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내가 인생에서 며칠째인지를 곱씹으며 손가락을 헤아리는 일이 생기다니. 천재와 연애할 때도 서로 날짜를 헤아리지는 않았다. 아니 초반에는 헤아렸는데, 이 나이가 머쓱해서 손가락을 차츰 접었다. 우리는 둘 다 삶의 몇 가지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꽤 많이 무딘 편이다. 그중에 하나가 기념일 날짜를 헤아리는 것이고, 무엇을 먹을지 메뉴를 너무 고심하는 일이며, 영화 볼 때 장르와 작품을 선별하는 일 그리고 그 외 시시콜콜한 서로의 라이프 스타일에 과하게 왈가왈부하는 일들이다.
천재는 심지어 지인에게 택배로 선물을 받아도 며칠째 아니 수개월을 풀어보지 않는 일이 가끔 있을 정도로, 소수의 분야에 극집중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택배에 선물이 있었는지 몰랐다는 말을 하긴 했으나. 나도 옷에 단추가 떨어져도 치명적인 부위가 아니면 그냥 다닌다. 가령 긴팔 블라우스의 손목 부문의 단추라면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블라우스 팔소매를 접어서 입고 한참 다닐 때도 있다. 결국 나의 어머니가 단추부문을 발견하고 달아 주셨다. 단추를 꿰매는 일은 몇 분이면 될 일인데, 거대한 과업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일상 중 하나다. 우리 같은스타일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런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고 라이킷과 구독자수에는 신경이 꽤 쓰이는 거다. 이건 뭐지? 내가 주변일에 쿨하고 무딘 사람인데, 내 신경을 빼앗는 이 메커니즘은 뭘까. 내가 전문 작가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출간을 준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면 왜 글을 쓰냐고요? 나는 어렸을 때 내성적인 성격에 속풀이 할 때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시작한 것이 일기 쓰기이며 어른이 돼서는 낙서라는 습작이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에 할 말이 많아도, 내 삶에 치여 삭히고 묻고 살아가곤 하는데. 자꾸 마음에 단어와 문장 때론 긴 문장이 쌓이는 거다. 애처롭고 안쓰러움으로, 답답함과 의협심으로, 까발리고 싶은 충동으로, 도와주고 싶은 위로로, 다 전하지 못한 메모처럼 그렇게 내 안에 단어와 문장들 때론 긴 서사로 글이 떠다닌다. 그럴 때마다 낙서를 했고 가끔 그것을 일로 만난 인사 담당자분들, 인재분들과 비정기적으로 에세이를 나누곤 했다. 그분들은 공감을 많이 해주었고 해갈과 위로를 얻었다는 분들도 꽤 계셨다. 그게 연장돼서 전화 통화로 이어질 때면 너무 즐거워하신다. 재밌기도 하고 힘이 된다고 했다. 그럴 때면 나보고 "작가를 해봐라,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해라" 혼자 듣기에 너무 아깝다고도 하신다.
하지만 블라우스 손목 단추도 꿰매기가 버거운 삶의 가속도에 밀려 그냥저냥 십 년이 지나갔다. 이번에 브런치는 그래서 시작한 이유도 있다. 아주 편안하고 아늑한 안방 같은 마음으로 말이다.
허나 이곳에도 구독자수와 라이킷(일종의 '좋아요' 기능)으로 많고 적은 사람. 출판작가, 응원작가, 전문분야 지정 작가 등으로 계급이랄까, 분류가 나뉘는 것이 아닌가. 분류는 유용한 작업이다. 집 청소할 때 서랍을 잘 분류해 놓으면 나중에 물건을 찾아 쓸 때 유용하다. 그런데 이렇게 편리와 유용으로 시작한 분류가 때론 분리로까지 나가기도 한다. 책상서랍이 그렇다. 잘 쓰는 물건은 눈에 잘 띄는 첫 번째 서랍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잘 안 쓰거나 부피가 크고 무거운 물건은 서랍의 아래층으로 또 아래층으로 점점 내려간다. 어떤 물건은 서랍의 맨 아래층에서도 깊숙이 안쪽에 자리를 틀기도 한다. 나는 내 소유의 물건인 그 친구들의 존재도 모르고 수년 때론 십수 년째 살아갈 때도 있다.
서랍 맨 아래층, 저 깊숙이로 던져진 물건. 나는 쓰지도 않고 때론 너무 오래돼 쓸 수도 없는 것을. 왜 버리지도 않아, 아주 가끔 볼 때마다 손을 댈 엄두도 못 내고 애써 눈을 피하고 서두르듯 서랍문을 닫는 것일까? 나는 오래된 화석 같은 그 친구들에게 마음을 쓸 삶의 여유가 없다. 아니 신제품, 새것, 새로 받은 선물들을 돌보기도 정신없는 폭주 기관열차다, 삶은 때론 폭주 같다. 몸이 바빠서라기보다 실은 마음이 부산하고 바쁘다.
내 삶에 브런치의 등판은 신제품의 도착이다. 그래서 이 친구를 하루에도 여러 번 자주 들여다보며, 이미 썼던 글도 다시 읽으며 오탈자를 고치고 다듬고. 라이킷과 구독 알림이라도 오면 마음이 말려 들어간다. 마치 반장선거에 출마해 친구들의 진짜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파헤치는 묘한 긴장감과 별로 신경 안 쓴다는 쿨함을 번갈아 집어 들면서.
근데 느린 구독자 증가. 사실 내가 성격이 엄청 급하다. 그래서 급기야 주변에는 모두 비밀로 하기로 했던 브런치 작가 등단을 알리고 말았다. 오히려 가족이나 절친들에게는 아직은 비밀로 하고 싶고. 그래야 속 편하게 여러 소재로 글을 쓸 테니깐. 그래서 일로 알고 지내는 수천 명의 나의 든든한 우군인 인재분들 중에서. 조금 더 친분이 있는 분들을 우선 선별해서 전체메일로 이 사실을 살짝 알렸다. 그런데 어제부터 브런치 알람이 난리다. 포털 메인에 브런치가 노출되면 때로 조회수가 10,000회도 넘어갔다는 얘기들을 접한 적이 있었기에. 드디어 나도 포털에 노출되었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인재분들이 하나, 둘 집결하시는 듯하다. 그분들을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브런치를 하고 있는 분들이 거의 없으시다. 심각할 정도로 브런치는 잘 안 하신다. 세상에, 나 때문에 브런치를 처음 시작하는 분들이 새로 단장한 나의 브런치 집에 속속 들르고 있다. 황송하고 죄송하고 부담감이 만 배로 일어난다. 내 핸드폰엔 저장된 연락처가 4000개가 넘는데, 모두에게 알리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다들 본인들 일로 바쁘신데라며 말끝을 흐리게 된다.
며칠 전 한 과장님은 브런치에 처음 가입했다며, 내 브런치를 들른 소회를 밝히셨다. 그녀는 사표를 쓰려고 속이 시끄러웠는데, 최근 내가 올린 브런치 글을 읽으며 마음이 많이 따뜻해졌다 한다. 그간 직장의 주변사람들과 상황들을 원망하고 탓하던 마음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모기업 상무님도 브런치에 들렀다고 메일을 주셨고 통화를 했다. 나의 안부도 궁금했는데, 이 기회에 브런치가 뭐 하는 곳인지 새로 가입도 했다며. 그런데 이직을 고민 중이니 그것도 도와달라 신다. 이 정도면 내가 브런치 홍보팀 수준이다. 아, 이를 어쩌지?
며칠 브런치 알림 진동하며 늘어나는 라이킷, 구독자수를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내 서랍 맨 아래칸에 있는 오랜 내 삶의 족적들, 더 깊숙이에서 웅크리고 훌쩍이고 있을 물감, 파렛트, 매직팬, 색연필 세트 등 오래된 물건들. 신제품에 밀려 설자리를 잃은 내 오랜 벗들. 오래전 산업화 때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했듯 문명의 이기와 발전의 가속에 떠밀려, 분류에 또한번 민감해지는 우리인간들의 자화상 같다. 처음에는 편의상 시작한 분류가 분리가 되고 나아가 방치와 격리로 치달을지도 모를 그 어떤 기우를 닮은.
얼마 전 천재네 집에서 작년부터 보아온 솜이불 얘기를 다시 꺼냈다. 내가 천재네 집 청소를 도와줄 때가 아주 가끔 있다. 작년 어느 초여름 때였다.
"이거 솜이불 빨아야겠다. 그런데 이불이 너무 커서 세탁기에 안 들어가네. 주변에 이불 전용 빨래방도 없고.내가 언제 날 잡아서 한번 빨아 놓을게"
"그럼 나야 고맙고 좋지"
그렇게 얘기하고 근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사계절이 지나면서 누구 하나 먼저 솜이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요즘은 겨울에도 집들이 난방이 빵빵해서 솜이불을 쓰는 집이 많지도 않거니와. 가끔 겨울에 난방비를 아끼려 할 때 꺼내는 쓰는 용도 정도이니깐. 천재네 집에 갈때마나 간혹 생각은 났지만. 사실 무거운 솜이불을 직접 빨아본 적도 없었기에. 세탁기에 안 들어가는 솜이불은 거대한 세계의 톱니바퀴에서 자기 설자리를 못 찾는 듯하다. 마치 산업화, 기계화, 자동화를 넘어 로봇, AI, 스마트를 표방하는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자기 자리를 정의하기 어려워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당장 안 써도 되고 그런데 손은 많이 가고 힘이 드는 커다란 솜이불.
브런치에서 분주한 며칠을 보낸 저번주 드디어 솜이불을 빨고자 했다. 왜 이런 결단을 내렸나고요? 자주 쓸 것 같지 않은 솜이불이지만 그렇다고 해지거나 썩어서 내다 버릴 정도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버릴 수 없는 이불이었기 때문입니다. 천재 어머니가 그를 위해 직접 챙겨주신 이불이기 때문이다. 스토리와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우리에겐 이용의 가치보다 기억의 가치 때문에 애착이 간다.
솜이불 빨래는 처음이다.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세제를 털어놓고 이불을 넣는다. 그런데 물 위로 이불이 떠오르는 기현상이 일었다. 나는 솜이불이란 친구를 잘 모른다, 서투르다. 욕조에 다 채운 물이 아까워 그렇게 떠오르는 솜이불을 온갖 방법으로 세제가 짙게 드리운 물에 연거푸 누르고 눌렀다. 방치되고 점점 잊혀져가던 솜이불은 오늘 내 삶에 주인공이 되었다. 그것도 다루기 까다로운 주인공으로 말이다.
브런치라는 신제품 아니 신문물에 밀려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가던 여타 빈민가 슬럼 같은 세상. 이 브런치가 여타의 신제품의 위상으로 위협적으로 내 삶에 과도하게 침범하지 않도록. 그가 신병이라는 위상을 느끼도록. 자주 나의 오래된 삶의 서사를 호출하고 싶다. 현재는 과거가 겹겹이 응원해 주고 도와준 덕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럴 때 나의 현재가 미래라는 동생에게도 따뜻한 바톤 터치를 할 게다. 삶의 균형이란 다름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접속하며 삶의 분류가 분리나 벽이 되지 않도록 조율하는데 있지 않을까.
솜이불은 너무 무거워 다 빨고도 욕조에 한참 널려져 있었다. 다음 날 그것도 빨랫줄이 아니라 식탁 의자 두 개에 드리워졌다. 속도를 핑계 삼아 놓치고 있던 누군가의 추억은 느리게 또 느리게 물기를 소멸하며, 그렇게 우리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보송보송하고 포근한 엄마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