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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Dec 18. 2023

내가 가장 평안할 때(8) 온유

하늘도 감동시키는 바보들의 행진

‘바보’ 소리를 들어도
별로 마음 쓰지 않는다
약고 민첩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
바보가 좀 있으면 어떤데



올해 여름 우연히 보았던 한 칼럼이 있다. 중년으로 보이는 남성이 기고한 글이었다.


나이 50대~60대가 되면, 여자는 남성호르몬이 강해져 되려 걸걸해지고 남자는 여성호르몬이 강해져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마음은 더없이 여려진다 한다. 50대인 우리 셋째 형부도 관련해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형부는 강의 준비하느라 새벽까지 공부할 때가 많았는데, 어느 날부터 TV 멜로 드라마를 보며 혼자 눈물을 홀짝거리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우린 그런 형부의 웃픈 모습들을 웃음을 숨긴 채 한동안 지켜봐야 했다.


올 여름에 한 기고글(아래 인용글 참조)을 썼던 남성. 그는 우리나라 중년 남성의 애환을 그만의 '바보론'으로 풀어갔다. 특히 아내와 그녀의 구박을 '메기'로 격상시키며, 자신이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늘이 내려준 회초리로 수용하는 부분이 훈훈했다.


근래에 부쩍 나 자신이 바보인가, 머저리인가. 팔푼이보다 더한 반푼이, 쪼다, 등신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모자라는 사람에게 붙이는 말을 모두 동원해 본다. 이질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를 두고 생긴 말 같다. ‘등신 밥통’.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딴에는 제법 똑똑하고, 두루 살피며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믿었었는데.

아내는 나이를 먹을수록 당당해지고, 집안일이나 사회 일에 적극적인 자세로 임한다. 나는 왜 이렇게 주눅이 들지? 밥 먹다가 젓가락을 떨어뜨리는 일도 자주 생기고, 나무라면 더 당황해지고, 핸드폰, 지갑 등을 잘 잊어버리고는 속수무책. 참 한심하다. 실수하고도 수습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스스로 생각해도 민망스럽다.

아직은 건강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허리도 결리고 무릎도 아프다. 그러나 특별히 병원 신세를 지거나 약을 달고 살지는 않는다. 탈이긴 하지만 한 자리에서 소주 두 병 정도 마신다. 꾸준히 걷기 운동을 하고, 식성이 좋아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다. ‘메기 효과’의 덕도 보는 셈이다. 힘이 빠져 흐느적거리는 미꾸라지 속에 메기가 들어가면 미꾸라지가 긴장하여 파닥거린다고 한다. 나는 미꾸라지, 아내는 메기.

늘그막에 여유 있게 살자고 주장하고 다닌다. 베풀며 살자고 말한다. 친구를 좋아하고, 봉사활동에도 참여한다. 노인대학, 박물관 대학, 문화재 답사 활동에도 가입하여 나름 바쁘게 산다. 그런데도 ‘메기 효과’인가? 아니라고 펄쩍 뛰는 아내지만 아내는 미더우면서 무섭다.

취업을 위한 어느 면접시험에서 면접관이 얼굴이 말처럼 긴 응시자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응시자분은 지금 넋 나간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얼굴이 무척 깁니다. 혹시 머저리와 바보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요?’ 이 질문을 받은 청년이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태연하게 ‘네! 결례되는 질문을 하는 쪽이 머저리이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쪽은 바보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오히려 최종 합격자가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내친김에 바보, 등신, 머저리를 중심으로 바보 계열의 말을 찾아보았다. ‘바보’ 계열에 속하는 단어가 의외로 많았다. 실제로 바보 같은 사람이 많아선지, 남을 얕잡아 놀리는 재미로 생겼는지는 몰라도 꼽아보니 상당히 많다. ‘바보, 등신, 맹추, 머저리, 먹통, 맹꽁이, 얼간이, 백치, 천치, 칠푼이, 팔푼이, 어리보기, 반푼이’ 등 열 개도 더 된다.

우선 ‘바보’는 어리석고 못나게 구는 사람을 얕잡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원래는 정말로 지능이 부족하고 어리석어서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너를 믿은 내가 바보였다’라는 말속에는 ‘내가 너무 순진하여 너를 믿었다’라는 의미다. 순수, 순진을 담고 있다. ‘바보’ 소리를 들어도 크게 기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얼간이’는 소금을 약하게 쳐서 절이는 ‘얼간’, 얼추 간을 맞춘 것으로 ‘온전한 것도 아니고 완전 바보도 아닌 덜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또, 나무, 돌, 흙 쇠붙이 등으로 만든 사람의 상(像)처럼 사람 구실을 못하는 것은 등신(等身)이다. ‘머저리’는 하는 짓이나 말이 얼뜨며 어리석고 둔한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다. 바보보다 듣기 싫은 말이다. ‘칠푼이’나 ‘팔푼이’는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이다.

‘바보’ 소리를 들어도 별로 마음 쓰지 않는다. 약고 민첩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 바보가 좀 있으면 어떤데. ‘바보는 약으로도 못 고친다’라고 하지만 바보, 등신, 머저리 속에 순수와 순진이 담겼다면 고치고 싶지 않다.

출처 : [경북포럼] 바보 등신 머저리와 ‘순수’ ,



힘이 빠져 흐느적거리는
미꾸라지 속에 메기가 들어가면
미꾸라지가 긴장하여 파닥거린다고 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위대한 왕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그도 인생 사는 동안 바닥을 칠 때가 있었다. 그런 그가 인생의 밑바닥을 칠 때였다. 그때 시므이란 사람이 다윗을 저주하고 멸시하는 말을 하였다.


나는 학생 때부터 다윗과 그의 생애를 묵상할 때, 가장 감동받는 장면이 이 대목이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찔러 전쟁에서 승리한 장면은 명성이 자자하다. 비종교인들이 보는 동화책에도 실려 있다. 심지어 종교와 하등 상관없는 정치, 경제, 사회, 심리, 철학 온갖 분야에서 '다윗과 골리앗'은 비유적으로 수억 리뷰와 인용을 받는 듯하다. 다윗이 사울을 용납하고 하나님께 맡긴 부분이나 아들 압샬롭의 반역을 견디는 부분도 인상적일 테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윗의 진짜 위대성은 시므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했었다. 인간은 인생이 잘 풀리고 모든 것이 잘 될 때,  '좋은 사람' '친절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어긋나고, 되는 일이 없고, 세상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 때, 평정심을 지키며 온유하기란 쉽지 않다. 다윗은 이스라엘에서는 전쟁영웅이었고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잠시 피난길을 떠나며 인생의 밑바닥을 치자 일개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며 조롱한 것이다.


이때 다윗의 신하들은 자신들이 시므이를 바로 죽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달랐다. 하나님께서 어처구니 없는 사람, 하등 상대할 가치도 없어 보이는 희한한 사람을 통해서도 자신을 책망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 당시에 한해 시므이 조차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회초리 곧 메기였던 것이다. 


다윗이 정말 하나님의 임재-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가운데 있는 사람임을 잘 드러내 준다. 물론 다윗은 이때 알았을 것이다. 시므이가 자신을 말도 안 되는 말로 비방하고, 저주하며, 자격 없이 조롱한다는 것을 말이다. 다윗은 그런 시므이에 대한 하나님 징계와 심판조차 (자신이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므로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3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14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사무엘하 16:5-14)  





다윗의 이후 생애는 모두가 잘 안다. 다윗은 왕위를 회복하고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왕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나아가 그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태어난다. 사람들의 일시적인 인정과 인기, 자기 자존심에만 붙들려 있었다면, 다윗은 시므이와 맞붙었을 것이다. 그의 거짓과 비방, 비천한 말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다윗은 통 크게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므로 자신의 온유함을 지킬 수 있었다.


다윗의 이런 태도와 비슷한 대목을 본 적이 있다. 소싯적 보았던 세종대왕에 대한 역사 드리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말이다. 세종대왕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음모와 계략으로 접근하는 신하. 세종대왕은 그의 행적을 다 알고도 시시비비 따지지 않고 호기롭게 한마디를 던졌다.


"너는 너의 길의 가라,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나는 가끔 내 영적인 상태 ㅡ때론 상대의 영적인 상태ㅡ를 이런 대목에서 더 정밀하게 느끼곤 한다. 나와 타자들이 영적으로 깨어있는가, 정말 절대자를 경외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의 내면상태와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은, 핫한 골리앗과 같은 거대 담론에서 보다, 매일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말이다. 매일 얼굴을 맞대는 남편이나 아내, 자녀, 가족, 직장 동료와 상사, 이웃들 말이다. 하다못해 지나가는 행인들 혹은 버스나 전철에서 스치듯 만나는 낯선 이웃의 언행을 대한 나의 리액션서 말이다. 그것은 하늘의 절대자를 의식하지 않으면 통제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하늘 TV에 리모컨을 켜본다. 그 옛날 로마의 박해 속에서도 순교를 자처했던 이들, 로마 콜로세움에서 천사의 얼굴로 사자의 밥이 되었던 사람들. 이순신, 세종대왕. 허준 등 온갖 시므이에 휘둘리지 않고 온유하게 자기의 길을 갔던 위대한 바보 사람들 말이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는 포근하고 즐거운 시즌이다. 동시에 한해의 결핍과 부실한 결실 때문에, 자신과 다투기 쉽고 무엇보다 남탓하며 타인과 다투기 쉬운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올해는 스스로 '하늘 바보'를 자처하는 온유의 대가들이 거리에 가득한 따뜻하고 화목한 연말을 상상해 본다.





# 천재와 연애 초기. 그는 조울증과 일시적인 분노조절장애(지금은 깨끗이 치유됨)가 있었다. 대부분은 참 좋은 사람인데, 한 달에 몇 번씩 기분이 급격히 다운되면 감정의 기복 때문에 꽤 힘들었었다. 난 난생 처음 겪는 일들이라 마음의 부침이 있었다. 아래 말씀은 그런 시즌에 했던 큐티이다.



[생생큐티]2021년 12월 5일(월) 주를 닮은 온유함이 나를 통해(디도서 1장~3장)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디도서 3:2)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온유함을 덧입고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특히 이 온유함을 둘러싸고 ‘범사’라는 수식어를 쓴 것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합니다.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일을 하며, 상황이 잘 풀릴 때 온유하기는 쉽습니다. 그때조차 온유하지 않으면 이상하거나 부족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안 좋은 사람을 만나 힘든 일을 하며 어려운 상황에 자꾸 부딪힐 때, 사람은 온유함을 항상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른바 타고나게 성격이 좋은 사람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긋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예수님을 닮고자 할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한결같은 온유함이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느낄 수 있을 정도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온전하고 성숙한 온유함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온유함이라는, 이 한 가지 덕목을 위해서 쉬지 않고 줄기차게 스스로를 연마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는 온유함이란 무엇입니까? 아무도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어떤 허물이 있건 심지어 그가 나를 비방했어도 아무도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다투지 말고 관용해야 합니다. 온유가 가장 극렬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특히 서로 비방하고 다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관용하는 것, 이것이 온유하기 힘든 이유입니다. 뒤집어서 이 대목에서 온유를 스스로 훈련할 수 있다면 모두가 인정하는 온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콩(연애 초기 내가 부르던 천재의 애칭)과 연애에서, 그의 감정기복(조울증으로 본인도 통제가 안 되는 상황임은 나중에 알게 되었음. 감정기복은 치유되어 지금은 온유한 사람되심)에 때론 서운하고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말을 예쁘고 친절하게 하다가도, 감정이 다운되거나 컨디션에 따라 다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것도 하나님께서 저를 연단하시는 한 방식임을 생각합니다. 모세가 그러했듯 온유함이란 덕목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맞닥뜨리는 사람과의 관계,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제가 이를 기억하고 콩이나 어떤 타인, 사건을 탓하기 보다 그것을 통해 나를 성숙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날마다 성장해 가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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