부였는데, 이 중 어느 지점에서 사장님은 마음이 움직였을까?


조만간 옷수선 가게에 한 번 더 가기로 했다. 그날은 세네갈의 예비 여사장님과 여유를 갖고 따뜻한 점심을 나눌 생각이다.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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