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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Jan 10. 2024

19,742원짜리 아파트(2)

거꾸로 살다가 통장잔고 이만 원으로 집을 샀습니다 <실화>

어긋남과 거꾸로.

순정의 삶은 내내 어긋남의 연속이었다. 나의 삶이 거꾸로의 연속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삶은 고단하고 고독하며 때로 많은 숨을 요구한다.


11년 전엔가, 순정을 처음 만난 것은 해외의료봉사 때였다. 나와 동갑인 그녀는 앳되고 수줍으며 단아하고 어여뻤다. 그때만 해도 그다지 살도 찌지 않았다. 그녀를 볼 때, 마음이 편안했던 것은 그녀의 옷차림과 행동거지가 나랑 비슷했기 때문일까. 거추장스러운 치장을 하지 않았고 누굴 의식하지 않는 듯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온유함은, 아들을 혼낼 때가 되면 단호한 카리스마로 뒤바뀌곤 했다. 부드럽고 강단 있고 소박하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자주 맡아봤을 향취. 내 어머니의 향취.  


그 당시 순정은 두 아들과 함께 사는 이혼녀였다. 그녀의 부드러움에 비쳐 보자니 이혼이라는 단어가 목의 이물감처럼 소화가 안 된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우리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봉사모임의 일원이 되어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만날 수 있었다. 순정이 20대에 열정 어린 연애로 만난 남편은, 결혼 후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갔다 한다. 당연히 그의 생활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남편의 형도 알코올중독이었, 심지어 그의 아버지 곧 순정의 시아버지는 술독에 빠져 끝내 돌아가셨다 한다. 내게는 익숙한 이 주제의 어느 대목에서, 순정은 치가 떨렸을까, 이 온화한 여자가 한 남자를 내치려 했다면 말이다. 그녀는 이혼 후에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궁핍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순정은 남편이 싫은 것이 아니라 그의 술독이 싫은 것이었고, 다행히 그 남자는 아내를 손찌검한다든지 지독한 주사로 자식들을 괴롭히진 않았다. 무엇보다 순정은 이혼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남편의 자리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재결합을 거듭 종용했다. 해외선교 아니 아프리카 선교보다 더욱 숭고한 게 가정을 지키는 일이다, 그리 권면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몇 년 뒤 순정은 남편과 재결합을 했고 슬하에 딸이 2명 더 태어났다. 그렇게 남편과 4명의 자녀가 순정과 한가족이 것이다.





2020년 순정에겐 좋은 소식이 있었다. 성남시 재개발 지역에 아파트청약이 당첨된 것이다. 경쟁률이 엄청났다는데, 자녀가 4명에 무주택자인 것이 요긴했던 것 같다. 그 당시 아파트가 한창 공사중일 때, 그녀와 함께 그 일대를 드라이브하며 함께 기뻐했다. 나는 너무 좋아서 지나가듯 빈말처럼 얘기했다.


"나도 수도권에 이런 아파트가 있었으면 참 좋겠어. 안양에 이름으로 엄마 집은 사드렸지만 엄마가 100세까지 사신다 치고, 그건 집은 아니다 생각하고 있거든. 안양이 지금 직장과도 (출퇴근 거리가) 멀고 말이야. (그리고) 그 남자도 (그의) 집이 서울에서 너무 멀어."


순정은 천재와 내가 썸을 타던 초기부터 내막을 잘 아는 친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우리가 썸 타던 중간에 결별처럼 소식을 끊고 지낼 때, 나에게 먼저 사과하라고 종용해, 결국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준 은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은 순정그녀가정에도 덮쳤었나 보다. 순정은 청약 당첨 후에도 통장이 늘 마이너스였기에 계약금은 물론 잔금을 치를 형편이 안 되었다. 그나마 그녀의 언니가 계약금을 대주었는데,  언니마저 운영하던 자영업이 코로나 직격탄을 맞았다 한다. 그래 언니는 이후 잔금은 대줄 형편이 안 된다며 손절을 선언했다. 게다가 청약당첨자가 임대아파트 거주 중일 땐, 일정 기한까지만 거주하고 임대아파트에서도 나가야 한다 했다. 그 시한이 작년 연말이었다. 순정이 운영하던 자영업도 빚만 늘었고 매출은 월 100만 원도 안 되었다. 그녀는 길바닥에 나앉기 전에 어쩔 수 없이 분양권이라도 팔아야 했다.  


늦봄 어느 날, 순정이 내게 전화를 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대번에 자신의 아파트 분양권을 살 생각이 없는가 물었다. 처음엔 당연히 고사했다. 하늘의 신성한 방법이 아닌 인간의 투자방식으로 무언가 얻는 것 같은, 지금까지의 나의 소신을 희석시키는 꼼수처럼 거부반응이 일었다. 또 천재는 지금은 아파트 살 시기가 아니라고 내내 노래를 부르던 차였다.


그러나 내가 삶의 기준으로 삼는 가치 곧 사람을 먼저 살리고 본다, 꾸이러 온 자를 (돈이 있는데도) 되돌려 보내지 말라는, 잣대에서 에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때 내겐 현금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다 6월이 되어 순정이 다시 톡으로 연락을 해왔다. 출근하려고 버스를 탔을 때였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연락을 줄 친구가 아닌데, 뭔가 일이 생겼다 직감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순정은 목이 잠긴 듯했다. 몸살감기가 와서 그날 오전에 있는 봉사모임에도 못 갔다 한다.


이번에는 아들이 듣도 보도 못 한 보이스피싱 아르바이트 사기에 연루되어 경찰서에서 연락 오고 난리란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회사를 지천에 두고도 더 내딛질 못 하고 도로변에 멈춰 섰다. 그리곤 근 2시간 넘게 씨름하듯 그녀와 통화를 했다. 순정은 이미 코로나 자영업자 대출도 연체상태인 데다, 아들이 연루된 사건의 피해자 쪽에서 합의금을 논하는 듯했다. 분양권은 날리게 생겼고, 지금 임대아파트는 규정대로면 11월에 집을 빼야 한다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야말로 이번엔 진짜 길바닥에 나앉게 된 것이다.


순간 머리가 아득해졌다. 마치, 그 언젠가 내가 살아냈던 봉천동-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의 시계가 째깍째깍 다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울지 않는 순정이, 그녀의 눈물이 마음에 닿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어디서 무모가 들이닥쳤는지, 나는 책임지기 힘든 말들을 내뱉고 말았다.


"알겠어. 내가 분양권 살 수 있는지 알아볼게, 근데 나 분양권 사고파는 것, 하나도 모르는 거 알지? 내가 아파트 청약을 해봤겠어, 아파트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어. 근데 한번 알아보자. 길을 찾아보자. 하나님께서 우릴 망하라고 고난을 주실 분이 절대 아니니깐. 안심하고."


몸살인데도 돈을 아낀다고 병원에도 가지 않고 있는, 그 순정에게 말을 이었다.


"카톡으로 20만 원 봉투 송금했어. 그걸로 우선 오늘 바로 병원 갔다 오고, (고 3인) 둘째(아들)에게 문제집 살 돈도 주고. 알겠지?"


그랬다. 순정의 둘째 아들은 그 당시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앞두고 있었는데, 문제집 살 돈이 없는 듯했다. 사실 그날은 나의 월급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200만 원을 포함해 십일조, 카드대금, 각종 세금과 공과 등이 빠져나가고, 어머니를 간병하는 2명의 언니(큰언니, 진국이 엄마인 넷째 언니)들에게 생활비 230만 원, 160만 원을 각각 보내고 나니 이미 통장 잔액은 20만 원대였다. 나는 그 돈마저 싹싹 긁어 순정에게 준 것이었다. 회사에서, 몇 주 뒤 성과보너스가 또 나오긴 하지만 그 사이엔 신용카드로 살아야 했다.  

 

순정이가 6월 23일에 보내온 카톡


순정에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해결해 보겠다고 말은 했지만, 전에 없이 커다란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날, 내 통장 잔고는 19,742원이었던 것이다. 순정아파트 분양권을 '지금' 사기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19,742원으로 사겠다는 무모함 그 자체였다. 


나는 우리 집 주택담보대출만 월 200만 원이 넘게 들어가고 있던 터라 그것만으로도 부담이 컸다. 잘못 개입했다가는 개인 파산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돕고자 하는 상한 마음이 강렬하게 밀려드는 것이었다. 이 애꿎은 오지랖인지, 인정머리는 또 발광인 것이다. 난 집 없어도 별로 개이치 않는 사람인지라, 그냥 큰 사달 없이 조용히만 살고 싶었다. 그게 당시 내 진심이었다.


그날 오전 회사 사무실로 돌아와, 아파트 분양권이 무엇인가부터 검색해서 공부했다. 해당 아파트의 평수는 분양권의 피 이른바 프리미엄만 2억이 넘었다. 물론 순정이는 1/3의 프리미엄만 받기로 했다. 전세를 끼고 산다고 해도 계약금과 잔금, 취득세 등 부대비용 다 합치면 최소 현금만 2억 2천이 필요했다.


'내 살다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허언을 하고 말았네. 어쩌지..'


순정의 인생에 이번처럼 폭탄 같은 일들이 떨어질 때면, 나는 조금씩 몰래 도와주곤 했다. 코로나 때도 자영업 하는 넷째 언니를 한해만 2300만 원 도와주느라 빠듯했으나, 순정에게도 두 번에 걸쳐 총 400만 원을 도와주었다. 그녀의 자존심을 살펴 가게 투자금이라 명칭 했으나 받을 수 없는 돈임은 알았다. 10년이 넘는 햇수동안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또는 명절이면 작게는 5만 원, 많을 때는 50만 원 가까이 아이들 용돈 주라며 건네주곤 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얼마 주면 해결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로선 엄청난 목돈이 필요했고, 내가 고사하면 그녀의 가족은 아예 길바닥에 나앉을 것이었다.


순정은 부동산을 통해서도 팔 수 있는데, 굳이 나에게 연락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중에 알았다. 부동산에 내놓으면 더 좋은 조건으로 팔 수 있는데도, 자꾸 하늘의 절대자께서 이왕 팔 거 좋은 일하라고 부담감을 주었단다. 내가 결혼을 생각하는 남자가 있고, 수년 전 그 아파트를 보며 "나도 수도권에 이런 아파트가 있었으면 좋겠다" 며 스치듯 했던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던 것 같다.


그날부터 분양권에 대해서 1도 모르는 상황에서 알아보니, 희한한 사실을 알게 됐다.  지역은 원래는 조정 지구였다가 그해 4월부터인가 비조정 지구로 변경되었다 한다. 그래 순정의 아파트도 원래는 5년간 전매가 제한되었고 무엇보다 5년 실거주 의무로 묶여있던 아파트였다. 그런데 비조정지구가 되면서, 전매도 가능해졌고 실거주 의무도 없게 된 것이다. 분양가 상한제 적용받지 않고 건축한 아파트라 실거주는 논외라는 것이다. 나는 FM이라 적법하지 않았으면 결국 고사했을 것이다. 우리가 분양권을 논하기 2개월 전 국가가 변경한 정책, 이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분양권 매입. 그렇다면, 현금 2억 2천만 원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게다가 나는 사람과는 돈거래를 하지 않는다. 이삼백만 원 급전도 그냥 주지 돈거래를 거이 하지 않았다. 며칠을 끙끙 앓다가 짝꿍인 천재에게 이 일을 의논했다. 그리고 분양권을 공동 매입하자며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그런데 하루만 생각한다던 그가 다음날 돈을 대겠다 한다. 때마침 한 달 전인가 그의 적금 4개가 동시에 만기가 되어 손에 쥐고 있는 돈이 있던 터였다. 이런 공교로운 타이밍이 있나 싶었다. 그는 그중 1억 5천만 원은 자신이 부담할 수 있겠단다. 심지어 자신은 직업상 공직을 감안해야 해서, 명의는 우선 내 이름으로만 하란다.


그는 청학동 선비 같은 사람이다. 40대가 되도록 단 한 번도 부동산 투자를 해본 적이 없다. 그의 어머니는 천재가 나중에 공직자가 될 수도 있다며, 아파트와 땅 등은 모두 어머니와 아버지 명의로만 매입했다 한다. 심지어 그는 나를 만날 때까지도 은행 폰뱅킹에 이용되는 오티피(OTP) 카드도 없이 살았다. 천재는 생활영역에서는 무심함 투성이로, 마치 원시림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아마 공부와 연구, 일 외에는 전부다 어머니가 챙겨주셨던 것 같다. 그런 그로서는 이번 일이 엄청난 도전이었을 것인데, 순정을 돕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에 그도 적극 지지를 보낸 것이다.


이제 7천만 원. 어머니를 간병하는 큰언니에게 혹시 목돈이 있는지 물어 보았다.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큰 언니는 늘 '돈 없다'를 입을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니가 실은 몰래 숨겨놓은 돈이 있다 실토를 하며, 나머지 돈을 대주겠다 한다. 물론 나는 천재와 큰언니, 두 사람 모두에게 은행이자의 2배를 배당금으로 주겠다 약속했다. 그 정도는 해야 마땅하다 싶었다.


 

6월 23일 순정이게 20만 원을 보낸 후 나의 통장 잔고



그렇게 정신없이 퍼즐을 맞춰, 올해 나는 얼떨결에 아파트 주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 폭풍을 헤쳐나가다, 불현듯 그해 연초 절대자께 드린 기도가 떠올랐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성경 말씀대로 산다고 시간도, 돈도 심지어 에너지도 사람 돕는데 쏟아부으면 산 것 아시죠? 그런데 막상 내 인생도 챙기며 살려하니 현금이 없습니다. 매달 지출되는 고정비가 너무 많아 늘 통장잔고가 마르곤 해요.

제 연봉으로 40대에 결혼을 한다면, 남들은 수도권에 집 한 채는 거뜬히 샀을 텐데요, 저는 퍼주다 (현금) 거지가 된 것 같아요. 저, 이렇게 늘 손해만 보고 퍼주기만 해도 되는 걸까요? 서울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서울근교에 반값 아파트라도 얻을 수 없을까요?"


이 기도를 그해 연초 푸념처럼 했다. 그러나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기에 몇 번 기도하고는 그만 두었다. 이내 학생 때 내 멘토나 믿음의 선배들처럼 평생 전세 살아도 괜찮아, 하며 그 기도를 잊고 지냈다.


이 아파트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나를 도와준 모든 사람들이 실은 내게 도움을 받은 이들이었다. 순정은 물론 팔수술로 직장을 다니기 힘들었던 큰언니를 간병의 명목으로 생활비를 대주고, 짝꿍 천재도 병원을 쉴 때 내가 물심양면으로 지극히 섬겨 주었던 터였다.


무엇보다 아파트의 위치를 보고 놀랬다. 생각해 보건대, 그 아파트가 있는 지역은 공교롭게도 내가 10년 넘게 독거어르신 세분을 매달 1:1로 섬겼던 지역이었다.


아파트를 사는 과정은, 마치 내가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너나없이 나를 도와주기로 합심한 공동 프로젝트 같았다. 심지어 나라의 규정마저 변경되면서 타이밍들이 또 금액들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무엇보다 그냥 내뱉은 '반값 아파트'라는 말처럼, 작년 불황속에서도 이 아파트 시세는 계속 올라가고 있어, 현재는 시세 대비 분양가가 거이 반값에 근접했다. 그야말로 반값 아파트인 것이다.


나는 순정을 도와줄 때, 가끔은 급전이 부족해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줄 때도 몇 번 있었다. 10년 전 우리도 집을 사기로 날려, 1000만 원 보증금에 월세 55만 원 살이부터 시작했으니 나도 넉넉한 편은 결코 아니었다는 얘기다.


내가 아파트 주인이 되던 그즈음 짝꿍 천재는 내게 말했다.


"내가 선뜻 거금(아파트 사는데) 대주었는지 알아? 내가 사람과는 돈거래를 일절 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말이야. 너는 내가 혹여 큰 병 걸려 수억 원의 돈이 필요하다면, 이 아파트를 팔아서라도 나를 치료해 줄 사람인 걸 알고 믿기 때문이야."


인간은 안개와 같은 존재이기에, 오늘 하루도 생사화복을 장담할 없다. 우린, 내 목숨의 유통기한이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난 이 대목에서 단단한 중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아파트 소유는 편의성은 있지만 대단한 경사랄 순 없다. 그보단 이 모든 과정에서 그간 내 도움을 받았던 분들, 심지어 내가 사계절 궂은 날, 추운 날, 더운 날 할머니들을 위해 밟았던 그 땅에, 내 아파트가 생겼다는 사실 앞에서 전율마저 느껴졌다. 이것이 실화가 맞나 싶기도 했다. 하늘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다 보고 있었단다. 네 마음을 내가 안다"




몇 해 전 크리스마스 이브. 남들은 연인들끼리,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낼 때였다. 나는 이 아파트가 들어선 블록 건너편에 독거 할머니 한 분을 찾아뵈러 갔다. 그냥 안부 인사만 드리고 와도 되는데, 굳이 사비를 들여 다이소에서 크리스마스 트리와 트리를 장식할 소품과 산타인형도 사서 갔다. 할머니는 88세가 다 되도록 크리스마스 트리를 해본 적이 없다 하신다. 할머니의 유일한 문화생활인 TV, 그 주위로 알록달록 트리 불빛을 연결해 주고 산타 인형과 극소형 트리나무를 나란히 장식해 주었다. 어색한 듯 무르익은 세월 깊은 할머니의 주름은 미안한지 울컥한 지, 다리미로 편듯 탱탱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트리를 보며, 할머니와 배달앱으로 주문해서 온 저녁을 함께 먹었다.


할머니의 그간 기구한 인생은 40년 넘는 불면증과 우울증이 대변해 준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그 옛날 공사 회장까지 하신 분이었단다. 당연히 대단한 부자였다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둘째 오빠가 교묘하게 그 유산을 거의 다 가로챘다 한다. 다른 형제들도 유순했고 대비 없이 있던 터라, 소송은 했으나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나 보다. 할머니는 얼마 안 있다 결혼을 했으나, 딸아이 하나 낳고는 몇 년 못가 이혼을 했다. 온실 속 화초 같던 한 여자는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다. 시장에서 노점상, 막일 등 온갖 일을 하며 악다구니만 늘어갔다 한다. 그 때문에 40대 초반부터 극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려 온 것이다.


그랬던 할머니는, 나를 만나고 2년도 안돼 불면증이 호전되어 40년째 먹던 수면제를 끊었고 우울증도 많이 좋아지셨다. 맨날 죽고 싶단 말을 입에 달고 살던 할머니, 그 말은 이젠 끊으셨다. 대신 성경을 보고 고양이를 키우며 종종 아기처럼 웃기도 하신다.


삶이 처절하게 힘들고 고단한 분들, 내 몸과 같은 그 이웃들과, 은밀해서 때론 내 가족도 몰랐던 나눔의 시간들. 아파트 소유권을 얻으며, 그간 남모르게 흘렸던 수고와 땀, 눈물을 하늘에서 격려해 주는 것만 같았다. 어쩜 내가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면 현금 2억 2천만 원은 모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나는 그간 현금을 한가득 모으진 못했지만, 누군가의 신뢰와 진심 어린 응원들은 쌓아 두었기 때문이다. 돈은 죽으면 하나도 가져갈 수 없지만 신뢰와 사랑, 우정은 내 무덤의 비문으로썬 값진 훈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엔 순정을 아파트의 전세 세입자로 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신용불량자라 대출이 불가능하다 한다. 대신 언제까지일지 모르나 순정이 목돈을 모을 때까지, 우선 매달 50만 원씩 생활비를 후원하기로 했다. 임대아파트도 분양권 이슈가 해결되어서 그런지 그대로 살아도 되는 듯하다. 남편도 회복이 되어 작년 하반기부터는 직장에 다닌다. 둘째 아들은 뜻하던 대학엔 역부족이라 재수를 생각하지만, 효심이 남다르니 그것이 대입 합격증 이상이 아니면 무얼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행운에 목말라 한다. 그러나 돈이 많고 행운을 잡아도, 또다시 불안해 하고 더 갖지 못해 조급하고 극성인 세상을 보라. 사람들은 내가 행운을 얻었기에 여유를 논하다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 역시, 10년 전 반 사기로 살던 아파트를 날렸고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55만 원 집에 나앉았었다. 그때도 나는 이 말을 동일하게 설파하고 다녔었다.  


행운보다 더 대단한 것은, 그 행운이 없고 소유가 크지 않아도, 마음의 풍요와 여유 그리고 인생의 기개와 용기를 누리며 사는 삶이 아닐까. 그것이 엄청난 소유보다 더 큰 축복이고 행복의 지름길이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 아파트를 얻기 전에도 아니 월세집에 거할때도, 나는 내면적 풍요와 여유를 누리곤 했었다. 그건 무소유에도 개이치 않는 영혼의 충만 때문이었다.


행운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가르쳐 주기 위한 땅달보 몽학선생에 불과하다. 올해도, 존재와 내면 자체에 스며드는 충만한 마음, 그 행운으로 이 한해를 시작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린도후서 5:1)















*그림,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혹시, 오탈자 등은 너그러이 넘어가 주세요. 제가 좀 더 공부후 보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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