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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Jan 22. 2024

내가 가장 평안할 때(9) 필요없음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강력한 흡인력은 '필요없음'이 체화된 인생이다

오늘 글은 <19,742원짜리 아파트 (1)(2)>를 쓸 때 함께 초안을 작성해 놓은 글입니다. 아래 2개의 글은, 본글과 맥락을 함께 하기에 더불어 읽으면 더 좋습니다.  

19,742원짜리 아파트(1)

19,742원짜리 아파트(2)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강력한 흡인력은 '필요 없음'이 체화된 인생이다.
절대자가 보시기에 필요없다 한다면
브런치 계정도 삭제하겠는가?



내가 대책 없이 퍼주는 삶을 살 때, 그 거꾸로인 삶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은, 나와 가까울수록 또 직장 동료일수록 적었다. 나누는 삶에 대해서, 제 삼자나 멀리 있는 사람들이 더 동조를 많이 하는 이유는 왜일까.  


가족 중에서도 대놓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30대 후반까지 집을 사지 않는 무소유를 설파하자,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 가족들에게도 한동안 아니 지금도 속속들이 말하지 않은 나눔들이 꽤 많아졌다. 심지어 직장에서, 불교나 가톨릭 심지어 기독교처럼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조차, "너는 아주 잘하고 있다"라고 쌍수 들어 동조하는 분위기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나눔이란, 멀리 있을 때는 격하게 환영받지만 밀착된 관계에서는 소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눔이, 책 속에서 튀어나와 그들 바로 곁으로 다가왔을 때, 그것이 나와 비슷한 직장동료일 때, 세상은 겉으론 동조할 수 있으나 내심 "철이 없어. 대책이 없는 이상주의자야"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 직장에서도 나의 거꾸로인 삶은 잘 얘기하지 않았다.


20대부터 만났던 종교인인 직장동료들. 그들은 이론으로는, 성경의 사도 바울처럼 독신으로도 헌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그러한 삶을 살 것 같으면 오히려 앞질러 엄포를 놓곤 했다. 혼기를 놓치고, 집을 사지 않고, 심지어 한동안은 피부관리도 푸석한 나에게 종교인들조차 하는 말은 이랬다.


"똥차 되기 전에 시집가라, 집을 사라, 여자는 피부관리를 잘 해야 한다"


그런 말들을 내뱉는 종교 있는 사람들 아니 철학이 고아한 사람들. 그 속에서 나는, 이론이 가득한 100kg짜리 백과사전을 이고 사는, 머리 큰 외계적 지적 존재들 속에서, 철없는 이상주의자 난쟁이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구박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전혀 예상치 못한 근사한 남자를 미래 배우자감으로 사귀고, 입지가 좋은 곳에 아파트가 생기고, 짝꿍이 생일선물로 피부관리 쿠폰을 끊어주자, 그들 중 독실하다는 분들이 또 내게 우회적으로 말을 걸어온다. 세상 성공과 명예 좇지 마라,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이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그 말은 진심입니까? 도대체 당신이 하는 말을, 당신은 얼마나 제대로 알고 또 어느 정도까지 실천하고 싶은 건가요?"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할 때는 (실상 내면에선 진심 어리게 잘한다 하지 않고) 걱정하더니, 절대자의 채우심을 공유하자 이번엔 화들짝 (내면으로만) 화를 내며 엉뚱한 소리들만 횡설수설하는 사람들. 동일한 그들이 이제 와서 걱정 대신 내뱉는, 그 분노와 당황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나는, 내가 퍼주는 삶을 살다 궁핍이 가중되었을 때와 동일하게 반문하고 싶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들은 진리로 나를 보는 게 아니라 실상은 그들 내면에 필터링되지 않은 탐욕으로 나를 재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뭣도 없을 땐 한심해하고 또 내가 뭣도 있으면 질시하며 경계하라 말한다는 것을 말이다. 남을 밟고서라도 1등을 하라고, 야무지게 돈을 벌라고, 자기를 어필하라고, 이익을 잘 챙기라고, 기회를 잘 챙겨 낚아채라고, 너무 퍼주지 말라고, 그들은 겉으로는 청빈을 말하나 속으론 성공을 챙기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2만 원으로 아파트를 구입한 사건은, 절대자께서 주시는 위로와 격려 같았다. (참고글 :19,742원짜리 아파트(2)) 속적인 물질 만능과 경쟁 논리가 아니라, 내가 신앙적으로 터득한 진리대로 산다는 것, 그 삶이 '맞다'라고 또 그것이 진정한 능력이 됨을 가시적 시청각 자료로 가르쳐 주시는 것 같았다. 종교인들조차, 겉으론 검소를 추앙하면서, 실은 탐욕스럽게 추구하는 그 물질의 대명사 곧 아파트로 말이다. 사람들 내면의 이중성에 불을 붙여 분노를 드러내어 산화시키는 망치처럼 말이다. 그래 이번 일도, 늘 그렇듯 혼자만 알고 지내려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게 되었다.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묘사한 그림


가난. 가난을 향한 인간들의 양가감정은 치졸하고 어리석으며 교묘하고 이중적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다가 이내 내 뜻대로 안 될 것 같을 때, 그들은 겉으론 가난을 동정하나 내심 가난을 혐오한다. 이런 양가감정은 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부자들을 향한 옛적 마녀신화에 가까운 혐오는 인간 내면에 갖가지 병리현상을 교묘하게 피어낸다. 부자를 적대하고 그런 자들을 처단하려는 자신을 자칭 정의의 사도로 치장한다. 그러나 정작 부자가 되기 위해 아니 성공하기 위해, 누구보다 혈안인 사람들이 이들 부류이기도 하다. 그 자신만 모를 뿐이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 하던가. 부자 아니 이른바 세상에서 적어도 승기를 잡은 이들을 향한, 강렬한 적대와 경계를 드러내는 이들, 그들의 태반은 부자를 동경하며 동시에 그 부자의 대열에 서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분개하고 있는 애송이인 것이다. 적어도 내가 들여다본 세상과 '나 자신'은 그랬다.


가난에 대해서 동정하는 듯하면서 혐오하고, 부자에 대해서 적대하면서 동시에 충격적으로 동경하는 양가감정. 이 두 양극단을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나는, 세상의 위선과 허세, 거짓과 조장에 역한 감정을 참을 때가 많았다. 그건 소싯적 나 자신에 대한 역한 감정인지도 모른다. 그냥 솔직하게, "나도 부자가 되고 싶다"라고 시인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혹시 부자나 기득권층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듯 혐오와 적대가 극심하게 일어나는가? 동창모임에서, 명절 친척들 속에서, 직장에서, 종교단체나 봉사단체에서, 그런 격한 감정에 그 자랑하는 듯한 입들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가? 그렇다면 지금, 그는 몹시도 부자가 되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것이다, 그 치열한 감정의 열감은 그런 자신을 충분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양 극단에서 인간들이 공해처럼 뿜어내는 양가감정이란 퇴치할 수 없는 것일까? 없다, 그러나 근접하려 노력한 사람들은 희소하게 있어 왔다. 


스스로도, 속고 속이는 빈부격차에 대한 양가감정. 부에 대한 적대가 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면, 부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검소와 청빈은 어떠한가? 또는 부의 반대비움, 무소유, 내려놓음과 같은 '무'의 지대라 여길 수도 있으나 이 또한 2% 부족하다. 그보다는, '물질적 부'의 반대는 '영혼의 충만'이 좀 더 가깝지 않은가 생각한다. 이미 영혼과 정신, 마음이 내적으로 충만한 상태 곧 자족해 있으면, 가난에 대해서도 또 부에 대해서도 알레르기 반응을 잘 일으키지 않는다.


적어도 이 단계의 마음과 삶이 내재화된 사람들은, 겉으로 가난을 위한다고 하면서 멸시하고 혐오하지 않는다. 부자 내지는 성공한 사람들을 적대하며 비하하다 이내 분개하지도 않는다. 자랑질 좀 하지 말라며 게거품을 입에 물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부자는 애처로운 극빈자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부자에게도 애정은 아닐지라도 연민이 밀려든다. 심지어 영혼이 극빈한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반대로 그들에게 가난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이 땅에서 현자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살아서 온갖 천대를 받았던 거지 나사로, 그가 죽어서는 하늘나라에서 승자묘사된, 성경의 가르침은 그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린 시절, 말과 행함이 다른 어른들에 대한 반발심은 다이너마이트처럼 내 속에 응축되곤 했다.


'제발 (말로만 하는) 그 입 좀 다물라고요!'


그러나 대놓고 대들거나 싸우지는 않았다. 아니 상대하지 않으련다, 일면 체념하듯 나 자신만 조소했다.


'너인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 어른들과 뭐가 다르겠어?'


나 자신에게 내뱉는 조소만큼 더러운 욕은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조소하는 나 자신에게, 보란 듯이 자신을 향한 그 욕지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자, 이를 악물었다. 어른들의, 말만 번지르한 참기 역한 말들을 전복시키고 싶다는, 그 말은 나 자신을 조소하며 저항하고 있었다. 나 자신이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바로 내 삶으로, 내 삶을 폭탄 삼아 어른들의 허언에 충격을 주고 경악을 일으키고 싶었다. 내 삶이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말이다.


중학교 때부터 '무소유'란 관념은 그런 나의 상징적인 투쟁 언어였다. 무소유가 훗날 어떤 종교, 그 누군가의 책 제목이 된 것은 못내 아쉬웠던 이유다. 나의 무소유는 굳이 그 롤모델을 찾자면 예수님이며, 중세 성 프란체스코요, 철학자 디오게네스며, 근자에는 손양원, 주기철, 한경직 목사님 등이었다. 그래 그분들처럼 전문 사역자로서, 그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틀었던 이유 또한 있었다.


'에이, 전문 사역자니깐, 성직자라서 특별한 소명을 받았으니깐 그렇게 살 수 있는 거지. 우리처럼 도시에서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불가능해. 그럼 일반인이 진리대로, 신념대로 사는 건 불가능하지'


어른들의 허언이 또다시 나의 진로에 장벽처럼 고추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사실, 대학생시절 건강한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봉사할 때, 그 지부의 대표인 멘토는 나를 아프리카 선교사로도 보낼  있었다. (반대로) 미국의 사립고등학교 유능한 수O교사이자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였던 남자와 중매를 주선하셨고, 난 바로 미국에 갈 수도 있었다. 단체는 신앙의 중심이 반듯한 사람일수록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 (자비량) 선교사로 파송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선진국 파송 선교사들은 대개 미국등에 유학생 신분이거나 졸업후 전문직 내지는 유수 (대)학교나 기업 종사자가 많았다. 그래 아프리카와 같은 오지보다 오히려 선진국에서 선교사들이 일탈하고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리라 추정해 본다.


중매로 두 번 만난  남자. 그러나 선교사라는 이름을 단, 그는 정작 그 선교단체를 도망갈 궁리, 자기 살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나와 결혼한 후 바로 선교단체를 나가자고 은밀히 제안해 왔다. 그것도 서로에게 동일한 멘토에겐 비밀로 곧 속이면서까지 말이다. 그에게 붙여진 이름에 지리멸렬한 염증이 일어났다. 그는 그 단체에서 기념비적인 신앙인으로 회자되던 나름 인정받던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문 사역자도 얼마든지 이중적일 수 있고, 세속적이며 소시민적일 수 있다는, 아니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어른이 되면 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에 익숙한 듯했다. 새삼스럽진 않았다. 그 모임은 워낙 청교도적이고 진실해서, 이른바 선교사들도 종종 정욕에, 시기.경쟁에, 세속적 성공에 시달리고 있음을 자인하고 간증하는 것을 곧잘 들었던 터였다. 그나마 자기 내면을 이렇게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진실하고 존경스러운 일이다. 그런 건강한 모임에서, 탐욕을 은닉한 남자가 그것을 교묘하게 꾸민 모습을, 가까이에서 내비쳐 경험한 것이다. 나는 멘토에게 이 먹음직한 중매건을 내려놓으며, 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알렸다. 동시에 그 남자는 이 문제로 자기 실체를 깨닫고, 오랫동안 성찰하고 훈련을 받았던 듯싶다. 물론 우리의 중매는 없던 것이 되었다. 먼 훗날이 지나 그는, 그 일이 계기가 되었는지 오히려 더욱 성숙한 사역자가 되었다는 후문을, 그 모임의 사모님께 몇 년 전 들었다. 다행이고 감사했다.


그때 생각했다. 어쩜 만민 제사장설-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하늘의 뜻을 부여받은 사명자로, 평신도도 거룩한 직분 곧 성직이다는 의미- 은, 전문사역자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이다. 오히려 도시 한복판에서 직장인으로 또 평범한 시민들로 사는 이들 속에서 더욱 검증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때마침 그 중매사건 전후로, 영육 간에 극심한 슬럼프가 나를 소진시켰고, 그것을 명분으로 양해를 구하고 지역교회로 돌아왔다.


어려운 숙제였다. 전문사역자가 아닌 자로서 사명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발상 말이다. 선교단체 선후배들과는 요즘도 여전히 연락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 아프리카와 세계 각지에서, 가까이 또는 멀리서 서로의 인생을 응시할 테다. 삶의 형태에서 그들이 왁구를 맞춰 살아간다면, 나는 내면의 왁구를 맞춰 좀 더 정교한 스텝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도시 한복판에서
세상과 거꾸로 살아간다는 것



20대에 노데이팅(연애를 전혀 안 함)을 필두로, 가끔은 아무도 모를, 이 고독하게 피 터지는 투쟁을 내가 왜 하고 있는가 눈물이 났다. 무슨 똥고집으로 하나뿐인 나의 인생을 넥(neck)으로 걸고 내던졌는가. 내가 믿는 그 진리가, 진정 진리됨을 경험하고,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그 지긋지긋한 말에 쇄기를 박고 싶었다. 그 입을 부끄럽게 하고 싶었다. 아니 실은, 나 자신도 동조하고 싶은 이상과 현실 또 진리와 현실, 그 차이를 극복하므로 자신의 우려와 회의에 쐐기를 박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투쟁의 시간, 나는 나의 거짓과 위선에 더 많이 직면하게 되었다. 순수를 지향하지만 교묘하게 죄를 탐닉하고, 정의를 추구하지만 작은 약속에서도 불의를 드러내고, 사랑을 전한다 하였지만 이내 분개에 치를 떠는 나 자신을 말이다. 어른들이 말한 이론과 현실은 달라는, 나의 불완전성 앞에, 스스로를 무너지듯 엎드리게 했다.


그간 내가 조금이라도 한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면, 전적으로 절대자의 은혜와 도움 때문이었다. 나를 포함한 인간은 누구나 약하고 악하다, 그래 늘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이른바 '현실타령'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동시에, 우린 하늘을 바라보고 오늘 한걸음을 내딛는 존재다. 딱 그 지점에서 현실의 숱한 한계와 모순에 대한 답을 찾아갈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인생은 매일 한 걸음씩 절대자를 의지하며 내디뎠던 하루살이 여정이었다.







# 작년(2023년) 하반기, 넷째 언니(조카 진국이의 엄마)의 디스크 수술이 5차까지 확정되며 병원비가 총 4000만 원 넘게 진단받아 지쳐가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저번주, 놀라운 방법으로 병원비가 전액 무료로 진행된다 소식을 접했습니다. 오늘 큐티는 인생이 절망적인 광야와 같다 여겨지실 분들과 나누고 싶은 말씀입니다

 



[생생큐티] 2024년 1월 17일(수) 우리 중에 계신가(출애굽기 17장)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출애굽기 17:7)  

  

이스라엘 자손. 야곱이자 이스라엘인 그의 후손들이 40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여호와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애굽 곧 이집트에서 탈출해 신 광야로 떠났고 이내 르비딤(휴식이란 뜻.시내 산 북서쪽 20㎞ 지점의 와 페이란(wadi Feiran)으로 추정) 장막을 쳤습니다. 그들이 머문 곳은 이른바 사막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노정은 깡 시골이란 표현처럼 깡 사막을 지나는 여정이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식물도, 동물도 찾기 어렵고 물은 더군다나 귀했습니다. 처음 애굽을 탈출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의 자손들. 그들은 400년 전 야곱에서 나서 요셉을 포함한 12지파의 후손으로 영적인 긍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오래된 설화처럼 귀에 들려지는, 하나님의 구원은 이 출애굽을 통해서 1차적으로 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굶어 죽을 수도 있고 심지어 물 한 모금 없어, 며칠 뒤에 나뿐 아니라 모두가 몰사 당할 수 있는 위기에 처하면 사람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확고하다 믿었던 믿음도 흔들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도 휘청거리곤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이라기 보다,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면서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머물게 하는가 또 당장 구원 내지는 구조를 해주지 않는가에 대한 불평이며 원망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당시 이스라엘의 내적 상태를 기술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다'는 표현 보다는, 같은 맥락이지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어쩜 직역과 의역의 차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도 적용점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정말 신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지는, 입술에 ‘주여 주여 믿숩니다’를 달고 산다고 증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사건과 상황 또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리액션, 감정, 태도에서 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예전에 믿음의 선배들은 말했습니다. 수평적인 인간과의 관계는 곧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드러내는 바로미터라고 말입니다. 가족과 친구, 직장동료, 이웃 등 사람들에게 원망과 불평, 다툼을 일삼는 사람이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고 믿고 신뢰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말입니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뱉는 무한 반복적인 불평과 원망소리를 듣다 보면 지겹다 못해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합니다. 아니 두 눈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포함해 하나님의 엄청난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인데, 왜 저렇게 믿음이 쉽게 사그라드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믿음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앙인격은 왜 그리 둘쑥날쑥인지도 의아합니다. 정말 온 우주의 하나님이 선별해서 뽑은 선택한 백성이 맞나 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 곧 사막 한가운데에 나뿐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아내, 남편, 자녀 심지어 갓난아기, 임산부까지 모두가 행군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나 때문에는 불평과 원망, 두려움을 참고 불사하겠다 할지라도, 가족 때문에 라면 마음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즉 당시 현장에 타임머신을 타고 간다 생각하면, 나라고 그들과 달랐을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이런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죄'라고 정확히 짚어 줍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시절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순교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아니 구약에서도 온갖 고통스러운 핍박을 받았던 선지자들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 하나님을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온 세상이 인정하는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도, 나의 믿음의 유효기간을 보증해 주거나 연장시켜 주지 못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우린 어떻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2절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2절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즉 상황이 어려우면 우리는 믿음이 흔들릴 수 있고 불편한 감정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때 그 문제를 하나님께 들고 나가야지, 사람들을 붙들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진짜 감정이 격분하더라고 하나님과 다투듯이 하나님 앞에서 토로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또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상황과 사건을 해석할 통찰력과 답을 주십니다. 무엇보다 구원의 도움과 방향을 줍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최근에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생각했습니다. 이번주초 하루를 마치고, 너무 고단하였던지 초저녁에 골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직장일을 돌아보느라 진이 다 빠졌었습니다. 진국(조카 가명)이는 폐업한 사업에서 남아있는 세무적 실수로, 세무서에 불려 가 또다시 800만 원 추징 선고 받았고 이번달 월세 등 돈이 200만 원이 모자랐습니다. 그의 어머니이자 내 넷째 언니도 병원에서 목디스크 수술 후 2주 후엔 허리수술을 또 받아야 했습니다. 1회당 수술비는 1000만 원으로, 다른 부위까지 5차에 걸치는 수술 총액이 4000만 원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몇 주 격인 듯했습니다. 언니가 수술을 느라 계속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은, 매달 생활비가 최소 200~300만 원 계속 적자라는 의미입니다. 진국이의 마이너스 재정상황은, 이제 취직한 직장에서 성과급이 안정적으로 올라가기까지는 빠듯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직장에서 중요한 프로젝트 4~5개가 진행 중이므로, 날마다 긴장하며 다룰 일이 많았고, 새해 여기저기 의뢰건이 또 폭증해서 감사하면서도 일이 과중했습니다.   

   

이번 주는, 밤에 잠을 자려할 때마다, 주변에서 외유내강이며 믿음이 단단하다고 일컬어지는 나도 심신이 지치려 했습니다. 작년 여름부터, 진국이에게 대준 돈만  6000만 원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원망과 불평은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끊어 거이 하지 않고 사는 나이지만, 서글픈 마음마저 다독이긴 어려웠습니다. 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마스크 안으로 수시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훔치는데, 나중에 전철을 탄 맞은편 학생이 본 것만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 내가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며, 이 지치고 서글픈 마음을 하나님께 통곡하듯, 새벽이고 낮이고 오가는 길에서고, 틈 날 때마다 정시로 또 무시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제 곧 화요일에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언니가 고관절에 인공관절 수술을 받아서 2종 장애등급을 받았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목 디스크 수술을 받은 후에, 급기야 1종 (질병) 장애등급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라에서 병원비를 어느 정도 탕감해 주고, 나머지는 언니가 든 보험회사가 보험금을 대주어, 100% 병원비를 면제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1차 수술비 포함 전액 무료로 수술을 받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언니가 재정악화로 기초수급 지정까지 받아, 현재 언니가 내고 있는 집의 임대료나 관리비도 낮아지고, 월 60만 원 이상 나라에게 현금적 지원을 받는 등, 여러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나중에 복권방-장애인이나 기초수급자만이 운영권을 얻을 수 있음- 운영권을 지원할 자격도 주어진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몸이 약한 넷째 언니에게 적합한 직장과 직업이 새로 생겨나길 기도해 왔는데,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나아가 직장일도, 대형 프로젝트(1건당 받게 되는 성과급이 천만 원 단위를 넘는) 4-5건이, 동료들과 비교하면 손 안 대고 코 풀듯 술술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가 가족과 여러 사람들의 일들을 감당하느라 심신이 지쳐, 직장일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 조차도 채워 주신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는, 오늘 말씀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비관적이고 어둡게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살면서 이스라엘 자손처럼 여러 광야훈련을 받으면서, 믿음이 성장하고 강단이 생긴 것 같아 감사합니다. 제가 계속해서 광야의 순간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신뢰하므로, 문제가 있을 때 사람이나 사건과 다투고 씨름하기 보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믿음을 경험하며 믿음을 쌓아가기를 기도합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출애굽기 17:1-16)          














*그림,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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